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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

선덕여왕, 위천제 미실 일식은 정말 있었나?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이 사다함의 매화(가야의 역법)과 수나라 사신단을 따라온 장대인으로 부터 많은 황금을 주고 산 대명력으로 일식을 예측하고 일식을 맞춥니다. 위천제를 하면서 미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게시를 받았다는 미실이 위천제를 하자 일식 있습니다. 일식이 되는 때를 기다려 위천제를 올리는 상황입니다. 당시 신라에 일식을 예측할 만한 천문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식을 맞춘때는 조선의 세종때이니 말입니다. 어찌되었던 일식이 나타나자 신라인들은 사색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미실은 날씨도 잘 맞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서로는 기후(날씨)를 맞출수는 없습니다. 천문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뿐이지요. 기후학도 천문에서 갈라진 한 지파에 불과하니 기후를 예측할만 내용은 있었을.. 더보기
선덕여왕, 위천제 미실 일식은 정말 있었나?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이 사다함의 매화(가야의 역법)과 수나라 사신단을 따라온 장대인으로 부터 많은 황금을 주고 산 대명력으로 일식을 예측하고 일식을 맞춥니다. 위천제를 하면서 미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게시를 받았다는 미실이 위천제를 하자 일식 있습니다. 일식이 되는 때를 기다려 위천제를 올리는 상황입니다. 당시 신라에 일식을 예측할 만한 천문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식을 맞춘때는 조선의 세종때이니 말입니다. 어찌되었던 일식이 나타나자 신라인들은 사색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미실은 날씨도 잘 맞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서로는 기후(날씨)를 맞출수는 없습니다. 천문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뿐이지요. 기후학도 천문에서 갈라진 한 지파에 불과하니 기후를 예측할만 내용은 있었을.. 더보기
선덕여왕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와 신라 결혼, 서동과 선화공주 그리고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23년) 1145년에 김부식의 주관으로 국가가 편찬한 역사서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후 일연선사가 150여년이 지난 충렬왕(7~9년) 1281~1283년 경에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은 기록이나 삼국사기와 다른면을 기록한 개인 역사서인데,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솔솔한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없는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여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동(막동)의 출자를 법왕으로 보는 견해는 삼국사를 인용하고 있지만, 일연선사는 무왕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다른 역사서에는 무강왕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무강왕이 없으니 알수 없다고 토를 달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나 북사에는 무왕을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중국역사.. 더보기
선덕여왕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와 신라 결혼, 서동과 선화공주 그리고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23년) 1145년에 김부식의 주관으로 국가가 편찬한 역사서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후 일연선사가 150여년이 지난 충렬왕(7~9년) 1281~1283년 경에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은 기록이나 삼국사기와 다른면을 기록한 개인 역사서인데,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솔솔한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없는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여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동(막동)의 출자를 법왕으로 보는 견해는 삼국사를 인용하고 있지만, 일연선사는 무왕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다른 역사서에는 무강왕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무강왕이 없으니 알수 없다고 토를 달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나 북사에는 무왕을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중국역사.. 더보기
신라 성골은 없다고 신라인 설계두가 말하다.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다. 글쓴이는 [[역사이야기] - 사극으로 배우는 역사, 성골은 없다.] 에서 성골은 없고, 진골이 곧 성골이며, 왕족이라고 주장했다. 위글에 이어서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일명 , 있었다고 생각 하는 진평왕때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설계두(薛頭)도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 더보기
신라 성골은 없다고 신라인 설계두가 말하다.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다. 글쓴이는 [[역사이야기] - 사극으로 배우는 역사, 성골은 없다.] 에서 성골은 없고, 진골이 곧 성골이며, 왕족이라고 주장했다. 위글에 이어서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일명 , 있었다고 생각 하는 진평왕때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설계두(薛頭)도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 더보기
선덕여왕, 신라에서 백제 특산물 황칠을 찾는 수나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수나라 사신단이 진평왕에게 요구한 것은 '황칠'이였다. 황칠이 무엇이길래 수나라 사신단이 꼭 집어서 '황칠'을 요구했을까? 그렇다면 황칠이 고대 상고시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황칠과 명광개 백제의 법은 반역한 자는 목을 베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사람을 죽인 자는 세명의 노비를 보내어 속죄케 한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세 배로 갚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어 둔다.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 세곳의 섬에서 이 나는데, 6월에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진을 모으면 색이 금빛이 난다. 무덕 4년(621년)에 왕 부여장(무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를 바쳤다. 이로부터 조공을 자주 바쳐 오니, 고조는 그를 책봉하여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 더보기
선덕여왕, 신라에서 백제 특산물 황칠을 찾는 수나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수나라 사신단이 진평왕에게 요구한 것은 '황칠'이였다. 황칠이 무엇이길래 수나라 사신단이 꼭 집어서 '황칠'을 요구했을까? 그렇다면 황칠이 고대 상고시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황칠과 명광개 백제의 법은 반역한 자는 목을 베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사람을 죽인 자는 세명의 노비를 보내어 속죄케 한다.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세 배로 갚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어 둔다. 풍속은 고구려와 같다. 세곳의 섬에서 이 나는데, 6월에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진을 모으면 색이 금빛이 난다. 무덕 4년(621년)에 왕 부여장(무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과하마를 바쳤다. 이로부터 조공을 자주 바쳐 오니, 고조는 그를 책봉하여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 더보기
화랑세기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의 사랑 뒤바뀐 역할모델 선화공주->법흥, 서동->보과공주 백제 30대 법왕의 아들(?) 서동과 신라 27대 진평왕의 3째 딸인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599년부터 600년 사이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미담이 될것입니다.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의 왕자 공주의 혼인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과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와의 사랑이야기 어찌보면 왕자와 공주가 서로 바뀌지만 유사점이 많습니다. 동성왕(493년) 때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를 맞이 하는 결혼동맹을 하여 신라와 유대를 강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나 비슷한 시기에 신라 지증왕(437~514)의 아들인 원종 법흥왕(23대 : 514~540)이 왕자 시절 백제의 수도인 .. 더보기
화랑세기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도 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의 사랑 뒤바뀐 역할모델 선화공주->법흥, 서동->보과공주 백제 30대 법왕의 아들(?) 서동과 신라 27대 진평왕의 3째 딸인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599년부터 600년 사이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미담이 될것입니다.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의 왕자 공주의 혼인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과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와의 사랑이야기 어찌보면 왕자와 공주가 서로 바뀌지만 유사점이 많습니다. 동성왕(493년) 때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를 맞이 하는 결혼동맹을 하여 신라와 유대를 강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나 비슷한 시기에 신라 지증왕(437~514)의 아들인 원종 법흥왕(23대 : 514~540)이 왕자 시절 백제의 수도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