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가 필사했다는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화랑 풍월주의 계보와 풍월주들의 활약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8대 풍월주인 문노는 화랑의 체계를 세운인물이고, 전쟁에 나아가 무수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문노의 출신은 나물왕의 후손인 비조부의 아들로 대가야국의 외손이다.
8세 문노(文弩:538생)는 비조부공(比助夫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나니 69세였다. (윤공)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하지만, 문노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김흠운열전>에 잠시 모습을 보일 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화랑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다. 문노를 빼고 나면 화랑세기 자체가 성립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문노의 세계가 잘못되었다면 화랑세기가 위서로 몰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김부식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문노가 빠졌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김춘추의 사위 김흠운은 문노의 제자?
그래서 문노와 김흠운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서 화랑세기의 진위논란에 한발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졸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여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밤을 틈타서 민첩하게 달려와 새벽녘에 성루를 따라 들어오니 우리 군사가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이 혼란을 타서 급하게 공격하니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타고 창을 잡고 대적하니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어 말하였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하여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貴骨]으로서 대왕의 사위[半子]인데 만약 적군의 손에 죽으면 백제의 자랑하는 바가 될 것이고 우리들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였으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한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하고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던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흠운이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이 서로 더불어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步騎) 당주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그는 귀한 신분에 영화로운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아끼는 바인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켜 죽었으니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더라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손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드디어 적에게 덤벼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고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전투상황]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애도하였다.
여기서 김흠운과 문노와의 관계가 조금 의심스런 점이 발견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문노는 법흥왕 25년 538년생이고, 몰년은 진평왕 28년 606년으로 69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흠운열전에는 김흠운이 어릴적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하고 655년 정월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30여개 성을 빼았다. 이에 신라는 군을 모집해서 백제의 양산에서 조천성를 공격하다 오히려 백제군에 의해서 신라가 처참히 깨지고 김흠운도 죽은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만약, <화랑세기>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김흠운이 어릴적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고 한다면, 김흠운은 문노가 죽은 606년 이전에 나이가 최소 10~15세 전후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655년 죽었을 때 나이는 60세 전후의 노장이 될 수밖에 없다. 김흠운의 나이때로 보았을 때 595년생인 김유신과 동년배여야 한다. 그런데 김흠운이 움직이는 군대가 <낭당대감>이다. 낭당대감이란 화랑의 무리를 이끄는 총관의 다른 표현이거나 낭당총관의 밑이다. 김흠운의 신분이 나물왕의 8대손이고 달복공의 아들이며 태종대왕의 반자(사위?)라고 했으니 귀한 집 자손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김흠운의 죽은 시점의 나이와 신라의 계급적인 특성으로 보았을때 60대의 노장이 화랑을 이끄는 낭당대감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죽고 난 후 추증된 일벌찬이 신라의 관등으로 7등급에 해당 할 수 없다.. 또 한가지 간과하지 못한 것은 화랑이랑 신라귀족 자제들의 집단이므로 문노가 늙어 죽을 때 인 69세(606년)까지 화랑을 이끌었다고 볼 수 없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8대 풍월주인 문노가 582년 비대전군의 아들인 비보랑에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고 하였음으로 문노는 582년 이후 화랑의 계보상 상선이 되었음을 의미하고, 화랑의 지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는 김흠운의 기록은 문노가 화랑이였을 때 김흠운이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고 해석한다면 김흠운의 나이는 655년 80세 이상의 노령이 됨으로 더더욱 <삼국사기>와 <화랑세기>가 충돌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김흠운이 죽은 시점에 화랑을 이끄는 낭당대감이고 죽은 후 일벌찬이 되었다면 655년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30세 전후여야 합당하다. 또한 달복공의 또 다른 아들이고 김유신의 사위인 흠돌이 처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661년 7월 고구려 공격군으로 대장군 김유신과 대당장군 흠돌의 기록을 상기해 볼 때 흠돌과의 나이 차이가 많을 수 없어야 한다.
또한, 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에 장가가서 김유신의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652년 26대 풍월주 진공의 부제가 되고 657년 27대 풍월주에 오른 인물이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흠운은 흠돌보다는 나이가 적었다고 보아야 합당하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달복공은 김서현의 막내이고 김유신의 막내동생인 정희에 장가를 들어 흠돌을 낳았다고 하였다. 미루어 짐작컨데 김흠운도 정희의 소생일 가능성이 많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딸인 진광에 장가들고, 김흠운은 <삼국사기>에 655년 당시 대왕(김춘추2년)의 반자(사위?: 반만 자식이라 했으니 사위일 것이다)라고 했으니 김춘추는 문희에 장가를 들기전에 고타소랑을 제외하고도 또 다른 자식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서현의 3녀인 문희(문명왕후)의 소생인 지조가 김유신의 부인이 되는 시점이 655년 12월 유신의 한갑 때이니 김흠운의 처는 문희의 소생이 될 수 없음이 명확해진다. 김춘추는 542년 대야성에서 딸인 고타소랑과 사위인 품석을 잃고 655년 백제의 양산 조천성 전투에서 또 다른 사위인 김흠운을 잃었다고 하겠다. 2명의 사위를 백제에 잃었으니 김춘추의 속이 어찌 되었을 지는 미루어 짐작하겠다. 그 후 김춘추는 당에 구원병을 청하고 고구려와 백제를 적극 공략한다.
어찌 되었던 김흠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랑세기가 박창화의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들여다 보면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는 충돌되지 않고 있다고 봐야한다. <화랑세기> 27대 김흠돌 풍월주의 기록에 보면 당시 화랑의 적통이 문노에서 이어져온 가야파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8대 풍월주 문노는 화랑의 세계에서는 가야파의 종주가 되는 인물이다. 또한, 문노파는 무를 숭상하고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우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는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이부분이 흠운과 문노를 갈라놓은 지점이다. 흠운이 어려서 문노의 문하에 있었다면 <화랑세기>에 기록된 8대 문노는 538년에서 606년 사이에 활동한다면 김흠운이 655년 죽었을 때 나이가 얼마인데..60에서 80대인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세기>가 위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버린다. <화랑세기>는 문노에 의해서 씨줄과 날줄이 얼키고 설켜 있으니 <화랑세기>는 박창화의 정교한 창작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당신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
문노가 화랑으로 활동하는 시점인 538년부터 ~ 576년~582~606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노는 대가야의 외손이다. 하지만 이사부와 사다함에 의해서 외가인 대가야가 562년에 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562년 문노의 나이 25살인 점을 고려해볼 때 사다함과 같이 출전했을 수도 있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어쩌면 대가야가 힘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신라에 멸망한 이유는 가야제국들과 신라가 혼맥으로 이뤄져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대가야는 물론, 금관가야도 신라와 혼맥으로 이뤄져 있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도 변한과 진한인들이 서로 잡거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야국들이 신라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같다.
<삼국사기>에도 있지만 사다함과 그 일파들을 말하는 것이고 무를 추종하는 문노의 계파로 전쟁에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하고 죽은 수많은 화랑들을 말한다.
당시의 무리란?
655년 전 김흠운에 속한 화랑의 무리를 말한다.
좀더 들어가면 <화랑세기>에는 652년 김흠돌이 화랑의 부제였을 시점이니 형으로 추정되는 김흠돌에게서 위대한 화랑들에 대해서 들었을 수도 있고, 652년 26대 풍월주였던 김진공의 무리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다.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한 것은 <김흠운이 어렸을 때 문노를 따르고> 하였다는 것은 문노가 추구하는 무를 숭상하고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우거나 죽는 것을 계승하여 따랐다는 의미 밖에는 없다.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원광법사에 사사받은 취산과 추항이 화랑으로 참전하여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김흠운 싸움에 임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화랑의 세속오계 중 하나인 <임전무퇴>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留名至今" (유명지금) :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다.
흠운이 배울 시점까지 이름을 남겼다는 것은 문노와 흠운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의미이지 문노에게 직접 사사를 받았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해석상의 문제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많은 사람들이 위의 내용을 “흠운이 어릴적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었는데, 당시 따르는 화랑들이 말하길 전쟁에 나아가 전사하였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다.
하지만, 遊花郞, 文努之門 유화랑(遊花郞)과 문노지문(文努之門) 사이를 끊어 읽어야 한다.
歆運少遊花郞, 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흠운은 어릴적 화랑에 있었다. 문노의 화랑 때 전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따르는 무리들이 이야기를 전했다.
PS. 문노는 내물왕의 후손인 비조부의 아들로 나온다. 사다함도 내물왕의 6대손인 구리지의 아들이니 7대손이다. 김흠운도 내물왕7대손인 잡찬 달복의 아들인 8대손으로 나온다.
한마디로 내물왕을 빼고는 신라를 말할 수 없고, 세종대왕 만큼이나 자손을 많이도 낳았다.
여전히 진위를 알 수 없는 화랑세기
글쓴이는 문노와 김춘추의 아들이 김흠운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화랑세기의 진위를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화랑세기와 삼국사기가 충돌될것 같았던 기록들이 여전히 잘 끼워 맞춘것 처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던 신문왕비가 되는 신목왕후가 김흠운의 2녀가 된다는 기록과 <화랑세기>문노와 <삼국사기>와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문노와 김흠운의 관계로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조한 위서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김부식이 고의이던 자료의 부족을 느꼈는지 관계없이 문노가 <삼국사기>에 이름만 남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자의태후는 681년 8월 <김흠돌의 난>이 있고 나서 군사 지향적인 화랑을 폐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 후 화랑의 형태는 산천 유람하고 선도와 문에 힘쓰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고 역사적 자료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미실과 덕만의 하늘살핌 대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을 죽이기 위해서 터미네이터처럼 따라다니다. 덕만에 의해서 죽은 줄 알았던 칠복이 사신단과 함께 온 상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신단은 수나라일까? 당나라 사신단일까? 역사를 종횡무진 필요할때 마다 이동하는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보았을때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칠복으로 인해 덕만의 정체가 미실에 보고되니 흥미가 배가 되지 않을까한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아막성 전투에서 살아난 이유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서 구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문노를 따르는 무리이거나 덕만이 비를 내리게 해준 가야의 유민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칠복이 돌아 왔으니 문노도 나타날때가 되었다.
사다함이 미실에게 전해준 ‘매화’가 ‘책력’이라면, 작가는 당시 신라시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늘에 제를 올리고, 하늘을 살피는 것은 왕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다. 이를 서포터즈 하는 역할이 천관의 역할이다. 미실이 하는 일이 하늘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역할이니 책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를 갖추게 해준 이가 사다함이라고 한 것이다. 미실이 신라의 국정에 깊이 개입하는 계기가 진흥이 기후제를 지냈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 미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비가 오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덕만이 만노군에서 가야의 유민들에게 잡혀 하늘에 기우제를 지낼 때 잠깐 비춰진 것이 책력이였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지 않는가?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하늘을 살피는 책력을 만들려고 했다. 이때 보조자료로 사용된 것이 회회력과 칠정산이였다. 책력은 황제(제왕)도였다. 덕만이 가져온 책력이 미실이 받은 책력보다는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인가? 아무튼 미실과 덕만의 ‘하늘살핌’ 대결을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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