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만을 위해서 희생한 천명(박예진)
그러나 신녀는 미실 모르게 미생에게 덕만을 죽여한다고 한다. 이에 미생은 자신의 아들인 대남보(류상욱)에게 덕만을 아무도 모르게 죽여 없애도록 사주를 한다. 이에 대남보는 둑화살을 준비하여, 보종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인다. 예고편으로 천명이 죽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낸다.
선덕여왕을 본방사수를 하지만, 잠깐 잊었던 장면이 있다. 미실은 자신의 막내 아들인 보종을 여래사로 보내 문노를 암살하도록 지시를 한다. 하지만, 용춘은 자신의 수하인 임종 시켜 문노와 천명을 보호하도록 지시를 내린다. 추적하는 과정에서 임종의 화살을 맞고 보종은 드러눕고, 보종은 덕만에 의해서 구해지게 된다.
보종과 함께 또는 따로 움직이는 사람이 대남보이다. 설원랑의 아들이 보종이고, 세종의 아들이 하종이라면, 미생의 아들은 대남보 인것이다. 그런데 과연 대남보는 미생의 백명중의 한 아들일까?
대남보 미생의 아들? 사실은 용춘의 그림자 무사
글쓴이는 이전 [역사이야기] - '덕만' 출생비밀, 화랑세기 삼국사기.유사 비교해 보니 글에서 여래사 사건에서 임종이 보종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 차렸다. 대남보의 이야기가 나오길래 의당 대남보가 보종을 격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대남보가 보종에 화살을 날렸다고 생각한 것일까?
드라마 선덕여왕과는 다르게 대남보는 미생의 아들이 절대로 아니다. 대남보는 용춘의 충직한 가신이고, 용춘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고, 자신의 전가산을 용춘을 지키는데 사용을 한다. 용춘이 길을 가더라도 용춘 모르게 따르는 음병(닌자 같은 종류의 무사)이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움직이는데 용춘으로 부터 한푼의 지원을 받지 않고, 부자였던, 자신의 가산을 탕진해서 대남보의 자식들이 삼으로 새끼를 꼬면서 연명해 갔다. 요즘같으면 인형에 눈을 다는 일을 하면서 연명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지만, 대남보는 티를 내지 않고 용춘을 도왔던 것이다. 오죽하면 동네꼬마들도 대남보의 일을 노래로서 풍자를 했겠는가? 이에 용춘의 귀에 들어가서 대남보가 자신을 위해서 움직인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쳐 가난해지고, 세 아들 모두 베옷을 입었네
딸을 바쳐 가난해지고, 세 아들 모두 베옷을 입었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은 용춘의 가신으로 내세워도 할말이 없을 텐데 용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미생의 아들로 분하게 하고, 천명을 죽이는 역할을 주었다.
화랑세기가 말한 대남보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은 시제가 언제인지 알수가 없이 뒤죽박죽이다. 어찌 되었던, 덕만과 천명이 태어나고 20년이 지났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605~608년 정도이지 않을까?. 화랑세기 어디를 보더라도 용춘의 충복인 대남보가 미생랑의 아들이란 언급이 없다.
또한, 603년 이전에 대남보에게는 3명의 다 자란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대남보의 아들이 낭두가 될려면 문노가 만들어 놓은화랑의 체계하에서는 최소한 24살이 넘어야 한다. 14세 풍월주인 호림은 603~612년까지 장기 집권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호림이 호재로 나오며.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호재가 풍월주로 참전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대남보는 578년생인 용춘보다도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은 용춘보다 나이가 어린 화랑으로 설정을 했다. 더 나아가 천명을 죽이는 최대의 악역을 맡겨 버렸다. 난 도대체 원작 선덕여왕의 작가가 화랑세기를 읽어 봤는지 조차도 궁금할 때가 있다.
선덕(덕만)보다 오래 천수를 누린 천명
어찌 되었거나 대남보가 미생의 아들이라고 치자. 그리고 천명을 죽였다고 치자. 그런데 미안하게도 화랑세기의 13세 풍월주 (596~603)까지 생존했을 뿐만 아니고, 용춘이 한때 덕만의 남편으로 생활했던 632년 까지도 천명은 생존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용춘이 70세로 죽었다는 647년 선덕왕 말년까지도 천명은 생존해 있었다.
629년 바로 직전 승만후의 아들이 죽고, 용춘이 지방으로 나가 있다가, 629년 고구려 낭비성 전쟁에 참여하기 바로 전의 일이다. 그러니 629년 까지 천명은 출궁하여 용춘과 짝짝궁하면서 잘 지내고 있을 때이다.
화랑세기가 말한 대남보
.그 때 대남보(大男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급인지풍(急人之風))이 있어 무리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중략..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從者)들과 더불어 미복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唱)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쳐 가난해지고 세 아들 모두 베옷을 입었네 하였다. 공이 물었으나,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용춘)공을 보자 그 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당두(唐斗)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男甫)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謠)가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에 그 장자인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하여졌다. 나는 장차 위를 물려줄 것이다. 그대는 그…”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郎頭)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建福)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帝)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596~203년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從者)들과 더불어 미복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唱)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쳐 가난해지고 세 아들 모두 베옷을 입었네 하였다. 공이 물었으나,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용춘)공을 보자 그 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당두(唐斗)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男甫)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謠)가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에 그 장자인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하여졌다. 나는 장차 위를 물려줄 것이다. 그대는 그…”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郎頭)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建福)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帝)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596~203년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은 시제가 언제인지 알수가 없이 뒤죽박죽이다. 어찌 되었던, 덕만과 천명이 태어나고 20년이 지났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605~608년 정도이지 않을까?. 화랑세기 어디를 보더라도 용춘의 충복인 대남보가 미생랑의 아들이란 언급이 없다.
또한, 603년 이전에 대남보에게는 3명의 다 자란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대남보의 아들이 낭두가 될려면 문노가 만들어 놓은화랑의 체계하에서는 최소한 24살이 넘어야 한다. 14세 풍월주인 호림은 603~612년까지 장기 집권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호림이 호재로 나오며.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호재가 풍월주로 참전하는 것으로 나온다.
603년 최소 40대 중반인 대남보
578년생 용춘, 603년 26살 용춘
그러니 대남보는 578년생인 용춘보다도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은 용춘보다 나이가 어린 화랑으로 설정을 했다. 더 나아가 천명을 죽이는 최대의 악역을 맡겨 버렸다. 난 도대체 원작 선덕여왕의 작가가 화랑세기를 읽어 봤는지 조차도 궁금할 때가 있다.
선덕(덕만)보다 오래 천수를 누린 천명
어찌 되었거나 대남보가 미생의 아들이라고 치자. 그리고 천명을 죽였다고 치자. 그런데 미안하게도 화랑세기의 13세 풍월주 (596~603)까지 생존했을 뿐만 아니고, 용춘이 한때 덕만의 남편으로 생활했던 632년 까지도 천명은 생존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용춘이 70세로 죽었다는 647년 선덕왕 말년까지도 천명은 생존해 있었다.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崩)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용춘)공을 마음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을 하였다.
629년 바로 직전 승만후의 아들이 죽고, 용춘이 지방으로 나가 있다가, 629년 고구려 낭비성 전쟁에 참여하기 바로 전의 일이다. 그러니 629년 까지 천명은 출궁하여 용춘과 짝짝궁하면서 잘 지내고 있을 때이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 화랑세기 용춘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선덕이 정사를 을제에 맡기는 때는 632년 즉위초년이다. 이때 비로서 용춘은 천명을 공식적인 처로 삼고, 30살인 춘추(603년생) 를 아들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
공은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천명(天明)·호명(昊明) 양궁과 더불어 산궁(山宮)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 태종은 효성을 극진히 하여 안락하게 모셨다. 태화(太和) 원년(647) 8월 세상을 떠나(薨)니 수가 70살이었다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용춘은 647년 8월 70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말년인 647년 8월까지도 천명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천명은 아마도 춘추가 즉위하던 그 순간까도 살아 있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그런데 용춘의 아재비(삼촌)같던 대남보를 미생의 아들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천수를 누리고, 647년 죽은 덕만(선덕)보다 더 오래산 천명을 610년도 안된 시점에 대남보의 손을 빌어서 죽여버리는 심보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사라진 문노는 어디에?
8세 풍월주 국선 문노(정호빈)
태양을 삼켜라(태삼), 백실장(정호빈)
드라마 초기에는 어디선가 무슨일이 생기면 나타나던 문노가 어느 순간부터, 어디선가 무슨일이 생기면, 홀연히 사라지는 문노로 탈바꿈을 하였다. 겁장이 국선 문노(정호빈)는 어디로 숨은 것일까?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디선가 무슨일이 생기면, 나타나 활약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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