선덕여왕 10회에서 백제의 아막성을 공격하여 취한다. 설원랑은 속함성을 손도 쓰지 않고 백제로 부터 탈취한다. 전쟁신이 기존에 봐왔던 전투신과는 차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덕만(이요원)이 첫 전투에 임했을때 극히 현실적이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
단, 옥의 티(?)라면 신라군이 진을 치고 있던 생책의 문 정중앙에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의 # 문양이 나온다. 물론, 광개토태왕의 # 문양은 광개토태왕의 제기로 알려진 그릇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를 최인호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상징문양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이번 선덕여왕은 과감하게도 이를 신라의 고유 문양으로 치환해 버렸다. 어쩌면 우물모양 # 은 신라의 고유 문양에 가까울 수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지가 나(을)정 이고, 그이 부인인 알영부인 또한 우물에서 씻김을 받았으니 우물과 밀접한 나라는 오히려 고구려 보다는 신라일 것이다.
그럼 역사에 기록된 아막성과 속함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아막성이나 속함성은 삼국사기에 딱 2번씩 나타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와는 다르게 진평왕 24년(602년) 아막성은 신라가 백제의 아막성을 공격한것이 아니고 백제가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하고 있다. 김유신의 나이는 몇살이였을까? 죄송하게도 김유신은 595년생으로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8살이 된다. 예전 SBS의 연개소문에서 김유신이 화랑의 북한산성전투에 참여를 한다. 그런데 이때 북한산성 전투는 603년 김유신 나이 9살때 이다.
이번 mbc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은 1살더 낮춘 8살에 첫 전투겸험을 해 버렸다. 아마도 선덕여왕의 작가는 sbs 연개소문은 본적이 있지만 <삼국사기>는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한권으로 읽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시리즈는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한권속에 아막성전투나 속함성 전투를 집어 넣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아막성,속함성을 스토리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고증은 고사하고 역사학자에 감수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럼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아막성 전투와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뻘밭 전투인 진뻘전투를 살펴보자.
선덕여왕에 나오듯이 백제군은 덕만이 포함된 신라군을 천산의 서쪽 큰 진펄쪽으로 매복하고 있다. 신라군을 몰살할 기회를 잡지만 귀산과 그의 부하 추항의 죽음에 이르는 반격으로 해수는 단기 필마만 남기고 달아나 버린다.
진평왕 24년(602) 가을 8월에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장수와 사졸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項)이 전사하였다.
무왕 3년(602) 가을 8월에 왕은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아막성(阿莫城) <다른 이름으로는 모산성(母山城)이라고도 하였다.>을 포위하였다. 신라 왕 진평(眞平)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성(小陀城), 외석성(畏石城), 천산성(泉山城), 옹잠성(甕岑城)의 네 성을 쌓고 우리 강토를 가까이 쳐들어 왔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解讐)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 네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乾品)과 무은(武殷)이 무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웠다. 해수는 불리하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큰 진펄 가운데로 퇴각하여 군사를 매복하여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서 갑옷 입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큰 진펄에 이르자 매복한 군사들이 일어나 급히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귀산은]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項)과 더불어 창을 휘두르며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 더욱 분발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해수는 겨우 죽음을 면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진평왕 46년(624)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우리의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暫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縣城), 혈책성(穴柵城) 등 여섯 성을 에워쌌다. 이에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訥催)는 봉잠성, 앵잠성, 기현성의 세 성 군사와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무왕 25년(624)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岐岑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懸城), 용책성(冗柵城) 등 여섯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백제가 신라에 속한 속함성을 빼았은 때는 무왕25년 진평왕 466년인 624년 겨울이였다. 624년 그전에는 당연히 아막성과 속함성은 신라의 것이였다.
(역대 풍월주와 생몰년)
점점 선덕여왕이 환타지로 변하는 모습이 과히 보기 좋지는 않다. 어찌되었던 13대 풍월주 용춘(579~602년)을 이어 화랑의 14대 풍월주로 나오는 이는 호림이다 호림은 일반적으로 3년의 풍월주 기간에 이례적으로 풍월주를 오래한 인물이다. 602~ 612년까지 11년의 장기독점을 하고 있다. 15대 화랑 풍월주는 15세로 풍월주(612~615)가 되는 김유신이다.
선덕여왕의 시대적 배경은 미실이 생존해있고, 설원랑이 생존해 있어야 하며, 문노가 생존해 있는 606년 이전이고, 호림이 풍월주인 602년 이후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막성 전투를 묘사한 시점은 삼국사기에 유일하게 기록된 602년이 되어야 한다.
미실과 설원랑과 문노는 공교롭게도 606년에 모두 죽는다. 설원랑은 미실이 병으로 죽고 바로 따라 죽는다. 진정한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노의 처인 윤공낭주는 지고지순한 문노에 대한 사랑으로 문노가 죽자 따라 죽는다. 사다함도 미실의 배반(?)으로 인해서 죽음을 택하고 있다. 화랑세기를 읽다보면 난삽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듯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역사 드라마에서 여성을 강한 잔다르크나 뮤란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KBS 천추태후도 마찬가지고, MBC 선덕여왕과 동시간대에 경쟁하고 있는 SBS의 자명공주 또한 마찬가지이며 그 이전 주몽에서 서소노의 역활도 잔다르크 증후군이나 뮤란중후군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남장을 하고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선덕여왕이 좀더 재미가 있으려면 보다 정교한 기획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현재 선덕여왕은 재미가 있다. 하지만 그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것은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한 몰이해이지 않을까 한다. 만약, 역사에 조금더 심도있는 관심이 있었다면 지금 보다는 헐씬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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