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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IN드라마/선덕여왕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그 동안 덕만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천명을 제치고, 왕위를 이은 이유를 이전 기사들에서 충분히 증명하고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넷째, 천명은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이요원만큼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


(c) mbc 사극 선덕여왕, 칠숙과 소화

이제 미실의 충복으로 설정된 칠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실한 충복으로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머나먼 사막까지 추적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불길속에서 눈의 각막이상으로 실명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덕만의 유모인 소화를 사막의 개미지옥같은 유사에서 구하고, 사랑하게 된다.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칠숙과 석품이 어떠한 과정을 걸쳐서 반란을 일으키는 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칠숙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드라마와는 다르게 칠숙은 미실의 충복이 아니라, 신라의 왕위계승권에서 최고 우선권이 있었지만, 진평왕이 덕만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평왕이 미리 칠숙의 반란을 눈치채고, 칠숙을 잡아들여 9족을 멸한다. 칠숙과 같이 반란에 동조하고 참여했던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다가 가족이 그리워, 경주(서라벌)로 돌아와 집에서 잡혀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 칠숙의 반란 기사를 살펴보자.

631년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삼국사기 본기 신라 진평왕 53년 

칠숙이 반란을 일으킬때 직위를 살펴보자.. 이찬은 명예직에 가까운 상대등, 각간 등에 뒤이은 실질적인 일인자인  2등위의 신라 최고급 지위이다. 아찬 석품은,  대아찬 바로 밑인 6등위의 고위직에 있었다. 이들이 아들이 없는 진평왕 말년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덕만과 충돌하는 것이다.

칠숙의 지위로 볼때, 칠숙은 왕실과 최측근 사람이다. 석품 또한, 직.간접적으로 왕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숙의 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는 없다. 그러나 흔적은 몇몇 기사로 확인이 가능하다.

진평왕에게는 동륜과 만호 태후 사이에 난 동복 아우가 두명이 있었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한명은 백반인 진정갈문왕이고, 백반의 동생인듯한 국반(진안갈문왕) 이다.
그런데 백반과는 다르게 국반(진안갈문왕)은 덕만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진덕(승만)의 아버지가 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덕만)에는 "음갈문왕"를 보면 국반일 수 밖에 없는 "음갈문왕"에 관한 기록이 보여진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기서 백반도 "음갈문왕"일 수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면, 국반의 딸인 승만이 덕만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는 것만으로 충분한 반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한 증거를  칠숙의 반란 사건으로 증명하고자 하는것이다. 결론 부터 말을 하면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진평왕계보도

진평왕때로 돌아가 보자,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면 다음 대권은 누가 잡을까? 용수와 결혼한 천명이 대권을 잡거나, 신라에 빈번히 보이는 아들이 없을때나 있어도 나이가 어린 왕자를 둔 왕 다음은 사위가 왕이 되었다. 그러니 천명의 남편인 용수나 용춘이 대권을 잡아야 한다. 용춘과 용수는 최소한 용춘은 진평왕시기를 넘어, 덕만이 왕위에 있는 시기를 지나, 647년 진덕(승만)이 왕위를 잇는 그 순간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권은 덕만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천명은 정비의 소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 왕위계승 서열을 알 수 있는 진흥왕의 자손들의 계보도를 살펴보자. 

 
진평의 딸들은 천명과 덕만과 선화로 알려져 있다. 계보도는 복잡해서 진평/마야의 소생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위의 진평와 계보도에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로 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진흥왕 계보도


아들이 없는 진평왕 다음의 대권 순위는 누가 될까?

진평의 형제인 백반과 국반이 다음 대권 후보군이다. 그다음은 백반의 자식들이고, 그 다음이 국반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국반갈문왕에게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진평과 마찬가지로 딸인 승만(진덕)만이 있다. 그렇다면, 백반갈문왕의 자식이 왕위승계 제일 순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백반의 자식에 관한 기록은 망실되고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칠숙의 반란사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백반의 아들로 추측되는 이찬 칠숙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다음 대권을 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진평은 영민하고, 기지가 있는 덕만을 다음 왕위로 세우고자 한다.

또한, 덕만은 공주시절 고모부인 김서현의 딸인 고종사촌 문희와 자신의 언니인 천명의 아들인 이종조카 춘추를 결혼으로 맺어 줌으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덕만에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려면, 백반의 아들인 칠숙으로써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거나, 백반이 살아 있다면, 백반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반란을 결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국인(국민)이 전왕이 국정을 농단했다고 선전을 하면 그만이다.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기도 했었다. 하물며 왕이 하늘인 시대엔 오죽하겠는가? 이래 죽으나 권력욕이 넘치(?)는 칠숙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한다. 어차피 덕만이 왕위에 오르면, 숙여지내거나 숙청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칠숙은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한 쿠데타는 가혹하리 만큼 엄중하게 처벌한다.

이처럼
백반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이유는 칠숙이 백반의 아들이며, 반란의 여파로 구족이 멸문지화 당했기 때문이다.

칠숙의 반란사건은 삼국사기에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면을 추적하다 보면, 왕실내의 왕위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김유신의 아비인 김서현의 기록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기사는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 삼국사기 진평왕 51년

입니다. 물론, 김서현의 딸인 문희와 김춘추의 기록을 보면, 대장군보다 높은 소판(3등위)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추증되었거나, 김서현의 기록이 망실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칠숙의 반란 사건이 이상하고, 요상한 이유는 진평왕의 사망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54년(632)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200단(段)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632)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 삼국사기 진평왕 54년

김부식은 우리의 <고기>에는 632년에 죽었다 기록하고 있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들어 "631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왜 신당서와 자치통감이 잘못되었을까?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진평왕 죽음에 이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덕만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34년 선덕왕 3년에 숙부인 국반갈문왕과 결혼을 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깨는 글을 여러편 기사로 송고했다. 이글을 읽으신 분은 계속 머리를 흔들며 아닌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하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 시리즈 글에서 몇가지 소득이 있었다. 일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시기에 한일 인줄 안 문희와 춘추의 결혼을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기에 한일 임을 증명한 일이나,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꽃이 향기가 없다고한, "모란꽃 사건은 627년 11월에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명을 한 것이다. 또한, 이번에는 천명과 덕만은 진평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복자매이라는 증명도 하였다.

사실 통설이란 기존의 학자가 만들어논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한다해서 모두 진실이 되고,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를 하고, 의문점을 해소해 가는 것이다.

몇편의 글들은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내용을 드라마 선덕여왕을 빌어서 가설을 다시 재정립하여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 증명하는데 있었다. 또한,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글쓴이는 사극이 가져오는 병폐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잘못된 사극이던, 잘된 사극이던 이를 교본으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히려, 정통사극이나 명품사극을 표방하고, 스스로 당당히 그 시대를 재조명하였다고 선언한 사극이, 실은 잘못된 역사를 왜곡해 사극으로 만들어 질때 역사공부에는 더 좋은 교재가 된다.

사실 사극의 원전에 해당하는 소설이 잘못된 설정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면, 아무리 사극을 잘 만들더라도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덕만은 천명의 어린동생임 증명하는 글, 새로 업데이트 된글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본글 추천 후 크릭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