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고려 인종(23년) 1145년에 김부식의 주관으로 국가가 편찬한 역사서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후 일연선사가 150여년이 지난 충렬왕(7~9년) 1281~1283년 경에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은 기록이나 삼국사기와 다른면을 기록한 개인 역사서인데,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솔솔한 재미가 있습니다.
<서동요> 또한 삼국사기에는 없는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여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동(막동)의 출자를 법왕으로 보는 견해는 삼국사를 인용하고 있지만, 일연선사는 무왕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다른 역사서에는 무강왕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무강왕이 없으니 알수 없다고 토를 달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나 북사에는 무왕을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중국역사에서 많은 사건 기록들이 중복되어 있는데, 많은 부분이 틀린 부분이 있는데 왕의 계통도에서만 유독 차이점을 두고 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많은 부분을 중국의 역사서를 인용하거나 차용하였지만. 왕의 계통도는 옛기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로 26대 성왕(32년 554년)이 신라를 공격하다 죽고난 후 그의 뒤를 이어 27대 왕에 오릅니다. 위덕이 왕자시절에 직접 전쟁을 수행한것을 알 수 있듯히.. 그의 나이는 적지 않는 나이가 될것 입니다. 무령(462년생. 501~523)->성왕(523~554)->위덕왕(554~598) 이됩니다.
성왕에서 무왕까지 계통도를 보면
<<삼국사기 기준>>
성왕(명농)->장자 위덕왕(창)->성왕의 차자 혜왕(계) ->혜왕의 장자 법왕(선) -> 법왕의 자 무왕(장)
<<수서/북사 기준>>
성왕(명농)->장자 위덕왕(창)->성왕의 차자 혜왕(계) ->위덕왕 아들 법왕(선) -> 위덕왕의 자 무왕(장)
많은 사람들이 수서를 인용하고 있지만, 법왕을 혜왕의 아들로 인용하고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로 인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쪽을 따르려면 계속 같은 계통을 밟아야 하는데 어떨때는 삼국사기를 어떨때는 수서를 인용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수서와 일본서기를 따를 경우 위덕왕은 아좌태자를 비롯해서 최소한 2명의 아들이 더 나옵니다. 법왕(선)과 무왕(장)을 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좌태자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597년 왜에 인질로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덕왕 사후 위덕왕의 형제인 혜왕이 왕위계승권이 있는 아좌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고 얼마지나지 않아 위덕왕의 차자인 법왕이 계승하고 법왕이 죽은 후 또 다른 형제인 무왕(장)이 승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 까 합니다.
위덕왕의 형제인 혜왕(계)가 아좌가 없는 틈을 타서 위덕왕을 죽이거나 사후 법왕(선)이 병약하거나 전장에 나가있는 틈을 타서 왕권을 찬탈했을 수도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이병훈 피디는 이전 <서동요>에서 혜왕이 아좌를 대신에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습니다.최소한 아좌와 법왕은 나이가 적지 않았고, 단지 무왕인 막동(서동) 창만이 나이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왕(서동)이 왕위를 계승할때 법왕은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너무어려 왕위를 계승할 수 없으므로 무왕이 계승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만약, 삼국사기를 따를 경우 법왕(선)은 왕족으로 있다가 금마지에서 무왕(장)의 어미와 관계를 맺고, 증표를 남겼을 수도 있습니다. 서동(장) 태어난 해는 580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고 이시기는 큰아버지인 위덕왕이 왕으로 때이니, 위덕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아좌태자라는 장년의 왕자가 있었으므로 법왕(선)은 전국을 유람하면서 한량 짓을 했을 수도 있고, 왕이 된후 행동으로 보나 법왕이란 명칭을 보면 당시에 왕위에 관심이 없고 불교에 심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수서를 따르던 삼국사기를 따르던 알 수 있는 것은 위덕왕 사후 혜왕(계)이 왕권을 승계하는데 물의가 있었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제와 신라의 결혼을 말하면, 서동과 선화의 결혼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의 기록을 살펴 보면, 백제와 신라 사이에 4번의 결혼관계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법흥왕과 보과공주, 두번째 동성왕과 이찬 비지의 딸, 3번째는 성왕녀와 진흥왕, 4번째가 무왕(서동)과 선화공주 이다. 공교롭게도 남.여가 번갈아 교차하고 있다. 백제기준으로 보과 공주가 시집가면 두번째는 비지녀가 시집을 오고, 다시 성왕녀가 시집가고, 진평녀 선화가 시집오고 한다.
첫번째 법흥(원종과 보과공주)
첫 결혼의 첫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법흥(원종)과 동성왕녀 보과공주, 일단 보과공주라고만 하자.
[역사이야기] - 화랑세기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에서 동성왕의 공주인 보과로 설정하여 포스팅을 하였다. 하지만 다시 화랑세기와 삼국사기 등을 살펴보니 동성왕이 아닐 가능성이 많았다.
법흥(원종)이 국공으로 백제에 들어간 시기는 언제일까? 아버지인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일것이다. 왕자 신분이였다면 왕자를 표기했을 것이나 화랑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처(소지왕:479~500) 시기 나 그 이전 자비왕시기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국공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약 간 맛보기로 보여주고 추후 기사로 송고할 예정이다.
2번째 결혼 동성왕과 이찬 비지녀
3번째 진흥왕과 성왕 녀
신라 진흥왕 14년(553)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 곳에서 나타났으므로 왕이 이상하게 여겨 [계획을] 바꿔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 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 삼국사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무왕(장)이 백제를 피해서 신라의 경주에 나타날 수 있는 계연성은 무왕의 할아버지인 성왕(31년 : 553년) 말년에 공주를 신라에 시집을 보내고 있는데, 무왕(장)에게는 고모가 되는 고로 왕위계승에 따른 난리를 피해서 갔을 수도 있겠다라고 봅니다. 아니면 무왕(장)이 그전에 경주에 있었을 계연성도 있습니다.
왕의 딸과 일반인이 접촉한다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선화공주와 마동이 접촉할 수 있는 계급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둘간에는 접촉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마동(서동)이 법왕(선)의 자식이던 위덕왕의 자식이던 상관없이. 마동은 경주에 간 이유가 단지, 마를 팔거나, 세상유람을 위해서나, 신라와 전쟁중이니 신라의 동정을 염탐하려 만은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연고가 있는 곳에 갔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마동이 경주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위덕왕의 숨겨둔 막내자식이든 법왕의 숨겨둔 자식이든, 상관없이 성왕의 딸(고모,고모할머니가)이 시집가 있는 곳이기에 갔다는 것은 분명할것 같습니다. 그래야 백제 왕가의 아들(or 조카) 서동(무왕)과 신라 왕가의 딸 선화의 만남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자료도 없는 빈약한 상황에서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의 사랑은 다루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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