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신라의 결혼동맹(?)은 4번에 걸처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사항은 이전에 포스팅한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와 신라 결혼, 서동과 선화공주 그리고
를 참조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법흥(원종)과 보과공주의 사랑인데, 보과공주는 과연 백제의 어느왕의 자식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전글에서 다음과 같이 동성왕의 왕녀로 알려진(?)으로 기술했었습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동성왕녀은 아닐것이라는 암시를 했었습니다.
일단, 법흥왕이 국공이였을때를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국공이라 함은 왕자시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법흥(원종)의 아버지 지증(지대로)왕이 왕이 되기전 시기로 가야 합니다. 지증왕 이전은 자비왕와 소지(비처)왕 시기를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원종)이 백제에 국공으로 들어간 시기는 비처왕(479~500년) 이니 아무리 늦게 잡아도 500년 이전시기가 됩니다.
문제는 500년 지증(지대로)가 왕이 되었을때 적지않은 나이인 64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법흥(원종)에 보과가 한눈에 반할 정도가 될려면 원종이 어린나이가 되는 것은 상식에 속할 겁니다. 또한, 보과 또한 어린나이 15세전후가 될겁니다.
지대로의 장자인 원종은 지증이 갈문왕시기이 어릴쩍인 15~20세 전후에 낳은 아들이 되야 함으로 지증(437년생)+(15~20)전후 생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은 442~446년생이 됩니다. 장성한 법흥(원종)이 20대의 나이일때는 461~466년 사이가 됩니다. 늦어도 470년전후 시기에 해당합니다.
470년 전후 백제의 왕은 누구일까요?
백제의 왕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한성을 내주고 죽은 개로왕(455~475년) 시기에 해당합니다.
위의 계보도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나 곤지의 계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유사는 개로왕의 아우로 나오며, 일본서기도 개로왕의 아우로 나온다. 또한, 무령왕의 출자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는 동성왕(모대)의 2자로 나오지만, 일본서기나 삼국유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개로왕의 아들이 됨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보과공주는 개로왕의 왕녀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과공주는 개로왕이 죽은 후 웅진(공주)로 천도한 문주왕과는 남매간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가 위기에 처했을때 문주는 신라로 파견되어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법흥(원종)에 시집간 보과공주일것으로 추측됩니다.
문제는 화랑세기에 의하면 보과/법흥 사이에 태어난 3세 풍월주 모랑이 548년 진흥왕 9년에 풍월주에 오르고 555년 비사벌에 여행을 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다. 모랑의 손위 누이가 되는 남모는 진흥왕 원년 540년이전 원화의 지위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법흥(원종)이 국공일때는 늦어도 500년 전후에 태어났어야 한다. 540년에 남모의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이른다. 법흥/보도 사이의 태어나 진흥왕의 어미가 되는 지소태후와는 이복자매가 됨을 알 수 있다. 지소태후가 삼산공의 딸인 준정보다 자매인 남모를 원화로 밀어 세운 이유는 피의 끌림이지 않을가 한다. 또한가지 남모(법흥/보가)가 지소(법흥/보도)태후보다는 손위 언니뻘일 가능성이 높다.
화랑이전 원화제도가 있을때에는 나이어린 소녀가 아닌 농익은 성인 여성을 원화로 세웠을 개연성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작한 위서가 된다.
글쓴이는 백제의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때 신라가 백제를 구원한 극적인 이유를 법흥왕과 보과의 사랑에서 찾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보과공주가 사랑을 찾아 신라로 넘어온 시기는 500년 전후시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흥/보과의 사랑을 첫번째로 설정하고 2번째 동성왕/이찬비지녀로 하였지만, 동성/이찬비지녀가 첫번째가 되고 법흥/보과가 백제/신라의 2번째 결혼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동성왕은 이찬비지의 딸을 후비로 맞기도 하지만, 자신의 딸이 법흥(원종)과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을 지켜 봐야 했을 것이다.
또한가지는 법흥(원종)과 입종은 지증왕(지대로)가 40대가 다되어서 얻은 아들이라고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면, 보과는 적지 않은 나이의 법흥(원종)을 사랑한 것이다.
어찌되었던 고구려에 위기를 느낀 백제와 신라는 결혼을 매개로 신라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동성왕과 신라 이찬비지의 딸이되고, 동성왕의 딸 보과와 법흥이며, 성왕의 딸이 진흥왕의 소비가 되며, 서동(무왕)과 진평왕의 딸에 이르게 된다.
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진흥왕(입종/지소)을 천수를 누린 노인으로 설정하였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와 신라 결혼, 서동과 선화공주 그리고
를 참조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법흥(원종)과 보과공주의 사랑인데, 보과공주는 과연 백제의 어느왕의 자식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전글에서 다음과 같이 동성왕의 왕녀로 알려진(?)으로 기술했었습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동성왕녀은 아닐것이라는 암시를 했었습니다.
첫번째 법흥(원종과 보과공주)
첫 결혼의 첫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법흥(원종)과 동성왕녀 보과공주, 일단 보과공주라고만 하자.
첫 결혼의 첫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법흥(원종)과 동성왕녀 보과공주, 일단 보과공주라고만 하자.
(3세)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宝果公主)와 더불어 사통을 하였다. 후에 보과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화랑세기 3대 풍월주 모랑
참고 : [역사이야기] - 화랑세기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에서 동성왕의 공주인 보과로 설정하여 포스팅을 하였다. 하지만 다시 화랑세기와 삼국사기 등을 살펴보니 동성왕이 아닐 가능성이 많았다.
법흥(원종)이 국공으로 백제에 들어간 시기는 언제일까? 아버지인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일것이다. 왕자 신분이였다면 왕자를 표기했을 것이나 화랑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처(소지왕:479~500) 시기 나 그 이전 자비왕시기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국공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약 간 맛보기로 보여주고 추후 기사로 송고할 예정이다.
일단, 법흥왕이 국공이였을때를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국공이라 함은 왕자시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법흥(원종)의 아버지 지증(지대로)왕이 왕이 되기전 시기로 가야 합니다. 지증왕 이전은 자비왕와 소지(비처)왕 시기를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원종)이 백제에 국공으로 들어간 시기는 비처왕(479~500년) 이니 아무리 늦게 잡아도 500년 이전시기가 됩니다.
500년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전왕(前王)이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당시 나이는 64세였다. -삼국사기 지증왕
문제는 500년 지증(지대로)가 왕이 되었을때 적지않은 나이인 64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법흥(원종)에 보과가 한눈에 반할 정도가 될려면 원종이 어린나이가 되는 것은 상식에 속할 겁니다. 또한, 보과 또한 어린나이 15세전후가 될겁니다.
지대로의 장자인 원종은 지증이 갈문왕시기이 어릴쩍인 15~20세 전후에 낳은 아들이 되야 함으로 지증(437년생)+(15~20)전후 생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은 442~446년생이 됩니다. 장성한 법흥(원종)이 20대의 나이일때는 461~466년 사이가 됩니다. 늦어도 470년전후 시기에 해당합니다.
470년 전후 백제의 왕은 누구일까요?
455년 개로왕(蓋鹵王)<혹은 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 삼국사기
백제의 왕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한성을 내주고 죽은 개로왕(455~475년) 시기에 해당합니다.
475년 7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連)[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 왕 경(慶)[개로왕]이 아들 문주(文周)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구원하였으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慶)[개로왕] 역시 살해당하였다. -삼국사기 자비왕
위의 계보도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나 곤지의 계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유사는 개로왕의 아우로 나오며, 일본서기도 개로왕의 아우로 나온다. 또한, 무령왕의 출자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는 동성왕(모대)의 2자로 나오지만, 일본서기나 삼국유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개로왕의 아들이 됨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보과공주는 개로왕의 왕녀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과공주는 개로왕이 죽은 후 웅진(공주)로 천도한 문주왕과는 남매간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가 위기에 처했을때 문주는 신라로 파견되어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법흥(원종)에 시집간 보과공주일것으로 추측됩니다.
문제는 화랑세기에 의하면 보과/법흥 사이에 태어난 3세 풍월주 모랑이 548년 진흥왕 9년에 풍월주에 오르고 555년 비사벌에 여행을 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다. 모랑의 손위 누이가 되는 남모는 진흥왕 원년 540년이전 원화의 지위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법흥(원종)이 국공일때는 늦어도 500년 전후에 태어났어야 한다. 540년에 남모의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이른다. 법흥/보도 사이의 태어나 진흥왕의 어미가 되는 지소태후와는 이복자매가 됨을 알 수 있다. 지소태후가 삼산공의 딸인 준정보다 자매인 남모를 원화로 밀어 세운 이유는 피의 끌림이지 않을가 한다. 또한가지 남모(법흥/보가)가 지소(법흥/보도)태후보다는 손위 언니뻘일 가능성이 높다.
화랑이전 원화제도가 있을때에는 나이어린 소녀가 아닌 농익은 성인 여성을 원화로 세웠을 개연성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작한 위서가 된다.
글쓴이는 백제의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때 신라가 백제를 구원한 극적인 이유를 법흥왕과 보과의 사랑에서 찾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보과공주가 사랑을 찾아 신라로 넘어온 시기는 500년 전후시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번째 결혼 동성왕과 이찬 비지녀
백제 동성왕 15년(493)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왕은 이찬(伊)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 삼국사기
법흥/보과의 사랑을 첫번째로 설정하고 2번째 동성왕/이찬비지녀로 하였지만, 동성/이찬비지녀가 첫번째가 되고 법흥/보과가 백제/신라의 2번째 결혼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동성왕은 이찬비지의 딸을 후비로 맞기도 하지만, 자신의 딸이 법흥(원종)과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을 지켜 봐야 했을 것이다.
또한가지는 법흥(원종)과 입종은 지증왕(지대로)가 40대가 다되어서 얻은 아들이라고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면, 보과는 적지 않은 나이의 법흥(원종)을 사랑한 것이다.
어찌되었던 고구려에 위기를 느낀 백제와 신라는 결혼을 매개로 신라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동성왕과 신라 이찬비지의 딸이되고, 동성왕의 딸 보과와 법흥이며, 성왕의 딸이 진흥왕의 소비가 되며, 서동(무왕)과 진평왕의 딸에 이르게 된다.
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진흥왕(입종/지소)을 천수를 누린 노인으로 설정하였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540년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다.<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 그때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하였다. - 삼국사기 진흥원년
진흥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7세에 큰아버지 법흥왕을 대신에 왕위를 잇는다. 진흥왕의 제위기간은 540~576년이니 37년간 왕위에 있었다. 진흥왕은 534년생이고, 551년 진흥왕 12년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고, 지소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576년에 죽을때 나이는 43세가 된다. 한참 팔팔한 나이때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텍스트인 화랑세기에 의하면 지소태후와 태종(이사부)의 아들이며 미실의 남편인 세종은 진흥의 막내동생 뻘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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