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의 사랑
뒤바뀐 역할모델 선화공주->법흥, 서동->보과공주
백제 30대 법왕의 아들(?) 서동과 신라 27대 진평왕의 3째 딸인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599년부터 600년 사이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미담이 될것입니다.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의 왕자 공주의 혼인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과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와의 사랑이야기 어찌보면 왕자와 공주가 서로 바뀌지만 유사점이 많습니다.
동성왕(493년) 때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를 맞이 하는 결혼동맹을 하여 신라와 유대를 강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나 비슷한 시기에 신라 지증왕(437~514)의 아들인 원종 법흥왕(23대 : 514~540)이 왕자 시절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암행 하였던지, 사신으로 갔던지 알 수는 없으나 백제 동성왕(24대 : 479~501)딸 보과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법흥왕(원종)이 신라로 귀국한 후 백제의 보과공주가 신라로 도망가 남모를 낳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읽으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랑 비슷하네라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래서 모티브의 유사성때문에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작한 위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던 이들의 유사성을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성왕->보과공주->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서동)
보과공주는 백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미사흔의 후손)의 딸 사이에 태어났을 개연성도 있습니다.
500년대와 600년대의 100년정도의 차이가 나고 왕자와 공주가 역할이 바뀌어 있지만. 모티브는 유사하고 왕들의 행동이 유사함을 볼 수 있으니 재미 있지 않은 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서동과 선화이냐기는에 관한 고사는 어쩌면, 법흥과 백제의 보과공주의 사랑을 모티브로 생겨났을 수도 있습니다.
지소(법흥/보도) 가 없었다면?
법흥왕의 형제인 입종갈문왕의 아들 진흥왕(24대 : 540~579) 7세의 나이로 왕위를 승계하니 남모공주는 진흥왕(심맥종)와의 손위 사촌이 됩니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시기하여 죽여 북천의 개울 바위에 숨겼으나 이를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서 준정과 그의 일당이 처벌을 받고 원화제도가 폐지되고 화랑제도가 시행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이 당시 권력은 법흥왕의 딸이며, 입종의 아내인 지소태후에 의해서 수렴청정하던 시기이고, 진흥왕은 재위12년(552년) 후에 개원으로 연호를 바꾼 후 직접 통치를 하게 됩니다.
법흥/보과공주의 사이에는 남모와, 3대 풍월주인 모랑을 낳습니다. 모랑은 미실의 아버지인 미진부에 이어 3대 풍월주에 오릅니다.
진흥왕 왕이 성인이 되기 전에 신라의 왕은 실질적으로 지소태후(법흥/보도)였습니다. 선덕여왕(덕만)이 쉽게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지소태후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지소태후가 없었다면, 법흥/보과의 아들인 모랑이 입종/지소의 아들인 진흥왕 대신에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외손인 모랑이 왕위를 법흥에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면 삼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각자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서동이 동쪽 서라벌에 간 이유는 ?
서동이 경주에 가서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만나게 되는 연결고리가 보과공주와 그의 아들인 모랑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불사에 힘을쓴 법흥(원종)과 무왕(서동)
다음은 이차돈이 순교할 즈음 주고 받던 이야기 입니다.
이미 신라에는 국가가 공인을 하지 않았지만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나옴니다.
무왕인 서동은 미륵사(왕흥사) 등 불사에 힘을 기울였듯이, 법흥왕 또한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하고, 불사에 힘을 썼습니다. 법흥왕이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하고, 불사를 시작하는 계기도 이미 불교가 활성화된 백제에서 건너온 보과공주의 숨은 공이 아닐까 합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왕실내에서는 이미 암암리에 불교를 믿었던 흔적이 있습니다. 천주사와 비처왕 시기 거문고 사건에 중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는 신라는 528년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이미 널리 퍼진 불교를 왕실차원에서 공인하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읽다 보면 김씨들은 미추왕 때 부터 불교에 심취했었고, 신라에서 가장 일찍 불교를 접한 집단이지 않을까 합니다. 실질적으로 왕실차원에서 불교를 들여온 이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가 고구려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온 이후 시기이지 않을까 합니다.
'역사IN드라마 > 선덕여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덕여왕, 신라에서 백제 특산물 황칠을 찾는 수나라 (24) | 2009.07.10 |
---|---|
화랑세기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25) | 2009.07.09 |
이차돈은 김씨일까? 박씨일까? (14) | 2009.07.08 |
이차돈은 김씨일까? 박씨일까? (15) | 2009.07.08 |
막장으로 치닫는 선덕여왕 (8) | 2009.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