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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사라진 문노와 미실이 버린 자식 비담?

(c) mbc 사극 문노(정호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그동안 사라진 문노(정호빈)와 숨겨둔 카드 비담이 카리스마 넘치게 공개되었다. 문노는 병이 걸린 마을을 구하는 선인으로 등장한다. 비담(김남길 역)은 문노가 키우는 제자로 나온다. 

(c) mbc 식탐비담(김남길)

<선덕여왕>에서 비담의 성격을 게으른 듯 하면서 내면을 숨기는 심계가 있지만, 식탐에 집착하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또한, 덕만을 두고, 비담과 유신의 통속적인 사랑의 삼각관계를 암시하였다.

자신의 무공을 속이면서까지 서현의 부하들에 매를 맞지만,  바구니 속의 닭고기가 망가지자,  숨겨진 무공을 들어내며 복수할 것을 다짐하고, 뒤를 쫓아 간다. 그리고 우연히 위기에 처한 덕만을 구하게 된다.

덕만을 구하고자 한 목적이 아니라.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덕만이 구해지는 것이다. 기존의 영웅담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c) mbc 사극 선덕여왕, 칼있으마 비담(김남길)

그렇다면,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비담은 언제 태어난 것일까? 드라마 선덕여왕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미실은 진지왕의 아들인 비담을 낳았다.

진지가 약속과 다르게 미실을 왕후로 받아 들이지 않자. 자신의 이모인 진흥비인 사도(옥진/영실)과 함께 진지를 폐위하고, 아들인 비담을 버리는 것으로 설정했다. 진지(금륜)의 비이며, 용춘의 어머니가 되는 지도는 미실의 이종사촌이다. 그러니 용수.용춘과 비담은 아버지는 같고, 어미가 다른 이복형제간이다.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사실이 또한번 증명된다.

그러니 비담은 진지왕 폐위시인 579년 직전에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버려진 비담을 사라진 문노가 키우게 되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설원랑 사이에 태어난 보종을 미실의 막내아들이라 했다. 보종의 탄생비화는 처음 미실이 진평과 관계를 가지려 했으나 진평왕이 너무 어려 미실을 따를 수 없었다. 이에 설원랑과 관계하여 보종을 낳았다.

16세 풍월주 보종(백도빈)

미실은 보종을 자신의 막내아들로 끔찍히 여겼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보종을 끔찍히 아끼는 듯한 모습을 여래사 사건으로  부상을 당한 보종에, 미실은 애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보종은 진평왕 즉위 초년인 580년 이후에 태어 난 것이 된다. 

미실이 보종을 끔찍히 사랑했듯이 보종 또한 어릴때 부터 어머니인 미실을 따르며, 어머니가 죽으면 자신도 따라 죽을 듯이 대했다. 미실이 죽고, 수 많은 저작물을 남기자, 이를 보종이 보관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의 수많은 내용의 근거가 미실이 저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비담은 보종의 형이 되는 것이다. 사실 비담에 대한 기록은 망실되어 알 수 없다.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이찬 칠숙이 631년 반란을 일으키지만, 9족이 멸하고 칠숙의 가계가 쑥대밭이 된다. 비담도 똑 같은 이유로 기록이 망실된 것이다.

이전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사실은 유신과 보종 너무나 친한 사이 글에서 선덕여왕에서 와는 다르게 보종은 진성공자로 착하고, 유하고, 선함의 대명사 였고, 유신이 아플때에는 그의 치료를 해주는 주치의 역할까지 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비담은 미실과 금륜(진지)의 아들일까?

진지왕(임호)

그렇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왜? 비담을 미실의 아들로 설정을 하였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비형랑은 전지왕이 죽은 후 귀신이 되어 도화녀와 관계를 맺어서 비형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진지왕(금륜)이 미실과 사도(진흥비)에 의해서 폐위된 후 별궁에 기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별궁에 있는 궁녀 사이에 비형랑을 낳았다. 비형랑은 진평왕이 아들처럼 길렀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담과 비형랑은 '비'자 돌림으로 같으니 비담도 진지왕의 소생이 아닐까? 또한, 미실이 진지왕와 관계를 가졌다면 소생을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담을 미실과 진지왕의 소생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비담이 미실의 아들일지라도 화랑세기나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


비담이 643년 선덕(덕만)왕 12년 상대등이 되고, 647년 선덕왕 16년 정월에 염종과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칠숙은 이찬의 지위에 있었지만, 칠숙과 관련된 기록이 사라진 것 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에 잘못을 하고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가족과 일족의 테두리에서 버려지는 방법은 족보에서 파버리는 것이 최고의 징계였을 수 있다. 쿠데타에 실패한 일족을 족보에 남겨두는 것은 불명예일 뿐만 아니고, 치욕에 가깝다. 해당 가문의 생존과도 직결이 된다.  그러니, 칠숙, 석품, 비담, 염종이 역사에서나 족보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설령 후손이 살아있다고 해도, 역신의 후손이라고 내 놓는 멍청한 후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당대에 썼다'는 화랑세기에도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어찌되었던 '비담이 상대등까지 올랐다'는 말은 신라사회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비담은 최고위 왕족 중에 하나 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이는 대략 50대 후반에서 60대이지 아닐까? 그렇다면 570~590년대 태어났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유신도 역사기록에서 사라지는 위험한 상황에 봉착한 때가 있었다. 이는 기회가 되면 기사로 송고할 예정이다.


결론은 비담이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 난  아들일 수 도 있겠다. 비담이 진지(금륜)/미실 사이에 난 아들이라고 해도 반박할만 한 역사적 자료는 없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동안 잘못된 인물 설정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비담은 미실의 버려진 아들이란 설정은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문제는 비담으로 인해서 미실가문은 멸문에 가까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징후는 없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미실가문과 진지(금륜)의 가문은 그후에도 꾸준히 세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왕도 배출한다. 물론, 비담의 반대파에서 비담을 진압하면, 왕도 배출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비형랑(鼻荊郎)은 코.종.시비(鼻)을 쓰고, 비담(毗曇)은 밝을.도울비(毗)을 쓴다. 그러니 비형랑과 비담 이들에게 같은 음만 가졌지 훈(뜻)이 전혀 다른 글짜를 쓰고 있다. 그러니 이들사이에 돌림자는 없다.  원작자의 중대한 실수가 되는 것이다. 단지, 코비에는 노비.시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 도울비가 노비.시종을 같이 사용했다면 할만은 없다.

어찌되었던  미실이 왜 비담를 버렸을까? 덕만과 대응되는 인물이 필요했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드라마를 보면 그의 과거에 대한 파편들이 들어 나겠지만. 문노가 어찌하여 비담을 자신의 내제자로 받아 들였을까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남자와 그의 아들


선덕여왕에서 비담은 11세 풍월주 하종(세종/미실)의 동생이며, 비형랑(진지/도화녀)의 형이 되고, 16세 풍월주 보종(미실/설원랑)의 형이 된다. 그런데 배역을 보면 비담이 천명,덕만, 보종보다 어리게 보인다.

하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가장 어린 595년생인 유신(엄태웅)이 천명(박예진), 덕만(이요원) (588~590년생), 비담(578년생?), 보종(579년생) 보다도 늙어 보이긴 한다.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 원작이 더 좋았더라면..

사실 선덕여왕에서는 아직까진 유신이 등장하면 안된다. 현재 600~605년 사이를 진행되는 시대배경 상황으로는 유신이 낄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선덕여왕 원작자는 유신을 등장인물로 설정하였을까?

북두의 상징인 유신도 넣고 싶고, 화랑세기를 통털어 주인공 같은 미실을 빼면 안될것 같으니 미실도 넣고, 덕만도 넣고 싶은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 이다. 그러니 유신역을 맡은 엄태웅이 연기를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데 유별나게 극에 녹아 들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유신의 아버지 세대와 삼촌들 세대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만명과 사랑의 도피를 한 유신의 아비 김서현이, 유신이 맡은 배역을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화랑세기를 처음 보는 사람은 "뭐 이런 개족보가 다있나"한다. 그래서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든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의 전쟁과 혼맥은 화랑세기에 비하면 놀랄일도 아니다. 드라마 선덕여왕도 "머 이런 황당한 사극이 있나?"한다. 그런데 재미가 있다.

만약, 사극 선덕여왕 제작진이 탄탄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면, 선덕여왕은 지금보다도 정말 재밌게 만들어 졌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사극 선덕여왕의 잘못된 설정이 퍼도 퍼도 끊임없이 솟아는 샘과 같이 재밌는 연구소재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한마디로 노천 노다지(금) 광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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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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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낭만인생 2009.09.08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 덕에 가야시대와 신라 시대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죠.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거의 서양사 위주라서 항상 국사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는데 잘 됬다 싶습니다. 부산에 사니 신라와 가야에 대한 관심이 적잔이 많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을 보면 볼수록 황당하고 너무 극화되었다는 느낌 밖에 안듭니다. 초반부의 긴장감과 심리싸움도 이제 어느정도 정리가 되는 듯 하는데..
    실제 역사와 너무 다른 선덕여왕.. 슬.. 관심에서 멀어 지려합니다.
    좋은 정보 잘 읽고 갑니다.

  3. 바우바우 2009.09.16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너무 잼나요. 몰랐던 부분을 잼나게 풀어주셔서 ^^ 감솨~합니다.

  4. 호호 2009.11.09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신이 따지자면 어리게는 5살이겠군요............
    뭐...뭐지?

  5. 갓쉰동님 글을 읽게 해 준 선덕여왕에 감사ㅎㅎ 2009.11.13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여간 열심히 읽었습니다.
    드라마는 보고 난 즉시 잊어버리지만,
    님의 글은 두고 두고 보고 있습니다.
    역시!!!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6. BlogIcon 2012.01.02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전체에 서있다면 당신은 파고있어, 당신은 파고를 중지해야합니다

  7. BlogIcon 김성환 2012.01.07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짚신도 짝이 있다

  8. BlogIcon 엘리자베스 2012.04.03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심 없습니다.

  9. BlogIcon 피리 부는 사람 2012.04.06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가 안갑니다.

  10. BlogIcon Arianna 2012.05.09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을 살 여유가 없습니다.

  11. BlogIcon 루시 2012.05.11 1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지내십니까?

  12.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3.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4. BlogIcon Wet Pussy 2012.07.21 2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무사히 풀려났다는 소식에 위대하시고 영민하신 교지를 하사하셨습니다.

  15. BlogIcon Chris 2012.07.30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선덕여왕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미실은 진지왕의 아들인 비담을 낳았다.

  16. BlogIcon invisible dog fence installation 2012.11.03 2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티즌 악플러들은 뻘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만약, 일본이 진다면 일본 악플러들의 만행이 만만치 않을것 같다. 반면에 일본이 파라과이를 이긴다면 한국내의 악플러들이 허정무 감독과 대한민국 대표팀을 공격할 것 또한 자명해 보인다.

  17. BlogIcon food grade containers walmart 2012.11.07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비담은 언제 태어난 것일까? 드라마 선덕여왕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미실은 진지왕의 아들인 비담을 낳았다.

  18. BlogIcon wise foods review 2012.11.07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이 죽고, 수 많은 저작물을 남기자, 이를 보종이 보관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의 수많은 내용의 근거가 미실이 저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19. BlogIcon wise foods review 2012.11.07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이 죽고, 수 많은 저작물을 남기자, 이를 보종이 보관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의 수많은 내용의 근거가 미실이 저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20. BlogIcon canine fence fighting 2012.11.23 0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아레스가 퇴장을 건 승부가 없었다면 우루과이는 8강에 만족하고 짐을 싸고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승부차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루과이는 이기고 들어갔고, 가나는 이미 지고 들어가는 승부였다.

  21. BlogIcon best survival hand crank radio 2013.01.02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만, 경기 2주를 남겨두고 경기도 과천 빙상장에서 연습도중 다른 사람과 충돌하여 심각한 발목 인대

사라진 문노와 미실이 버린 자식 비담?

(c) mbc 사극 문노(정호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그동안 사라진 문노(정호빈)와 숨겨둔 카드 비담이 카리스마 넘치게 공개되었다. 문노는 병이 걸린 마을을 구하는 선인으로 등장한다. 비담(김남길 역)은 문노가 키우는 제자로 나온다. 

(c) mbc 식탐비담(김남길)

<선덕여왕>에서 비담의 성격을 게으른 듯 하면서 내면을 숨기는 심계가 있지만, 식탐에 집착하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또한, 덕만을 두고, 비담과 유신의 통속적인 사랑의 삼각관계를 암시하였다.

자신의 무공을 속이면서까지 서현의 부하들에 매를 맞지만,  바구니 속의 닭고기가 망가지자,  숨겨진 무공을 들어내며 복수할 것을 다짐하고, 뒤를 쫓아 간다. 그리고 우연히 위기에 처한 덕만을 구하게 된다.

덕만을 구하고자 한 목적이 아니라.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덕만이 구해지는 것이다. 기존의 영웅담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c) mbc 사극 선덕여왕, 칼있으마 비담(김남길)

그렇다면,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비담은 언제 태어난 것일까? 드라마 선덕여왕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미실은 진지왕의 아들인 비담을 낳았다.

진지가 약속과 다르게 미실을 왕후로 받아 들이지 않자. 자신의 이모인 진흥비인 사도(옥진/영실)과 함께 진지를 폐위하고, 아들인 비담을 버리는 것으로 설정했다. 진지(금륜)의 비이며, 용춘의 어머니가 되는 지도는 미실의 이종사촌이다. 그러니 용수.용춘과 비담은 아버지는 같고, 어미가 다른 이복형제간이다.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사실이 또한번 증명된다.

그러니 비담은 진지왕 폐위시인 579년 직전에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버려진 비담을 사라진 문노가 키우게 되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설원랑 사이에 태어난 보종을 미실의 막내아들이라 했다. 보종의 탄생비화는 처음 미실이 진평과 관계를 가지려 했으나 진평왕이 너무 어려 미실을 따를 수 없었다. 이에 설원랑과 관계하여 보종을 낳았다.

16세 풍월주 보종(백도빈)

미실은 보종을 자신의 막내아들로 끔찍히 여겼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보종을 끔찍히 아끼는 듯한 모습을 여래사 사건으로  부상을 당한 보종에, 미실은 애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보종은 진평왕 즉위 초년인 580년 이후에 태어 난 것이 된다. 

미실이 보종을 끔찍히 사랑했듯이 보종 또한 어릴때 부터 어머니인 미실을 따르며, 어머니가 죽으면 자신도 따라 죽을 듯이 대했다. 미실이 죽고, 수 많은 저작물을 남기자, 이를 보종이 보관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의 수많은 내용의 근거가 미실이 저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비담은 보종의 형이 되는 것이다. 사실 비담에 대한 기록은 망실되어 알 수 없다.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이찬 칠숙이 631년 반란을 일으키지만, 9족이 멸하고 칠숙의 가계가 쑥대밭이 된다. 비담도 똑 같은 이유로 기록이 망실된 것이다.

이전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사실은 유신과 보종 너무나 친한 사이 글에서 선덕여왕에서 와는 다르게 보종은 진성공자로 착하고, 유하고, 선함의 대명사 였고, 유신이 아플때에는 그의 치료를 해주는 주치의 역할까지 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비담은 미실과 금륜(진지)의 아들일까?

진지왕(임호)

그렇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왜? 비담을 미실의 아들로 설정을 하였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비형랑은 전지왕이 죽은 후 귀신이 되어 도화녀와 관계를 맺어서 비형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진지왕(금륜)이 미실과 사도(진흥비)에 의해서 폐위된 후 별궁에 기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별궁에 있는 궁녀 사이에 비형랑을 낳았다. 비형랑은 진평왕이 아들처럼 길렀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담과 비형랑은 '비'자 돌림으로 같으니 비담도 진지왕의 소생이 아닐까? 또한, 미실이 진지왕와 관계를 가졌다면 소생을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담을 미실과 진지왕의 소생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비담이 미실의 아들일지라도 화랑세기나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


비담이 643년 선덕(덕만)왕 12년 상대등이 되고, 647년 선덕왕 16년 정월에 염종과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칠숙은 이찬의 지위에 있었지만, 칠숙과 관련된 기록이 사라진 것 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에 잘못을 하고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가족과 일족의 테두리에서 버려지는 방법은 족보에서 파버리는 것이 최고의 징계였을 수 있다. 쿠데타에 실패한 일족을 족보에 남겨두는 것은 불명예일 뿐만 아니고, 치욕에 가깝다. 해당 가문의 생존과도 직결이 된다.  그러니, 칠숙, 석품, 비담, 염종이 역사에서나 족보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설령 후손이 살아있다고 해도, 역신의 후손이라고 내 놓는 멍청한 후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당대에 썼다'는 화랑세기에도 없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어찌되었던 '비담이 상대등까지 올랐다'는 말은 신라사회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비담은 최고위 왕족 중에 하나 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이는 대략 50대 후반에서 60대이지 아닐까? 그렇다면 570~590년대 태어났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유신도 역사기록에서 사라지는 위험한 상황에 봉착한 때가 있었다. 이는 기회가 되면 기사로 송고할 예정이다.


결론은 비담이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 난  아들일 수 도 있겠다. 비담이 진지(금륜)/미실 사이에 난 아들이라고 해도 반박할만 한 역사적 자료는 없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동안 잘못된 인물 설정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비담은 미실의 버려진 아들이란 설정은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문제는 비담으로 인해서 미실가문은 멸문에 가까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징후는 없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미실가문과 진지(금륜)의 가문은 그후에도 꾸준히 세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왕도 배출한다. 물론, 비담의 반대파에서 비담을 진압하면, 왕도 배출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비형랑(鼻荊郎)은 코.종.시비(鼻)을 쓰고, 비담(毗曇)은 밝을.도울비(毗)을 쓴다. 그러니 비형랑과 비담 이들에게 같은 음만 가졌지 훈(뜻)이 전혀 다른 글짜를 쓰고 있다. 그러니 이들사이에 돌림자는 없다.  원작자의 중대한 실수가 되는 것이다. 단지, 코비에는 노비.시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 도울비가 노비.시종을 같이 사용했다면 할만은 없다.

어찌되었던  미실이 왜 비담를 버렸을까? 덕만과 대응되는 인물이 필요했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드라마를 보면 그의 과거에 대한 파편들이 들어 나겠지만. 문노가 어찌하여 비담을 자신의 내제자로 받아 들였을까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남자와 그의 아들


선덕여왕에서 비담은 11세 풍월주 하종(세종/미실)의 동생이며, 비형랑(진지/도화녀)의 형이 되고, 16세 풍월주 보종(미실/설원랑)의 형이 된다. 그런데 배역을 보면 비담이 천명,덕만, 보종보다 어리게 보인다.

하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가장 어린 595년생인 유신(엄태웅)이 천명(박예진), 덕만(이요원) (588~590년생), 비담(578년생?), 보종(579년생) 보다도 늙어 보이긴 한다.


사극 드라마 선덕여왕 원작이 더 좋았더라면..

사실 선덕여왕에서는 아직까진 유신이 등장하면 안된다. 현재 600~605년 사이를 진행되는 시대배경 상황으로는 유신이 낄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선덕여왕 원작자는 유신을 등장인물로 설정하였을까?

북두의 상징인 유신도 넣고 싶고, 화랑세기를 통털어 주인공 같은 미실을 빼면 안될것 같으니 미실도 넣고, 덕만도 넣고 싶은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 이다. 그러니 유신역을 맡은 엄태웅이 연기를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데 유별나게 극에 녹아 들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유신의 아버지 세대와 삼촌들 세대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만명과 사랑의 도피를 한 유신의 아비 김서현이, 유신이 맡은 배역을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화랑세기를 처음 보는 사람은 "뭐 이런 개족보가 다있나"한다. 그래서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든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의 전쟁과 혼맥은 화랑세기에 비하면 놀랄일도 아니다. 드라마 선덕여왕도 "머 이런 황당한 사극이 있나?"한다. 그런데 재미가 있다.

만약, 사극 선덕여왕 제작진이 탄탄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면, 선덕여왕은 지금보다도 정말 재밌게 만들어 졌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사극 선덕여왕의 잘못된 설정이 퍼도 퍼도 끊임없이 솟아는 샘과 같이 재밌는 연구소재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한마디로 노천 노다지(금) 광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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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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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낭만인생 2009.09.08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 덕에 가야시대와 신라 시대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죠.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거의 서양사 위주라서 항상 국사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는데 잘 됬다 싶습니다. 부산에 사니 신라와 가야에 대한 관심이 적잔이 많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을 보면 볼수록 황당하고 너무 극화되었다는 느낌 밖에 안듭니다. 초반부의 긴장감과 심리싸움도 이제 어느정도 정리가 되는 듯 하는데..
    실제 역사와 너무 다른 선덕여왕.. 슬.. 관심에서 멀어 지려합니다.
    좋은 정보 잘 읽고 갑니다.

  3. 바우바우 2009.09.16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너무 잼나요. 몰랐던 부분을 잼나게 풀어주셔서 ^^ 감솨~합니다.

  4. 호호 2009.11.09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신이 따지자면 어리게는 5살이겠군요............
    뭐...뭐지?

  5. 갓쉰동님 글을 읽게 해 준 선덕여왕에 감사ㅎㅎ 2009.11.13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여간 열심히 읽었습니다.
    드라마는 보고 난 즉시 잊어버리지만,
    님의 글은 두고 두고 보고 있습니다.
    역시!!!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6. BlogIcon 2012.01.02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전체에 서있다면 당신은 파고있어, 당신은 파고를 중지해야합니다

  7. BlogIcon 김성환 2012.01.07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짚신도 짝이 있다

  8. BlogIcon 엘리자베스 2012.04.03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심 없습니다.

  9. BlogIcon 피리 부는 사람 2012.04.06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가 안갑니다.

  10. BlogIcon Arianna 2012.05.09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을 살 여유가 없습니다.

  11. BlogIcon 루시 2012.05.11 1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지내십니까?

  12.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3.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4. BlogIcon Wet Pussy 2012.07.21 2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무사히 풀려났다는 소식에 위대하시고 영민하신 교지를 하사하셨습니다.

  15. BlogIcon Chris 2012.07.30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선덕여왕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미실은 진지왕의 아들인 비담을 낳았다.

  16. BlogIcon invisible dog fence installation 2012.11.03 2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티즌 악플러들은 뻘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만약, 일본이 진다면 일본 악플러들의 만행이 만만치 않을것 같다. 반면에 일본이 파라과이를 이긴다면 한국내의 악플러들이 허정무 감독과 대한민국 대표팀을 공격할 것 또한 자명해 보인다.

  17. BlogIcon food grade containers walmart 2012.11.07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비담은 언제 태어난 것일까? 드라마 선덕여왕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미실은 진지왕의 아들인 비담을 낳았다.

  18. BlogIcon wise foods review 2012.11.07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이 죽고, 수 많은 저작물을 남기자, 이를 보종이 보관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의 수많은 내용의 근거가 미실이 저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19. BlogIcon wise foods review 2012.11.07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이 죽고, 수 많은 저작물을 남기자, 이를 보종이 보관하고 정리하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의 수많은 내용의 근거가 미실이 저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20. BlogIcon canine fence fighting 2012.11.23 0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아레스가 퇴장을 건 승부가 없었다면 우루과이는 8강에 만족하고 짐을 싸고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승부차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루과이는 이기고 들어갔고, 가나는 이미 지고 들어가는 승부였다.

  21. BlogIcon best survival hand crank radio 2013.01.02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만, 경기 2주를 남겨두고 경기도 과천 빙상장에서 연습도중 다른 사람과 충돌하여 심각한 발목 인대


그 동안 덕만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천명을 제치고, 왕위를 이은 이유를 이전 기사들에서 충분히 증명하고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넷째, 천명은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이요원만큼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


(c) mbc 사극 선덕여왕, 칠숙과 소화

이제 미실의 충복으로 설정된 칠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실한 충복으로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머나먼 사막까지 추적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불길속에서 눈의 각막이상으로 실명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덕만의 유모인 소화를 사막의 개미지옥같은 유사에서 구하고, 사랑하게 된다.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칠숙과 석품이 어떠한 과정을 걸쳐서 반란을 일으키는 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칠숙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드라마와는 다르게 칠숙은 미실의 충복이 아니라, 신라의 왕위계승권에서 최고 우선권이 있었지만, 진평왕이 덕만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평왕이 미리 칠숙의 반란을 눈치채고, 칠숙을 잡아들여 9족을 멸한다. 칠숙과 같이 반란에 동조하고 참여했던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다가 가족이 그리워, 경주(서라벌)로 돌아와 집에서 잡혀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 칠숙의 반란 기사를 살펴보자.

631년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삼국사기 본기 신라 진평왕 53년 

칠숙이 반란을 일으킬때 직위를 살펴보자.. 이찬은 명예직에 가까운 상대등, 각간 등에 뒤이은 실질적인 일인자인  2등위의 신라 최고급 지위이다. 아찬 석품은,  대아찬 바로 밑인 6등위의 고위직에 있었다. 이들이 아들이 없는 진평왕 말년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덕만과 충돌하는 것이다.

칠숙의 지위로 볼때, 칠숙은 왕실과 최측근 사람이다. 석품 또한, 직.간접적으로 왕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숙의 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는 없다. 그러나 흔적은 몇몇 기사로 확인이 가능하다.

진평왕에게는 동륜과 만호 태후 사이에 난 동복 아우가 두명이 있었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한명은 백반인 진정갈문왕이고, 백반의 동생인듯한 국반(진안갈문왕) 이다.
그런데 백반과는 다르게 국반(진안갈문왕)은 덕만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진덕(승만)의 아버지가 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덕만)에는 "음갈문왕"를 보면 국반일 수 밖에 없는 "음갈문왕"에 관한 기록이 보여진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기서 백반도 "음갈문왕"일 수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면, 국반의 딸인 승만이 덕만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는 것만으로 충분한 반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한 증거를  칠숙의 반란 사건으로 증명하고자 하는것이다. 결론 부터 말을 하면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진평왕계보도

진평왕때로 돌아가 보자,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면 다음 대권은 누가 잡을까? 용수와 결혼한 천명이 대권을 잡거나, 신라에 빈번히 보이는 아들이 없을때나 있어도 나이가 어린 왕자를 둔 왕 다음은 사위가 왕이 되었다. 그러니 천명의 남편인 용수나 용춘이 대권을 잡아야 한다. 용춘과 용수는 최소한 용춘은 진평왕시기를 넘어, 덕만이 왕위에 있는 시기를 지나, 647년 진덕(승만)이 왕위를 잇는 그 순간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권은 덕만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천명은 정비의 소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 왕위계승 서열을 알 수 있는 진흥왕의 자손들의 계보도를 살펴보자. 

 
진평의 딸들은 천명과 덕만과 선화로 알려져 있다. 계보도는 복잡해서 진평/마야의 소생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위의 진평와 계보도에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로 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진흥왕 계보도


아들이 없는 진평왕 다음의 대권 순위는 누가 될까?

진평의 형제인 백반과 국반이 다음 대권 후보군이다. 그다음은 백반의 자식들이고, 그 다음이 국반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국반갈문왕에게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진평과 마찬가지로 딸인 승만(진덕)만이 있다. 그렇다면, 백반갈문왕의 자식이 왕위승계 제일 순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백반의 자식에 관한 기록은 망실되고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칠숙의 반란사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백반의 아들로 추측되는 이찬 칠숙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다음 대권을 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진평은 영민하고, 기지가 있는 덕만을 다음 왕위로 세우고자 한다.

또한, 덕만은 공주시절 고모부인 김서현의 딸인 고종사촌 문희와 자신의 언니인 천명의 아들인 이종조카 춘추를 결혼으로 맺어 줌으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덕만에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려면, 백반의 아들인 칠숙으로써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거나, 백반이 살아 있다면, 백반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반란을 결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국인(국민)이 전왕이 국정을 농단했다고 선전을 하면 그만이다.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기도 했었다. 하물며 왕이 하늘인 시대엔 오죽하겠는가? 이래 죽으나 권력욕이 넘치(?)는 칠숙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한다. 어차피 덕만이 왕위에 오르면, 숙여지내거나 숙청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칠숙은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한 쿠데타는 가혹하리 만큼 엄중하게 처벌한다.

이처럼
백반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이유는 칠숙이 백반의 아들이며, 반란의 여파로 구족이 멸문지화 당했기 때문이다.

칠숙의 반란사건은 삼국사기에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면을 추적하다 보면, 왕실내의 왕위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김유신의 아비인 김서현의 기록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기사는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 삼국사기 진평왕 51년

입니다. 물론, 김서현의 딸인 문희와 김춘추의 기록을 보면, 대장군보다 높은 소판(3등위)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추증되었거나, 김서현의 기록이 망실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칠숙의 반란 사건이 이상하고, 요상한 이유는 진평왕의 사망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54년(632)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200단(段)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632)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 삼국사기 진평왕 54년

김부식은 우리의 <고기>에는 632년에 죽었다 기록하고 있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들어 "631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왜 신당서와 자치통감이 잘못되었을까?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진평왕 죽음에 이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덕만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34년 선덕왕 3년에 숙부인 국반갈문왕과 결혼을 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깨는 글을 여러편 기사로 송고했다. 이글을 읽으신 분은 계속 머리를 흔들며 아닌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하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 시리즈 글에서 몇가지 소득이 있었다. 일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시기에 한일 인줄 안 문희와 춘추의 결혼을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기에 한일 임을 증명한 일이나,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꽃이 향기가 없다고한, "모란꽃 사건은 627년 11월에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명을 한 것이다. 또한, 이번에는 천명과 덕만은 진평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복자매이라는 증명도 하였다.

사실 통설이란 기존의 학자가 만들어논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한다해서 모두 진실이 되고,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를 하고, 의문점을 해소해 가는 것이다.

몇편의 글들은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내용을 드라마 선덕여왕을 빌어서 가설을 다시 재정립하여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 증명하는데 있었다. 또한,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글쓴이는 사극이 가져오는 병폐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잘못된 사극이던, 잘된 사극이던 이를 교본으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히려, 정통사극이나 명품사극을 표방하고, 스스로 당당히 그 시대를 재조명하였다고 선언한 사극이, 실은 잘못된 역사를 왜곡해 사극으로 만들어 질때 역사공부에는 더 좋은 교재가 된다.

사실 사극의 원전에 해당하는 소설이 잘못된 설정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면, 아무리 사극을 잘 만들더라도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덕만은 천명의 어린동생임 증명하는 글, 새로 업데이트 된글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본글 추천 후 크릭 ^___^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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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소대영 2009.07.26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부탁이 있습니다.알천량이 80세 되던해에 손자를 보게되어 집인에 경사가 났다하여 경사로울 경자로 이름을 개명하였고 이식.간 .상대등 벼슬까지 하셨으며 춘추와 왕위계승에 까지 말이 있어 나는 너무 늙었고 무덕하니 불가하다 자처하고 용맹한 춘추가 왕이되어야 한다고 사양하여 춘추한테 임금자리를 양보하였다고 우리는 알고있습니다.서기577년 생이시고 679년에(수는 110세)졸하셨으며 진주소씨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진평.선덕.춘추에 이르기 까지 왕위 계승이 평탄치 않았는데 그어려운 자리를 나이 불구하고 맡을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손으로서 욕심이랄까 있지만 그땐 그럴사정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고 알천량이라고 나오고 성이 없는데 그에대해서 후일 진주소씨 시조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알고쉽습니다 글쓴이 께서 저의 댓글을 보시고 바로 좀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름데로 시조의 흔적을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 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시가 소씨로 고쳐졌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촌장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시조는 소경(蘇慶)이며 소벌도리의 25세손으로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구시동(九柿洞)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사를 한 후 660년(무열왕 7)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았고, 이름을 소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소경은 648년(진덕여왕 2)에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삼았다. - 소씨(蘇氏) - 본관:진주(晉州)

    •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로 삼았다.- 진덕왕 원년

      비담이 646년 11월 상대등이 되고 647년 정월 비담이 난을 일으킨후.. 647년에 정월에 비담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올랐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 가면 진주소씨 족보를 잘 분석해 놓은 글이 있군요..

      http://hyunk02.egloos.com/1903188

  3. 소대영 2009.07.26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대영 sody06@hanmail.net.으로 글쓴이 께서 앞의 묻는 내용을 혹이라도 알고 계시면 이메일 주소로 좀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4. 2009.07.26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읽지는못하고가지만,글진짜 잘쓰시는듯..
    >< 칠숙에 관심이 있어서... ㅋㅋㅋㅋ

  5. 궁금궁금 2009.07.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작은아버지인 국반과 결혼을 했으면 원래 국반의 부인이자 진덕여왕의 어머니인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걍 쫓겨났을까요?
    월명부인이 안쫓겨났다면 국반은 여왕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행운아인건가요?
    아니면 여왕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두번째 부인을 들인 간 큰 남자?

    그리고 만약에 월명부인이 첫번째 부인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면, 진덕여왕이 왕이 되었을때 어머니를 월명부인으로 기록했을까요?
    물론 조선시대이기는 하지만 연산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폐비윤씨로 기록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진덕여왕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월명부인을 원래 자리로 돌린건가요? 자신의 전임왕인 선덕여왕을 밀어내고?

    글을 읽어보니 더 궁금증이 생겨서요....

  6.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자리로 돌려 놓지 않았을까요? 저도 글을 쓸때 월명부인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하더군요..
    법률적 어미와, 생물학적 어미와, 법통의 어미 등 차이가 있지 않을까함.

    조선 정조도 큰아버지 아들로 입적하잖아요.. 그리고 왕이되고, 왕이 된후,, 생물학적으로 사도태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지요. .

    신라시대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을 그것으로 추측합니다. 내물왕 이전시기.. 미추왕때 보면 그의 후손들과 실성, 나물 등이 연대가 맞지 않잖아요.. 생물학적으로는.. 이건 그동안 생각햇던 건데.. 밝혀 버렸네요..

    암튼, 계승, 승계, 법통, 등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안되는 상황이 해결되거든요.. 기회가 되면 이쪽을 건들생각입니다.. 미추왕때.. 이후를..

  7. 2009.07.26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

    블로그의 제목과 다른 허구에 빠져 역사(?)를 탐구하는 이질적 행태

  8. 두모 2009.07.31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흥미가 많은지라 관심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위 본문 글 중에 용춘/용수가 진평왕에 뒤이어 왕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아내인 진평왕의 딸 천명이 정비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라 기술되었는데,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어디 다른 글에서 보기에
    용춘/용수의 아비인 진지왕이 황음무도하다 하여 미실 등에 의해서 추방되어 죽었기에
    그 아들들인 용춘/용수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고 하더군요.

    성골/진골의 구분이 없는 듯 하다는 글을 쓰셨는데 저도 동의가 됩니다.
    왕족이 있을 뿐이고, 왕의 아들이 계승자가 되지만
    진지왕의 경우와 같이 죄가 있으면 박탈되는 것이 당연하고
    선덕여왕 즉위는 용춘(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와 군부세력인 김유신이
    결합해서 옹립한 것이라 봐야죠.

    김춘추는 할아버지 진지왕의 패덕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되고
    아버지 용춘(용수?)의 공적과 자신의 공으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공인받게 되었다고 봐야죠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충분히 그럴수 있지만.진지왕 폐위사건이 벌어진. 579년에서 632년이면 충분히 지나고도 남았겠지요.. 50년은 안되고.. 654년은 된다는 뜻은.. 글쎄요.. 그때도 안되었음.. 지금도 안되는 거지요..

      그리고 정확히는 후비가 아닌 서자도 아닌..
      정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요.. ㅋㅋ

      제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를 비판할때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는겁니다.. 아직은 화랑세기를 가지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비판하기는 요원하고, 제 생각은 화랑세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작품 같거든요..

      너무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어서요..

      후대에 나온 역사서를 절묘하게 빠질수 있다는 말은 후대 작품 아니면 있을수 없거든요..

      성골/진골이 없다는 분을 뵈오니 방갑습니다..

      즐거운 댓글 놀이 였습니다..

      추천도 해주실거죠? ^____^

  9. BlogIcon 황금알 2009.07.31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선덕여왕을꾸준히보지못해서 이해못하는부분에도움이 되었구앞으로보는재미에 많은도움을 주셔서감사 또감사 좋은 저녁 되세요

  10. 산행인 2009.08.05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관심은 많으나 잘모르는 사람입니다. 선덕여왕을 읽고 갓쉰동님의 글을 읽어면서 화랑의 성격에

    의문이 있습니다. 혹시 화랑과 낭도의 성격이 집의 사병이 아닙니까. 화랑은 집의 사병의 우두머리이고요.

    사병이 또 성장하여 사병을 데리고 군에 들어가서 장군이 되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십화랑은

    유력한 열가문의 사병이 아닙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08.05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의 다수는 귀족의 자제이고, 그들을 서포트하는 집단은 6부의 귀족이나 일반인들 입니다. 낭두..라고 해서요..

      이 낭두가 가야파에 점령된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낭두에서 벗어나면,, 지방의 관리나, 군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님의 말씀도 틀린것은 아닙니다..

  11. BlogIcon gadgeteer 2009.08.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이번 글도 잘 읽고 갑니다. 읽을 수록 재미가 쏙쏙~~ 사실 칠숙도 선덕여왕의 재밋거리중 하나죠.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12. 글쎄요. 2009.08.13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름 논리정연한것 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 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 유감일 따름입니다. 천명과 덕만사이의 맏이와 차녀는 누구인가, 만약 맏이가 천명이라면 왜 차녀인 덕만이 왕권을 계승 했을까에 대해서 아랫글을 보시면..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자였던 동륜태자의 아들로,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 죽자 숙부인 금륜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지왕입니다.



    하지만 진지왕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시의 집권측과 갈등이 생겨, 결국 왕이 된지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진지왕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수전군과 용춘전군이 그들입니다.



    용수와 용춘의 존재에 대해서도 두사람이다, 혹은 한사람인데 이름이 잘못 표기된것 뿐이다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진지왕의 장남 용수전군이 진평왕의 맏딸인 천명부인과 결혼하여낳은 아이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진평왕은 마야왕후가 죽은 뒤 새 왕비를 들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이 일찍 죽자,후계에 문제가생겼는데,

    전통대로 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권력을 쥐고 있던 화백회의측이 폐위시킨 진지왕의 아들( 당시엔 용수전군은 죽고 천명은 용춘전군과 재혼한 상태였음)이 왕이 되므로, 화백회의측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진지왕의 폐위로 왕위에 오른 진평왕또한 이를 용인하기는 곤란했을 겁니다.



    때문에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이 장녀인 천명을 불러 다음 왕위를 동생인 "덕만에게 양보해 줄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천명이 이를 "용인"하여 궁을 떠났기때문에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더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

    • BlogIcon 갓쉰동 2009.08.13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다른 글도 읽어보시길.. 님은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계시잖습니까? 이글은 화랑세기를 기준으로 한게 아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가지고 증명하는 글입니다..

      설마,, 화랑세기를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대부분 드라마 선덕여왕에 관련 포스트를 보시면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거든요...

  13. BlogIcon 도희 2009.08.22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고가요^^
    댓글을 부끄러워서 잘 안다는 편인데, 재미나게 읽고나니.. 제가 드릴 것은 감사하단 인사 뿐인 것 같아서요^^

  14. 그냥 2009.09.23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고 가네요.. 역사이야기를 좋아라 하는편인데 화랑세기를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네요..1

  15. zzzzz 2009.10.22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걸 지적해야되나 좀 그렇지만 선화는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라고 해요;;;;;;

  16. ㅇㅇ 2009.10.31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ㅋㅋ 그런데 학생인저로서는 수능과는 1g도 연관되진 않을거같네요 ㅋㅋㅋ

    • BlogIcon 갓쉰동 2009.10.31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용..ㅋㅋ 아쉽지만, 비교체험 했다고 생각하셈.. 수능에 도움이 되었음 좋았을 걸용.. 역사교육의 한계인데용.. 어쩌겠어용..

  17. BlogIcon Nehe 2009.12.04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의 ㅇㅇ 님댓글에 웃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그나저나 이번 수능에는 신라관련해서문제가 나왔을까요? ㅎㅎㅎ

  18.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9.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20. 새벽 2012.12.27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계보...진평왕은26대왕이고선덕여왕은27대인데..ㅜㅋ

  21. BlogIcon pandora style beads 2013.04.19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담근 저장식품이지만


그 동안 덕만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천명을 제치고, 왕위를 이은 이유를 이전 기사들에서 충분히 증명하고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위의 글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넷째, 천명은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이요원만큼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


(c) mbc 사극 선덕여왕, 칠숙과 소화

이제 미실의 충복으로 설정된 칠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실한 충복으로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머나먼 사막까지 추적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불길속에서 눈의 각막이상으로 실명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덕만의 유모인 소화를 사막의 개미지옥같은 유사에서 구하고, 사랑하게 된다.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칠숙과 석품이 어떠한 과정을 걸쳐서 반란을 일으키는 지는 현재로써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칠숙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드라마와는 다르게 칠숙은 미실의 충복이 아니라, 신라의 왕위계승권에서 최고 우선권이 있었지만, 진평왕이 덕만을 왕위에 올리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평왕이 미리 칠숙의 반란을 눈치채고, 칠숙을 잡아들여 9족을 멸한다. 칠숙과 같이 반란에 동조하고 참여했던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다가 가족이 그리워, 경주(서라벌)로 돌아와 집에서 잡혀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 칠숙의 반란 기사를 살펴보자.

631년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삼국사기 본기 신라 진평왕 53년 

칠숙이 반란을 일으킬때 직위를 살펴보자.. 이찬은 명예직에 가까운 상대등, 각간 등에 뒤이은 실질적인 일인자인  2등위의 신라 최고급 지위이다. 아찬 석품은,  대아찬 바로 밑인 6등위의 고위직에 있었다. 이들이 아들이 없는 진평왕 말년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덕만과 충돌하는 것이다.

칠숙의 지위로 볼때, 칠숙은 왕실과 최측근 사람이다. 석품 또한, 직.간접적으로 왕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숙의 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는 없다. 그러나 흔적은 몇몇 기사로 확인이 가능하다.

진평왕에게는 동륜과 만호 태후 사이에 난 동복 아우가 두명이 있었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한명은 백반인 진정갈문왕이고, 백반의 동생인듯한 국반(진안갈문왕) 이다.
그런데 백반과는 다르게 국반(진안갈문왕)은 덕만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진덕(승만)의 아버지가 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또한, 삼국유사 선덕왕(덕만)에는 "음갈문왕"를 보면 국반일 수 밖에 없는 "음갈문왕"에 관한 기록이 보여진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기서 백반도 "음갈문왕"일 수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면, 국반의 딸인 승만이 덕만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는 것만으로 충분한 반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한 증거를  칠숙의 반란 사건으로 증명하고자 하는것이다. 결론 부터 말을 하면 칠숙은 백반갈문왕의 아들일 수 밖에 없다.

진평왕계보도

진평왕때로 돌아가 보자,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면 다음 대권은 누가 잡을까? 용수와 결혼한 천명이 대권을 잡거나, 신라에 빈번히 보이는 아들이 없을때나 있어도 나이가 어린 왕자를 둔 왕 다음은 사위가 왕이 되었다. 그러니 천명의 남편인 용수나 용춘이 대권을 잡아야 한다. 용춘과 용수는 최소한 용춘은 진평왕시기를 넘어, 덕만이 왕위에 있는 시기를 지나, 647년 진덕(승만)이 왕위를 잇는 그 순간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권은 덕만에게 넘어갔다. 그러니 천명은 정비의 소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 왕위계승 서열을 알 수 있는 진흥왕의 자손들의 계보도를 살펴보자. 

 
진평의 딸들은 천명과 덕만과 선화로 알려져 있다. 계보도는 복잡해서 진평/마야의 소생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위의 진평와 계보도에 천명과 덕만이 이복자매로 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진흥왕 계보도


아들이 없는 진평왕 다음의 대권 순위는 누가 될까?

진평의 형제인 백반과 국반이 다음 대권 후보군이다. 그다음은 백반의 자식들이고, 그 다음이 국반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국반갈문왕에게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진평과 마찬가지로 딸인 승만(진덕)만이 있다. 그렇다면, 백반갈문왕의 자식이 왕위승계 제일 순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백반의 자식에 관한 기록은 망실되고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칠숙의 반란사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백반의 아들로 추측되는 이찬 칠숙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다음 대권을 잡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진평은 영민하고, 기지가 있는 덕만을 다음 왕위로 세우고자 한다.

또한, 덕만은 공주시절 고모부인 김서현의 딸인 고종사촌 문희와 자신의 언니인 천명의 아들인 이종조카 춘추를 결혼으로 맺어 줌으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덕만에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을려면, 백반의 아들인 칠숙으로써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거나, 백반이 살아 있다면, 백반을 왕위에 옹립하려고 반란을 결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국인(국민)이 전왕이 국정을 농단했다고 선전을 하면 그만이다.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기도 했었다. 하물며 왕이 하늘인 시대엔 오죽하겠는가? 이래 죽으나 권력욕이 넘치(?)는 칠숙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한다. 어차피 덕만이 왕위에 오르면, 숙여지내거나 숙청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칠숙은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 실패한 쿠데타는 가혹하리 만큼 엄중하게 처벌한다.

이처럼
백반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없는 이유는 칠숙이 백반의 아들이며, 반란의 여파로 구족이 멸문지화 당했기 때문이다.

칠숙의 반란사건은 삼국사기에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면을 추적하다 보면, 왕실내의 왕위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김유신의 아비인 김서현의 기록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기사는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 삼국사기 진평왕 51년

입니다. 물론, 김서현의 딸인 문희와 김춘추의 기록을 보면, 대장군보다 높은 소판(3등위)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추증되었거나, 김서현의 기록이 망실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칠숙의 반란 사건이 이상하고, 요상한 이유는 진평왕의 사망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54년(632) 봄 정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200단(段)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632)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 삼국사기 진평왕 54년

김부식은 우리의 <고기>에는 632년에 죽었다 기록하고 있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들어 "631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왜 신당서와 자치통감이 잘못되었을까?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진평왕 죽음에 이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덕만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34년 선덕왕 3년에 숙부인 국반갈문왕과 결혼을 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깨는 글을 여러편 기사로 송고했다. 이글을 읽으신 분은 계속 머리를 흔들며 아닌데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하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번 시리즈 글에서 몇가지 소득이 있었다. 일단,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시기에 한일 인줄 안 문희와 춘추의 결혼을 선덕여왕이 덕만공주 시기에 한일 임을 증명한 일이나,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꽃이 향기가 없다고한, "모란꽃 사건은 627년 11월에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명을 한 것이다. 또한, 이번에는 천명과 덕만은 진평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복자매이라는 증명도 하였다.

사실 통설이란 기존의 학자가 만들어논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한다해서 모두 진실이 되고,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를 하고, 의문점을 해소해 가는 것이다.

몇편의 글들은 그동안 의문을 품어 왔던 내용을 드라마 선덕여왕을 빌어서 가설을 다시 재정립하여 세우고, 이를 검증하고, 증명하는데 있었다. 또한,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 있었다. 글쓴이는 사극이 가져오는 병폐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본다. 잘못된 사극이던, 잘된 사극이던 이를 교본으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오히려, 정통사극이나 명품사극을 표방하고, 스스로 당당히 그 시대를 재조명하였다고 선언한 사극이, 실은 잘못된 역사를 왜곡해 사극으로 만들어 질때 역사공부에는 더 좋은 교재가 된다.

사실 사극의 원전에 해당하는 소설이 잘못된 설정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면, 아무리 사극을 잘 만들더라도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덕만은 천명의 어린동생임 증명하는 글, 새로 업데이트 된글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본글 추천 후 크릭 ^___^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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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휘문 2009.07.26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멋지십니다 ㅠㅠ 잘 보고갑니다

  3. 소대영 2009.07.26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부탁이 있습니다.알천량이 80세 되던해에 손자를 보게되어 집인에 경사가 났다하여 경사로울 경자로 이름을 개명하였고 이식.간 .상대등 벼슬까지 하셨으며 춘추와 왕위계승에 까지 말이 있어 나는 너무 늙었고 무덕하니 불가하다 자처하고 용맹한 춘추가 왕이되어야 한다고 사양하여 춘추한테 임금자리를 양보하였다고 우리는 알고있습니다.서기577년 생이시고 679년에(수는 110세)졸하셨으며 진주소씨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진평.선덕.춘추에 이르기 까지 왕위 계승이 평탄치 않았는데 그어려운 자리를 나이 불구하고 맡을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손으로서 욕심이랄까 있지만 그땐 그럴사정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고 알천량이라고 나오고 성이 없는데 그에대해서 후일 진주소씨 시조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알고쉽습니다 글쓴이 께서 저의 댓글을 보시고 바로 좀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름데로 시조의 흔적을 찾을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 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시가 소씨로 고쳐졌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촌장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시조는 소경(蘇慶)이며 소벌도리의 25세손으로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구시동(九柿洞)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사를 한 후 660년(무열왕 7)에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을 낳았고, 이름을 소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소경은 648년(진덕여왕 2)에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삼았다. - 소씨(蘇氏) - 본관:진주(晉州)

    •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로 삼았다.- 진덕왕 원년

      비담이 646년 11월 상대등이 되고 647년 정월 비담이 난을 일으킨후.. 647년에 정월에 비담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올랐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곳에 가면 진주소씨 족보를 잘 분석해 놓은 글이 있군요..

      http://hyunk02.egloos.com/1903188

  4. 소대영 2009.07.26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대영 sody06@hanmail.net.으로 글쓴이 께서 앞의 묻는 내용을 혹이라도 알고 계시면 이메일 주소로 좀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5. 2009.07.26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읽지는못하고가지만,글진짜 잘쓰시는듯..
    >< 칠숙에 관심이 있어서... ㅋㅋㅋㅋ

  6. 궁금궁금 2009.07.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작은아버지인 국반과 결혼을 했으면 원래 국반의 부인이자 진덕여왕의 어머니인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걍 쫓겨났을까요?
    월명부인이 안쫓겨났다면 국반은 여왕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한 행운아인건가요?
    아니면 여왕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두번째 부인을 들인 간 큰 남자?

    그리고 만약에 월명부인이 첫번째 부인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면, 진덕여왕이 왕이 되었을때 어머니를 월명부인으로 기록했을까요?
    물론 조선시대이기는 하지만 연산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폐비윤씨로 기록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진덕여왕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월명부인을 원래 자리로 돌린건가요? 자신의 전임왕인 선덕여왕을 밀어내고?

    글을 읽어보니 더 궁금증이 생겨서요....

  7. BlogIcon 갓쉰동 2009.07.26 2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자리로 돌려 놓지 않았을까요? 저도 글을 쓸때 월명부인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하더군요..
    법률적 어미와, 생물학적 어미와, 법통의 어미 등 차이가 있지 않을까함.

    조선 정조도 큰아버지 아들로 입적하잖아요.. 그리고 왕이되고, 왕이 된후,, 생물학적으로 사도태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지요. .

    신라시대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을 그것으로 추측합니다. 내물왕 이전시기.. 미추왕때 보면 그의 후손들과 실성, 나물 등이 연대가 맞지 않잖아요.. 생물학적으로는.. 이건 그동안 생각햇던 건데.. 밝혀 버렸네요..

    암튼, 계승, 승계, 법통, 등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안되는 상황이 해결되거든요.. 기회가 되면 이쪽을 건들생각입니다.. 미추왕때.. 이후를..

  8. 2009.07.26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

    블로그의 제목과 다른 허구에 빠져 역사(?)를 탐구하는 이질적 행태

  9. 두모 2009.07.31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흥미가 많은지라 관심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위 본문 글 중에 용춘/용수가 진평왕에 뒤이어 왕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아내인 진평왕의 딸 천명이 정비 소생이 아니기 때문이라 기술되었는데,
    이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어디 다른 글에서 보기에
    용춘/용수의 아비인 진지왕이 황음무도하다 하여 미실 등에 의해서 추방되어 죽었기에
    그 아들들인 용춘/용수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고 하더군요.

    성골/진골의 구분이 없는 듯 하다는 글을 쓰셨는데 저도 동의가 됩니다.
    왕족이 있을 뿐이고, 왕의 아들이 계승자가 되지만
    진지왕의 경우와 같이 죄가 있으면 박탈되는 것이 당연하고
    선덕여왕 즉위는 용춘(용수?)의 아들인 김춘추와 군부세력인 김유신이
    결합해서 옹립한 것이라 봐야죠.

    김춘추는 할아버지 진지왕의 패덕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되고
    아버지 용춘(용수?)의 공적과 자신의 공으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공인받게 되었다고 봐야죠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충분히 그럴수 있지만.진지왕 폐위사건이 벌어진. 579년에서 632년이면 충분히 지나고도 남았겠지요.. 50년은 안되고.. 654년은 된다는 뜻은.. 글쎄요.. 그때도 안되었음.. 지금도 안되는 거지요..

      그리고 정확히는 후비가 아닌 서자도 아닌..
      정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요.. ㅋㅋ

      제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를 비판할때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는겁니다.. 아직은 화랑세기를 가지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비판하기는 요원하고, 제 생각은 화랑세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작품 같거든요..

      너무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어서요..

      후대에 나온 역사서를 절묘하게 빠질수 있다는 말은 후대 작품 아니면 있을수 없거든요..

      성골/진골이 없다는 분을 뵈오니 방갑습니다..

      즐거운 댓글 놀이 였습니다..

      추천도 해주실거죠? ^____^

  10. BlogIcon 황금알 2009.07.31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선덕여왕을꾸준히보지못해서 이해못하는부분에도움이 되었구앞으로보는재미에 많은도움을 주셔서감사 또감사 좋은 저녁 되세요

  11. 산행인 2009.08.05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관심은 많으나 잘모르는 사람입니다. 선덕여왕을 읽고 갓쉰동님의 글을 읽어면서 화랑의 성격에

    의문이 있습니다. 혹시 화랑과 낭도의 성격이 집의 사병이 아닙니까. 화랑은 집의 사병의 우두머리이고요.

    사병이 또 성장하여 사병을 데리고 군에 들어가서 장군이 되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십화랑은

    유력한 열가문의 사병이 아닙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08.05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의 다수는 귀족의 자제이고, 그들을 서포트하는 집단은 6부의 귀족이나 일반인들 입니다. 낭두..라고 해서요..

      이 낭두가 가야파에 점령된 적도 있습니다..

      이들은 낭두에서 벗어나면,, 지방의 관리나, 군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님의 말씀도 틀린것은 아닙니다..

  12. BlogIcon gadgeteer 2009.08.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이번 글도 잘 읽고 갑니다. 읽을 수록 재미가 쏙쏙~~ 사실 칠숙도 선덕여왕의 재밋거리중 하나죠.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13. 글쎄요. 2009.08.13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름 논리정연한것 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 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 유감일 따름입니다. 천명과 덕만사이의 맏이와 차녀는 누구인가, 만약 맏이가 천명이라면 왜 차녀인 덕만이 왕권을 계승 했을까에 대해서 아랫글을 보시면..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자였던 동륜태자의 아들로,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 죽자 숙부인 금륜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지왕입니다.



    하지만 진지왕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당시의 집권측과 갈등이 생겨, 결국 왕이 된지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에 동륜의 아들인 진평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진지왕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용수전군과 용춘전군이 그들입니다.



    용수와 용춘의 존재에 대해서도 두사람이다, 혹은 한사람인데 이름이 잘못 표기된것 뿐이다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진지왕의 장남 용수전군이 진평왕의 맏딸인 천명부인과 결혼하여낳은 아이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진평왕은 마야왕후가 죽은 뒤 새 왕비를 들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이 일찍 죽자,후계에 문제가생겼는데,

    전통대로 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권력을 쥐고 있던 화백회의측이 폐위시킨 진지왕의 아들( 당시엔 용수전군은 죽고 천명은 용춘전군과 재혼한 상태였음)이 왕이 되므로, 화백회의측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진지왕의 폐위로 왕위에 오른 진평왕또한 이를 용인하기는 곤란했을 겁니다.



    때문에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진평왕이 장녀인 천명을 불러 다음 왕위를 동생인 "덕만에게 양보해 줄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천명이 이를 "용인"하여 궁을 떠났기때문에

    덕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더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

    • BlogIcon 갓쉰동 2009.08.13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다른 글도 읽어보시길.. 님은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계시잖습니까? 이글은 화랑세기를 기준으로 한게 아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가지고 증명하는 글입니다..

      설마,, 화랑세기를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대부분 드라마 선덕여왕에 관련 포스트를 보시면 화랑세기를 인용하고 있거든요...

  14. BlogIcon 도희 2009.08.22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고가요^^
    댓글을 부끄러워서 잘 안다는 편인데, 재미나게 읽고나니.. 제가 드릴 것은 감사하단 인사 뿐인 것 같아서요^^

  15. 그냥 2009.09.23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고 가네요.. 역사이야기를 좋아라 하는편인데 화랑세기를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네요..1

  16. zzzzz 2009.10.22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걸 지적해야되나 좀 그렇지만 선화는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라고 해요;;;;;;

  17. ㅇㅇ 2009.10.31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ㅋㅋ 그런데 학생인저로서는 수능과는 1g도 연관되진 않을거같네요 ㅋㅋㅋ

    • BlogIcon 갓쉰동 2009.10.31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용..ㅋㅋ 아쉽지만, 비교체험 했다고 생각하셈.. 수능에 도움이 되었음 좋았을 걸용.. 역사교육의 한계인데용.. 어쩌겠어용..

  18. BlogIcon Nehe 2009.12.04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의 ㅇㅇ 님댓글에 웃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그나저나 이번 수능에는 신라관련해서문제가 나왔을까요? ㅎㅎㅎ

  19.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20.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21. 새벽 2012.12.27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계보...진평왕은26대왕이고선덕여왕은27대인데..ㅜㅋ

선덕여왕 덕만에 관한 기록들을 하나 접수하여 역사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씩 추적 탐사 검증하고 새로운 주장을 하는 포스팅 했습니다.

지금은 덕만 탐사의 종착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또는 추측하고 있었던 상식을 상식이 아님을 증명하였고, 마지막으로 덕만은 왕위를 이을때 도대체 몇살이였는가? 할머니 였다는데 정말 할머니 였을때 왕위를 이은것인가?를 찾아 갈겁니다. 이글은 그 최종 종착역의 구부능선을 타는 덕만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영묘사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볼겁니다.
  

(c) mbc 사극 선덕여왕



선덕왕 4년(635)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4년

선덕왕 5년 636년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 말하였다. - 삼국사기

여름 5월에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사졸들을 쉬게 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군사를 거느리고 엄습해 와서 이를 쳐서 무찔렀다. 우소는 큰 돌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막아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다 - 삼국사기 백제 무왕

문무왕 2년(662) 영묘사에 불이 났다. - 삼국사기 문무왕 2년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선덕왕 궁궐 서쪽 옥문지 사건을 옥문지는 영묘사에 있다하고 개구리가 출연한 때는 여름 5월이 아닌 겨울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개구리 두꺼비가 여름에 우는 거는 일상적인 일이 아닌가? 겨울에 몇일 동안 못에 나와서 우는 것이 특이하니 이 사실을 덕만(선덕왕)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합리적이다.


넷은 용궁(龍宮)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甲午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善德王 을미년乙未年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 삼국유사 아도기리 중

선덕왕 갑오년이면 634년이고, 을미년은 635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635년 선덕왕 4년 영묘사 공사가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본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무슨 소리 선덕왕 2년에 분황사 공사를 시작하고, 영묘사는 635년에 공사를 시작했다라고 삼국사기를 반박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635년 선덕여왕 4년에 영묘사가 완성되었다면 636년 선덕왕 6년 옥문지 사건을 기술할때 궁궐 서쪽 옥문지라고 기록하지 않고, 삼국유사처럼 영묘사 옥문지라고 기술하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일연은 중 양지가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영묘사 현판 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 중략.. )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 삼국유사 양지사석

구참공(瞿참公)이 어느날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서,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니 혜공은 술에 몹시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와 남문(南門)의 낭무(廊무)를 묶어 놓고 강사(剛司)에게 말했다.  "이 새끼를 3일 후에 풀도록 하라."  강사가 이상히 여겨 그 말에 좇으니,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善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서 그 탑을 불태웠지만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 삼국유사 이혜동진(혜숙,혜공)

아주 잼있는 기록이 영묘사의 화재 사건들이다. 영묘사는  끊임 없이 화재사건에 연루 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상 첫번째 화재 사건은 

문무왕 2년(662) 영묘사에 불이 났다. - 삼국사기 문무왕 2년

하지만, 삼국유사는 이동혜진(혜공)의 이적을 빌어서 지귀심화(지귀요탑)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 당시에도 영묘사에 화재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해서도 635년에 영묘사를 짓기시작, 완성단계에 이른 얼마 지나지 않아 덕만이 영묘사를 찾아 갔을때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충한 진평왕시기 짓기 시작한 영묘사가 지귀심화에 일정정도 불에 타서 중건(중창)에 가까이 635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을 개연성도 있다. 

지금까지 선덕여왕 덕만의 행적중 <지기삼사>와 <지귀심화> 등 관련이 많은 영묘사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보았다.  사실 이글을 쓰는 목적은 선덕여왕 즉 덕만이 <성조황고>라는 말을 왜 들었어야 하며, 삼국사기에서 덕만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천명은 동생이라는 기록을 분석하기 위해서 이다. 천명은 김춘추를 603년에 낳았다. 그렇다면 천명은 최소한 589~590년 이전에 태어 났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덕만이 어머니가 같은 언니라면 천명과 같은 나이이거나 그 이전에 출생해야 한다. 덕만이 588년 생이라고 한다면 덕만이 왕위를 잇는 632년에는 45살이 된다. 덕만이 죽는 647년에는 60살의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글에서 지귀심화(지귀요탑)은 세계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자연발화(SHC)인 미스터리 자연현상이라고 기술 했다. 그러니 <대지도론>에 나온 <술파가>가 유사하고 같은 여왕이기 때문에 <수이전>전하고 <대동운부군옥>이 채록하여 선덕여왕에 투영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역으로 선덕여왕때 혜공의 사건과 지귀심화 사건을 종합해 본다면? 


어쩌면 영묘사 지귀심화 화재사건은 이전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기록한 선덕여왕 당시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한것이 아니고,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것처럼, 사찰이 하루이틀에 뚝닥하고 만들어지지 않는 기간을 생각할때 여왕시기가 아닌 공주시절부터 영묘사가 한참 건설중 중요건물인 대웅전의  낙성식을 참여하다 지귀의심화를 당하고, 혜공의 법력(?)으로 살아 남은 전각의 일부를 635년 이후에 완성해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면 젊은 지귀가 다 늙은 노파(45세이상)인 선덕여왕을 사모해서 상사병으로 자연발화를 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겠는가? 또한가지, 다 늙을 때가지 덕만이 솔로 였다는 것은 당시 신라 사회로 봤을때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 된다. 동생인 천명도 결혼해서 603년에 김춘추라는 사내를 낳는데 말이다. 물론, 덕만도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에 의하면 '음갈문왕'이란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글쓴이가 왜 시리즈로 덕만의 공주시절을 뒤적이고 있는지 최근 시리즈글을 읽었다면 감을 잡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전 3개의 송고된 기사를 읽어 볼것을 권한다. 어찌 되었던 다음편에서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을까 한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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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영웅전쟁 2009.07.24 1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편에 종지부라 ㅎㅎㅎ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 지나가다 2009.07.24 14: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 계산이 이상한 것 같네요

    "덕만이 588년 생이라고 한다면 덕만이 왕위를 잇는 632년에는 55살이 된다. 덕만이 죽는 647년에는 70살의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3. 계산 2009.07.24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88년생 632년 왕위계승 45세 647년 서거 60세

  4. kmk8933 2009.07.26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넘 훌륭합니다!!! 새로운 역사를 배운듯...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가르쳐 주세요~~
    열심히 볼께요.

  5. BlogIcon bottleless dispensers 2011.12.19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이 여기에서 발생했습니다 큰 페이지입니다. 공유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아주 인상적 페이지입니다. 굿 샷 ...

  6. BlogIcon pmp training 2011.12.19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정말 아주 좋은 기사, 내가 그것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웁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7.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불당 사건으로 세종은 후일 “늙어서 망년이 들었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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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9. BlogIcon visit website 2012.07.14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는 삼국사기의 선덕왕 궁궐 서쪽 옥문지 사건을 옥문지는 영묘사에 있다하

  10. BlogIcon food storage supplies idaho 2012.11.01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이종욱이.. 왜 이리 허점 많은 설을 유포하는지 모르겠어요..님이나 이종욱처럼

  11. BlogIcon invisible fence collar settings 2012.11.05 1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었던 상식을 상식이 아님을 증명하였고, 마지막으로 덕만은 왕위를 이을때

  12. BlogIcon hurricane survival kit nyc 2012.12.10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아무리 미국이 광우병내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유전적 결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광우병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축되기전에 소멸되었거나 도축과정에 은폐되거나 검역과정에 통과되어 전세계 식탁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3. BlogIcon great website examples 2012.12.22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던 상식을 상식이 아님을 증명하였고, 마지막으로 덕만은 왕위를 이을때 도대체 몇살

  14. BlogIcon mountain house #10 cans bulk 2012.12.31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글은 그 최종 종착역의 구부능선을 타는 덕만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영묘사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볼겁니다.

선덕여왕 덕만에 관한 기록들을 하나 접수하여 역사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씩 추적 탐사 검증하고 새로운 주장을 하는 포스팅 했습니다.

지금은 덕만 탐사의 종착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또는 추측하고 있었던 상식을 상식이 아님을 증명하였고, 마지막으로 덕만은 왕위를 이을때 도대체 몇살이였는가? 할머니 였다는데 정말 할머니 였을때 왕위를 이은것인가?를 찾아 갈겁니다. 이글은 그 최종 종착역의 구부능선을 타는 덕만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영묘사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볼겁니다.
  

(c) mbc 사극 선덕여왕



선덕왕 4년(635)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4년

선덕왕 5년 636년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 말하였다. - 삼국사기

여름 5월에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사졸들을 쉬게 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군사를 거느리고 엄습해 와서 이를 쳐서 무찔렀다. 우소는 큰 돌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막아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혔다 - 삼국사기 백제 무왕

문무왕 2년(662) 영묘사에 불이 났다. - 삼국사기 문무왕 2년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2,000명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賊兵)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百濟)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선덕왕 궁궐 서쪽 옥문지 사건을 옥문지는 영묘사에 있다하고 개구리가 출연한 때는 여름 5월이 아닌 겨울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개구리 두꺼비가 여름에 우는 거는 일상적인 일이 아닌가? 겨울에 몇일 동안 못에 나와서 우는 것이 특이하니 이 사실을 덕만(선덕왕)에게 보고했다는 것이 합리적이다.


넷은 용궁(龍宮)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甲午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善德王 을미년乙未年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 삼국유사 아도기리 중

선덕왕 갑오년이면 634년이고, 을미년은 635년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635년 선덕왕 4년 영묘사 공사가 끝났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본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무슨 소리 선덕왕 2년에 분황사 공사를 시작하고, 영묘사는 635년에 공사를 시작했다라고 삼국사기를 반박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 635년 선덕여왕 4년에 영묘사가 완성되었다면 636년 선덕왕 6년 옥문지 사건을 기술할때 궁궐 서쪽 옥문지라고 기록하지 않고, 삼국유사처럼 영묘사 옥문지라고 기술하였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일연은 중 양지가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영묘사 현판 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 중략.. )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 삼국유사 양지사석

구참공(瞿참公)이 어느날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서,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니 혜공은 술에 몹시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와 남문(南門)의 낭무(廊무)를 묶어 놓고 강사(剛司)에게 말했다.  "이 새끼를 3일 후에 풀도록 하라."  강사가 이상히 여겨 그 말에 좇으니,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善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서 그 탑을 불태웠지만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 삼국유사 이혜동진(혜숙,혜공)

아주 잼있는 기록이 영묘사의 화재 사건들이다. 영묘사는  끊임 없이 화재사건에 연루 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기록상 첫번째 화재 사건은 

문무왕 2년(662) 영묘사에 불이 났다. - 삼국사기 문무왕 2년

하지만, 삼국유사는 이동혜진(혜공)의 이적을 빌어서 지귀심화(지귀요탑)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 당시에도 영묘사에 화재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해서도 635년에 영묘사를 짓기시작, 완성단계에 이른 얼마 지나지 않아 덕만이 영묘사를 찾아 갔을때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절충한 진평왕시기 짓기 시작한 영묘사가 지귀심화에 일정정도 불에 타서 중건(중창)에 가까이 635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을 개연성도 있다. 

지금까지 선덕여왕 덕만의 행적중 <지기삼사>와 <지귀심화> 등 관련이 많은 영묘사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보았다.  사실 이글을 쓰는 목적은 선덕여왕 즉 덕만이 <성조황고>라는 말을 왜 들었어야 하며, 삼국사기에서 덕만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천명은 동생이라는 기록을 분석하기 위해서 이다. 천명은 김춘추를 603년에 낳았다. 그렇다면 천명은 최소한 589~590년 이전에 태어 났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덕만이 어머니가 같은 언니라면 천명과 같은 나이이거나 그 이전에 출생해야 한다. 덕만이 588년 생이라고 한다면 덕만이 왕위를 잇는 632년에는 45살이 된다. 덕만이 죽는 647년에는 60살의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글에서 지귀심화(지귀요탑)은 세계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자연발화(SHC)인 미스터리 자연현상이라고 기술 했다. 그러니 <대지도론>에 나온 <술파가>가 유사하고 같은 여왕이기 때문에 <수이전>전하고 <대동운부군옥>이 채록하여 선덕여왕에 투영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역으로 선덕여왕때 혜공의 사건과 지귀심화 사건을 종합해 본다면? 


어쩌면 영묘사 지귀심화 화재사건은 이전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기록한 선덕여왕 당시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한것이 아니고,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것처럼, 사찰이 하루이틀에 뚝닥하고 만들어지지 않는 기간을 생각할때 여왕시기가 아닌 공주시절부터 영묘사가 한참 건설중 중요건물인 대웅전의  낙성식을 참여하다 지귀의심화를 당하고, 혜공의 법력(?)으로 살아 남은 전각의 일부를 635년 이후에 완성해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면 젊은 지귀가 다 늙은 노파(45세이상)인 선덕여왕을 사모해서 상사병으로 자연발화를 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겠는가? 또한가지, 다 늙을 때가지 덕만이 솔로 였다는 것은 당시 신라 사회로 봤을때 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 된다. 동생인 천명도 결혼해서 603년에 김춘추라는 사내를 낳는데 말이다. 물론, 덕만도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에 의하면 '음갈문왕'이란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글쓴이가 왜 시리즈로 덕만의 공주시절을 뒤적이고 있는지 최근 시리즈글을 읽었다면 감을 잡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전 3개의 송고된 기사를 읽어 볼것을 권한다. 어찌 되었던 다음편에서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을까 한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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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영웅전쟁 2009.07.24 1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편에 종지부라 ㅎㅎㅎ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 지나가다 2009.07.24 14: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 계산이 이상한 것 같네요

    "덕만이 588년 생이라고 한다면 덕만이 왕위를 잇는 632년에는 55살이 된다. 덕만이 죽는 647년에는 70살의 천수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3. 계산 2009.07.24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88년생 632년 왕위계승 45세 647년 서거 60세

  4. kmk8933 2009.07.26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넘 훌륭합니다!!! 새로운 역사를 배운듯...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가르쳐 주세요~~
    열심히 볼께요.

  5. BlogIcon bottleless dispensers 2011.12.19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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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logIcon pmp training 2011.12.19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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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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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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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BlogIcon visit website 2012.07.14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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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BlogIcon food storage supplies idaho 2012.11.01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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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BlogIcon invisible fence collar settings 2012.11.05 1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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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BlogIcon hurricane survival kit nyc 2012.12.10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아무리 미국이 광우병내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유전적 결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광우병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축되기전에 소멸되었거나 도축과정에 은폐되거나 검역과정에 통과되어 전세계 식탁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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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BlogIcon mountain house #10 cans bulk 2012.12.31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글은 그 최종 종착역의 구부능선을 타는 덕만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영묘사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볼겁니다.


우리는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 역사고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그러니 역사를 왜곡해도 드라마니 용
납하자고 한다.

그것이 정통사극을 지향하던, 환타지 사극을 지향하던 상관없다고 한다. 백번 양보해서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자. 사실 글쓴이도 드라마를 드라마로 본다. 다만, 드라마나 원전인 소설
 내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시높시스나 극중 흐름을 저해하는 요소를 보면 왜 그럴까한다.

그럼 역사는 어떠할까?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이니 당연히 승자의 역사로 왜곡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드라마가 왜곡한들 역사만 하겠냐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역사를 읽다보면 기본적(사건일시 당사자 나이 등) 인 것은 왜곡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서를 만들 당시 사료의 부족을 느끼는 경우와 사료를 취사선택에 채택되는가? 아닌가? 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역사에 기록하지 않거나 하는 수를 동원하기는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한 상식중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우리가 대표적으로 잘 알고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와 문희에 관한 이야기 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관련 원글을 인용하지는 않겠다.


보희가 오줌발 꿈을 꾸고, 문희가 꿈을 산다. 그리고 문희는 춘추와 결혼하고, 왕비로 등극한다. 문희로서는 언니 보희의 꿈을 산 대가로 왕비를 얻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로또 대박을 이르킨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꿈을 사고파는 데 주저하거나 꿈을 산 대가로 로또나 복권을 사고, 대리 소개팅을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꿈에 대한 <문희증후군>이지 않을까 한다.

유신이 김춘추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작을 한다. 그리고 처음 맞 누이인 보희를 엮어 주려고 했지만 보희는 때마침 아퍼서 춘추와 관계를 할 수 없었다. 때마침 아퍼서 관계를 할 수 없는 아픔이라면 츠자들과 결혼한 남자는 츠자가 아픈 원인을 캐치했을 것이다. (요건 다른 식으로 포스팅 할까 한다)

그래서 대타인 문희가 춘추와 관계를 하였다. 하지만 사단이 일어 났다. 춘추는 임신한 문희를 자신의 처로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즘 처럼 성이 개방화된 사회에서도 여자를 임신 시켜놓고,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파렴치한 같은 행동을 김춘추는 한것이다. .당시 많은 처/첩을 거느린 신라 사회에서 문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 신라사회로 봤을땐 김춘추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공작의 달인인 김유신은 경주 한복판에 장작더미를 올려 놓고 문희를 죽이려는 시늉을 한다. 이는 김춘추에게 협박하기 위한 것이다. 남산에놀이를 하려가던 선덕여왕이 이 광경을 보고, 말리며, 김춘추에게 문희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래서 문희의 성공시대와 김유신가의 성공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략, 간략하게 요약하면 문희의 꿈이 미치는 효과를 이야기 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상식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살펴보자. 역사를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잘못된 상식을 전파하는 첨병으로 할동하고 있다. 그러니 잘못된 상식이 고착화 되어 버린다. 그리고 잘못된 상식이 역사가 된다. 소설 삼국지를 읽고 그 것이 중국 삼국사이에 진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희 사건에서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문희, 보희,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 그리고 사건 결과로 잉태된 문희 뱃속의 김법민(문무)이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선덕여왕이 문희와 김춘추를 엮어 주었다는 말이 상식이 되고 정설이 되고 사실화 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잘못된 상식이고 잘못된 역사지식이다.

그럼 얼마나 잘못된 상식인지 문희의 뱃속의 김법민으로 부터 추적을 시작해 보자.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그 언니[姉]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루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메게 하였다. 그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메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 - 삼국사기 문무왕 원년

삼국사기는 "춘추가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 즉 문무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연선사는 "웃기지 마라, 기뻐하며 혼인을 청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신한 문희를 김춘추가 살살 피하다. 선덕여왕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했다"라고 까발리고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참으로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 삼국유사

여기서 김법민의 태어난 때를 알 수 있는 힌트가 나온다. 선덕여왕(632~647년) 재위시절이다. 그렇다면 김법민(문무)는 왕위에 오른 661년에 선덕여왕 초년에 태어났다면 30살이고, 선덕여왕 말년에 태어났다면 14살이 된다.

하지만, 위사실로는 법민의 나이를 유추할 수 가 없다. 그래서 김춘추의 자식중 김법민의 바로 첫번째 동생인 김인문의 기록을 살펴보자. 김인문의 출생을 알 수 있는 기사가 나온다.

"김인문(金仁問)은 자(字)는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유가(儒家)의 책을 많이 읽었고, 겸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의 책도 읽었다. 또한 예서(隷書)와 활쏘기·말타기·향악(鄕樂)[주석300]을 잘 하였는데, 행동의 법도가 수수하고 세련되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

김법민의 아우인 "김인문은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인문은 629년생이 된다. 김인문이 김법민과 터울이 없는 연년생이라고 해도 김법민은 628년이전 출생하여야 한다. 물론, 김인문이 늦은 629년생이고, 법민이 629년 정월생이라면 같은 나이가 될 수 있다. 내 친구도 11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자식들을 둔 사람도 있다.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처럼 천명과 덕만이 쌍둥이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김법민은 629년 이전 생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종합해보면 장작더미 위에 놓인 김법민, 문희 모자를 살려준 사람은 선덕여왕이 아닌 공주 덕만이 될 수 밖에 없다. 선덕(덕만)은 632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629년은 진평왕 51년에 해당한다. 

글쓴이는 이전 기사에서 덕만이 모란그림과 모란씨를 언제 받았을까를 추적보도 했다. 결론은 627년 11월이라는 기사를 송고 했지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특종 보도를 했지만 무관심 속에 뭍혀 버린 것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참조 하시길 바란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하는 동안에 이뤄진 것이 아닌 공주시절 남산에 노닐러 가는 것을 캐치한 김유신의 고도의 작전이였음을 알 수 있다.  

628년이전
장작더미 퍼포먼스 사건이 있었다면 김유신(595년생)은 34살이전이고, 김춘추(603년생)는 26살이전 때 일이다. 사건 당시 보희와 문희는 김유신과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아주 어린 결혼적령기(13~16세)에 접어든 동생들이 되는 것이다.  

왜 김유신은 진평왕이 움직일때 작전을 구사하지 않고, 덕만이 움직일때 작전을 구사했을까?

실제 진평왕 말년에 신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덕만이였다는 것을 <모란씨 서되> 사건과 <김춘추/문희 불쇼사건>으로 알 수 있다.  그러하니 덕만이 별다른 장애없이(반란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진평왕의 뒤를 이어 김서현
가문과 김용춘가문의 도움으로 632년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무던히 우리들에게 선덕여왕이 문희와 법민을 살려 주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그들의 말에 쇄뇌되어 있었다. 그리고 글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 유포하고 있다. 하지만 조그만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으로 치부한 역사가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파천황적인 주장을 하는 책이 등장했는데, 그 책이 진위논쟁에 휩싸인 필사본(?) 화랑세기이다. 화랑세기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에 오르니 보령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인 문희(文姬)를 화군(花君)으로 삼아 장자인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중략..)
유신은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하였다. 공은 이에 …하여 구하였다.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 화랑세기 17대 풍월주 춘추

화랑세기는 춘추가 24세전후인 626년 전후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화랑세기의 정교함에 글쓴이는 치를 떠는 것이다. 너무 정교하고, 완벽해서 오히려 위서의 증거로 사용될 정도이다. 조작된 아리바이는 쉽게 들통이 나지 않는다. 너무나 완벽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고 있지 않는가?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700년 초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를 보고 나서 이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화랑세기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4~500년전에 나온책인데 되도 불구하고 오히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후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고 섞어서 만든 책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글쓴이만 받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화랑세기는 김유신 감독의 제일 선발 캐스팅 보희는 대타인 문희의 대박 성공에 배가 아파 결혼을 하지 않고, 후에 김춘추의 정비가 아닌 후비가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도 가끔 뜻하지 않게 캐스팅을 보이콧트하고, 후발 대타로 나온 배우들이 대박 스타로 발돋음하는 것을 종종 보는 수가 있다.  이처럼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앞으로 김유신/김춘추/문희/보희/덕만 <불쑈사건>을 들먹이며, 선덕여왕이 말이야 블라 블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된다. "웃기 시네, 내가 알아보니 공주시절에 했더라"

PS. 여전히 재미가 없는 글인가 보다. 조회수에 비해서 추천수가 없는 것을 보면 글쓰는데 한계를 느낄때가 있다. 이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글쓴이가 투자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장담하건데 하루 이틀 생각으로 나올수 있는 글은 아니다.

이전에 포스팅한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글이 뒤늦게 베스트에 올랐다. 글은 06시에 포스팅을 했는데 저녁에 베스트에 오르다니 다음의 발빠른(?) 조치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건가? 어찌 되었던 베스트까지 보내 주었으니 말이다. 안보내 준것보다는 ㄳ해야 할것 같다. 문화.연예 면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여러명이 있는 것 같다. 글 선택 선호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다음에 베스트 안보내주지는 않겠지요? 한번찍히면 무서운데...ㅠ.ㅠ.

즐겁게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가시기전 추천해주실거죠? (추천은 숫자가 써진 viewon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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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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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휘나리 2009.07.24 1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동입니다.
    잘읽었구여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3. 2009.07.24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정보 공부 잘하고 갑니다 ^^

  4. lol 2009.07.24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어요 ㅠㅜ

  5. 네리야 2009.07.24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가...삼국사기는 사기를 잘 쳐서 사기고
    삼국유사는...유사품이라 삼국유사라고
    우기더군요ㅋㅋ

    또 화랑세기는...세기의 로맨스책이라고
    우기더만ㅋㅋ....포스팅 잘 봤어요ㅋㅋ

  6. 김성중 2009.07.24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밋게 보고갑니다.
    근데요... 추천은 어디서 해요??

  7. 수고하셨습니다 2009.07.24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

  8. 플로라 2009.07.24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 건 좋은데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아무래도 실제 역사랑 너무 틀리더라구요. 덕분에 다시 한번 그 때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9. 재밌게 2009.07.24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잘봤습니다~
    맞춤법만 쵸큼 주의하신다면 더 완벽한 글이 될듯^^

    • BlogIcon 갓쉰동 2009.07.24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 언제나 걸리는 문제지요.. 문서편집기에서 작성하지 않고, 바로 블로그에서 글을 쓰는 관계로 ..

      글을 쓸때는 그냥 막 날려서 쓰거든요..

  10. 2009.07.24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기아만세 2009.07.24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이네요^^
    역사 드라마를 보는 시각을 좀 더 넓힌 것 같아 좋네요^^
    다음에 또 유익한 글 부탁드려요ㅎㅎ

  12. 물음표 2009.07.24 1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쉽게 역사 공부 하고 갑니다.

  13. 나그네여 2009.07.24 1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공부 의미있게 하고 갑니다. 수고에 감사 드리면 당신한테 항상 행운이~~^^*

  14. 흠.. 2009.07.24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선덕여왕 공주시절 얘기로 알고 있었는데요..
    예전에 언젠가 선덕여왕을 복길어머님이 하셨던 드라마에서는..
    여왕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그 영향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에 대해 저도 해박하진 않지만 선덕여왕 즉위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5. ㅋㅋㅋ 2009.07.27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쇼사건... 말이 재미있네요 ㅋㅋㅋ

  16. 한숨뿐 2009.07.27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암만 비공식 개인블로그라고 해도.......
    글 좀 제대로 적으시면 안될까요...
    뭐라고 해야하나 막.. 전체적으로 좀.. 글이..

  17. 역사맨 2009.07.28 0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정말 흥미진진하네여
    분석이 너무나도 완벽한데다가
    화랑세기와도 딱딱 맞아떨어지는..ㅋ
    저도 화랑세기는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계속 화이팅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8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화랑세기가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개된 화랑세기 말공..

      필사본 화랑세기는 너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오히려 의심하고 잇는중.. 정교함이 너무 지나쳐요..

      이설이 많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교묘한 짬뽕스타일이라고 할까요.. ㅋㅋ

  18. 잘 봤습니다 2009.09.09 0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꼼꼼하게 비교해가며 살피셨네요^^ 공주시절 이야기라는 것은 저도 오늘 이글을 보고야 압니다.
    그런데.... 간혹 님께서 기사 중에 쓰시는 농담이.. 그닥 재미가 없습니다..ㅎㅎ;;재밌으라고 쓰신 것 같은데 재미없는 뭐 그런 느낌?;; 차라리 장난스런 말이나 단어 빼버리시고 진지하게 글을 이어나가시는 게 더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추천 하나 올리고 갑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9.09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 너무 딱딱할 것 같아서요..사실 알고 계시겠지만. 농담속에 뼈가 있는 거지요.. 잘보셨다니.. 다행입니당. ^___^

  19. 잘 읽었어요 2009.10.22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어요 자주와서 읽습니다 ,
    역사에 대해 열심히 글 쓰신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식을 너무 문장마다 쏟으시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아시는 게 많고 또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주려는 마음때문이시겠죠 ^^
    흥미로운 소재만큼이나 글도 흥미롭게 써나가 주신다면 정말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곳곳에 농담을 넣는게 아니라 뭐랄까 글쓰면서 생각나는대로 전개하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전개 있잖아요 ^^

    • BlogIcon 갓쉰동 2009.10.23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락하게 쓰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되더군요.. 안그럼 글 수가 많아지거든요..

      농담속에 뼈를 좀 넣은 편입니다. 행간을 읽으면..

      좀더 생각해보겠습니당. 흥미로운 전개라.. ㅋㅋ ^__^

  20. BlogIcon montreal florist 2009.12.11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도 재밌고 역사책도 나름 또 재밌네여

  21. BlogIcon balloons 2011.12.19 0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대한 블로그! 나는 중요한 정보의 제비를 포함하기 때문에, 이 포스트를 저를 위해 아주 유용한 찾아내게 행복하다. 나는 항상 나가 당신에서 포스트를 찾아낸 이 것 및 질 내용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아주 도움이 되는 유용한 정보이다!


우리는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 역사고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그러니 역사를 왜곡해도 드라마니 용
납하자고 한다.

그것이 정통사극을 지향하던, 환타지 사극을 지향하던 상관없다고 한다. 백번 양보해서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자. 사실 글쓴이도 드라마를 드라마로 본다. 다만, 드라마나 원전인 소설
 내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시높시스나 극중 흐름을 저해하는 요소를 보면 왜 그럴까한다.

그럼 역사는 어떠할까?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이니 당연히 승자의 역사로 왜곡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드라마가 왜곡한들 역사만 하겠냐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역사를 읽다보면 기본적(사건일시 당사자 나이 등) 인 것은 왜곡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서를 만들 당시 사료의 부족을 느끼는 경우와 사료를 취사선택에 채택되는가? 아닌가? 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역사에 기록하지 않거나 하는 수를 동원하기는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한 상식중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우리가 대표적으로 잘 알고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와 문희에 관한 이야기 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관련 원글을 인용하지는 않겠다.


보희가 오줌발 꿈을 꾸고, 문희가 꿈을 산다. 그리고 문희는 춘추와 결혼하고, 왕비로 등극한다. 문희로서는 언니 보희의 꿈을 산 대가로 왕비를 얻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로또 대박을 이르킨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꿈을 사고파는 데 주저하거나 꿈을 산 대가로 로또나 복권을 사고, 대리 소개팅을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꿈에 대한 <문희증후군>이지 않을까 한다.

유신이 김춘추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작을 한다. 그리고 처음 맞 누이인 보희를 엮어 주려고 했지만 보희는 때마침 아퍼서 춘추와 관계를 할 수 없었다. 때마침 아퍼서 관계를 할 수 없는 아픔이라면 츠자들과 결혼한 남자는 츠자가 아픈 원인을 캐치했을 것이다. (요건 다른 식으로 포스팅 할까 한다)

그래서 대타인 문희가 춘추와 관계를 하였다. 하지만 사단이 일어 났다. 춘추는 임신한 문희를 자신의 처로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즘 처럼 성이 개방화된 사회에서도 여자를 임신 시켜놓고,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파렴치한 같은 행동을 김춘추는 한것이다. .당시 많은 처/첩을 거느린 신라 사회에서 문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 신라사회로 봤을땐 김춘추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공작의 달인인 김유신은 경주 한복판에 장작더미를 올려 놓고 문희를 죽이려는 시늉을 한다. 이는 김춘추에게 협박하기 위한 것이다. 남산에놀이를 하려가던 선덕여왕이 이 광경을 보고, 말리며, 김춘추에게 문희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래서 문희의 성공시대와 김유신가의 성공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략, 간략하게 요약하면 문희의 꿈이 미치는 효과를 이야기 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상식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살펴보자. 역사를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잘못된 상식을 전파하는 첨병으로 할동하고 있다. 그러니 잘못된 상식이 고착화 되어 버린다. 그리고 잘못된 상식이 역사가 된다. 소설 삼국지를 읽고 그 것이 중국 삼국사이에 진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희 사건에서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문희, 보희,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 그리고 사건 결과로 잉태된 문희 뱃속의 김법민(문무)이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선덕여왕이 문희와 김춘추를 엮어 주었다는 말이 상식이 되고 정설이 되고 사실화 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잘못된 상식이고 잘못된 역사지식이다.

그럼 얼마나 잘못된 상식인지 문희의 뱃속의 김법민으로 부터 추적을 시작해 보자.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그 언니[姉]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루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메게 하였다. 그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메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 - 삼국사기 문무왕 원년

삼국사기는 "춘추가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 즉 문무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연선사는 "웃기지 마라, 기뻐하며 혼인을 청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신한 문희를 김춘추가 살살 피하다. 선덕여왕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했다"라고 까발리고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참으로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 삼국유사

여기서 김법민의 태어난 때를 알 수 있는 힌트가 나온다. 선덕여왕(632~647년) 재위시절이다. 그렇다면 김법민(문무)는 왕위에 오른 661년에 선덕여왕 초년에 태어났다면 30살이고, 선덕여왕 말년에 태어났다면 14살이 된다.

하지만, 위사실로는 법민의 나이를 유추할 수 가 없다. 그래서 김춘추의 자식중 김법민의 바로 첫번째 동생인 김인문의 기록을 살펴보자. 김인문의 출생을 알 수 있는 기사가 나온다.

"김인문(金仁問)은 자(字)는 인수(仁壽)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유가(儒家)의 책을 많이 읽었고, 겸하여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의 책도 읽었다. 또한 예서(隷書)와 활쏘기·말타기·향악(鄕樂)[주석300]을 잘 하였는데, 행동의 법도가 수수하고 세련되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

김법민의 아우인 "김인문은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인문은 629년생이 된다. 김인문이 김법민과 터울이 없는 연년생이라고 해도 김법민은 628년이전 출생하여야 한다. 물론, 김인문이 늦은 629년생이고, 법민이 629년 정월생이라면 같은 나이가 될 수 있다. 내 친구도 11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자식들을 둔 사람도 있다.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처럼 천명과 덕만이 쌍둥이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김법민은 629년 이전 생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종합해보면 장작더미 위에 놓인 김법민, 문희 모자를 살려준 사람은 선덕여왕이 아닌 공주 덕만이 될 수 밖에 없다. 선덕(덕만)은 632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629년은 진평왕 51년에 해당한다. 

글쓴이는 이전 기사에서 덕만이 모란그림과 모란씨를 언제 받았을까를 추적보도 했다. 결론은 627년 11월이라는 기사를 송고 했지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특종 보도를 했지만 무관심 속에 뭍혀 버린 것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참조 하시길 바란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하는 동안에 이뤄진 것이 아닌 공주시절 남산에 노닐러 가는 것을 캐치한 김유신의 고도의 작전이였음을 알 수 있다.  

628년이전
장작더미 퍼포먼스 사건이 있었다면 김유신(595년생)은 34살이전이고, 김춘추(603년생)는 26살이전 때 일이다. 사건 당시 보희와 문희는 김유신과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아주 어린 결혼적령기(13~16세)에 접어든 동생들이 되는 것이다.  

왜 김유신은 진평왕이 움직일때 작전을 구사하지 않고, 덕만이 움직일때 작전을 구사했을까?

실제 진평왕 말년에 신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덕만이였다는 것을 <모란씨 서되> 사건과 <김춘추/문희 불쇼사건>으로 알 수 있다.  그러하니 덕만이 별다른 장애없이(반란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진평왕의 뒤를 이어 김서현
가문과 김용춘가문의 도움으로 632년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무던히 우리들에게 선덕여왕이 문희와 법민을 살려 주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그들의 말에 쇄뇌되어 있었다. 그리고 글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 유포하고 있다. 하지만 조그만 살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으로 치부한 역사가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파천황적인 주장을 하는 책이 등장했는데, 그 책이 진위논쟁에 휩싸인 필사본(?) 화랑세기이다. 화랑세기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에 오르니 보령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인 문희(文姬)를 화군(花君)으로 삼아 장자인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중략..)
유신은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하였다. 공은 이에 …하여 구하였다.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 화랑세기 17대 풍월주 춘추

화랑세기는 춘추가 24세전후인 626년 전후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화랑세기의 정교함에 글쓴이는 치를 떠는 것이다. 너무 정교하고, 완벽해서 오히려 위서의 증거로 사용될 정도이다. 조작된 아리바이는 쉽게 들통이 나지 않는다. 너무나 완벽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지고 있는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 들고 있지 않는가?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700년 초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를 보고 나서 이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처럼, 화랑세기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4~500년전에 나온책인데 되도 불구하고 오히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후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고 섞어서 만든 책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글쓴이만 받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화랑세기는 김유신 감독의 제일 선발 캐스팅 보희는 대타인 문희의 대박 성공에 배가 아파 결혼을 하지 않고, 후에 김춘추의 정비가 아닌 후비가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도 가끔 뜻하지 않게 캐스팅을 보이콧트하고, 후발 대타로 나온 배우들이 대박 스타로 발돋음하는 것을 종종 보는 수가 있다.  이처럼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앞으로 김유신/김춘추/문희/보희/덕만 <불쑈사건>을 들먹이며, 선덕여왕이 말이야 블라 블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된다. "웃기 시네, 내가 알아보니 공주시절에 했더라"

PS. 여전히 재미가 없는 글인가 보다. 조회수에 비해서 추천수가 없는 것을 보면 글쓰는데 한계를 느낄때가 있다. 이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글쓴이가 투자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장담하건데 하루 이틀 생각으로 나올수 있는 글은 아니다.

이전에 포스팅한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글이 뒤늦게 베스트에 올랐다. 글은 06시에 포스팅을 했는데 저녁에 베스트에 오르다니 다음의 발빠른(?) 조치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건가? 어찌 되었던 베스트까지 보내 주었으니 말이다. 안보내 준것보다는 ㄳ해야 할것 같다. 문화.연예 면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여러명이 있는 것 같다. 글 선택 선호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다음에 베스트 안보내주지는 않겠지요? 한번찍히면 무서운데...ㅠ.ㅠ.

즐겁게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가시기전 추천해주실거죠? (추천은 숫자가 써진 viewon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본 기사의 최근 기사가 따끈따끈하게 아래 발행되었습니다.  ^___^ 묻지말고 따지지 마시고 크~~릭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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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휘나리 2009.07.24 1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동입니다.
    잘읽었구여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3. 2009.07.24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정보 공부 잘하고 갑니다 ^^

  4. lol 2009.07.24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어요 ㅠㅜ

  5. 네리야 2009.07.24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가...삼국사기는 사기를 잘 쳐서 사기고
    삼국유사는...유사품이라 삼국유사라고
    우기더군요ㅋㅋ

    또 화랑세기는...세기의 로맨스책이라고
    우기더만ㅋㅋ....포스팅 잘 봤어요ㅋㅋ

  6. 김성중 2009.07.24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밋게 보고갑니다.
    근데요... 추천은 어디서 해요??

  7. 수고하셨습니다 2009.07.24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

  8. 플로라 2009.07.24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 건 좋은데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아무래도 실제 역사랑 너무 틀리더라구요. 덕분에 다시 한번 그 때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9. 재밌게 2009.07.24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잘봤습니다~
    맞춤법만 쵸큼 주의하신다면 더 완벽한 글이 될듯^^

    • BlogIcon 갓쉰동 2009.07.24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 언제나 걸리는 문제지요.. 문서편집기에서 작성하지 않고, 바로 블로그에서 글을 쓰는 관계로 ..

      글을 쓸때는 그냥 막 날려서 쓰거든요..

  10. 2009.07.24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기아만세 2009.07.24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이네요^^
    역사 드라마를 보는 시각을 좀 더 넓힌 것 같아 좋네요^^
    다음에 또 유익한 글 부탁드려요ㅎㅎ

  12. 물음표 2009.07.24 1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쉽게 역사 공부 하고 갑니다.

  13. 나그네여 2009.07.24 1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공부 의미있게 하고 갑니다. 수고에 감사 드리면 당신한테 항상 행운이~~^^*

  14. 흠.. 2009.07.24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선덕여왕 공주시절 얘기로 알고 있었는데요..
    예전에 언젠가 선덕여왕을 복길어머님이 하셨던 드라마에서는..
    여왕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그 영향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에 대해 저도 해박하진 않지만 선덕여왕 즉위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15. ㅋㅋㅋ 2009.07.27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쇼사건... 말이 재미있네요 ㅋㅋㅋ

  16. 한숨뿐 2009.07.27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암만 비공식 개인블로그라고 해도.......
    글 좀 제대로 적으시면 안될까요...
    뭐라고 해야하나 막.. 전체적으로 좀.. 글이..

  17. 역사맨 2009.07.28 0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정말 흥미진진하네여
    분석이 너무나도 완벽한데다가
    화랑세기와도 딱딱 맞아떨어지는..ㅋ
    저도 화랑세기는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계속 화이팅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8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화랑세기가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개된 화랑세기 말공..

      필사본 화랑세기는 너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오히려 의심하고 잇는중.. 정교함이 너무 지나쳐요..

      이설이 많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교묘한 짬뽕스타일이라고 할까요.. ㅋㅋ

  18. 잘 봤습니다 2009.09.09 0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꼼꼼하게 비교해가며 살피셨네요^^ 공주시절 이야기라는 것은 저도 오늘 이글을 보고야 압니다.
    그런데.... 간혹 님께서 기사 중에 쓰시는 농담이.. 그닥 재미가 없습니다..ㅎㅎ;;재밌으라고 쓰신 것 같은데 재미없는 뭐 그런 느낌?;; 차라리 장난스런 말이나 단어 빼버리시고 진지하게 글을 이어나가시는 게 더 반응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추천 하나 올리고 갑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9.09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 너무 딱딱할 것 같아서요..사실 알고 계시겠지만. 농담속에 뼈가 있는 거지요.. 잘보셨다니.. 다행입니당. ^___^

  19. 잘 읽었어요 2009.10.22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어요 자주와서 읽습니다 ,
    역사에 대해 열심히 글 쓰신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식을 너무 문장마다 쏟으시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아시는 게 많고 또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주려는 마음때문이시겠죠 ^^
    흥미로운 소재만큼이나 글도 흥미롭게 써나가 주신다면 정말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곳곳에 농담을 넣는게 아니라 뭐랄까 글쓰면서 생각나는대로 전개하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전개 있잖아요 ^^

    • BlogIcon 갓쉰동 2009.10.23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락하게 쓰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되더군요.. 안그럼 글 수가 많아지거든요..

      농담속에 뼈를 좀 넣은 편입니다. 행간을 읽으면..

      좀더 생각해보겠습니당. 흥미로운 전개라.. ㅋㅋ ^__^

  20. BlogIcon montreal florist 2009.12.11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도 재밌고 역사책도 나름 또 재밌네여

  21. BlogIcon balloons 2011.12.19 0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대한 블로그! 나는 중요한 정보의 제비를 포함하기 때문에, 이 포스트를 저를 위해 아주 유용한 찾아내게 행복하다. 나는 항상 나가 당신에서 포스트를 찾아낸 이 것 및 질 내용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아주 도움이 되는 유용한 정보이다!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다.

글쓴이는 [[역사이야기] - 사극으로 배우는 역사, 성골은 없다.] 에서 성골은 없고, 진골이 곧 성골이며, 왕족이라고 주장했다. 위글에 이어서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일명 <성골>,<진골> 있었다고 생각 하는 진평왕때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삼국사기> <설계두>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설계두(薛頭)<어느 책에는 [설(薛)을] 살(薩)자로 썼다.>도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런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 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면 만족하겠다.” - 삼국사기 열전 설계두 

최고위 귀족층인 6부 호진공 <설>씨 가문인 <설계두> 조차도 계급적 차별을 느끼고 당나라에 망명하고 있다. 이처럼 신라의 신분제도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있다.  당시 계급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설계두 조차도 <귀족>과 <골품>을 구별하기는 하지만 <성골>, <진골>을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설계두는 <골품>때문에 신라에서 상위 등급으로 오르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뼈속깊이 느끼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영호징 또한 골품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설계두는  무덕(武德) 4년 신사(진평왕43년: 621)에 몰래 바다 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646년 당나라 태종(이세민)이 고구려를 칠때 안시성 앞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군에 당군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죽었다. 이를 기화로 당군이 고구려군에 역전을 하고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몰살을 당하고 항복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그래서 당태종이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이르길 집을 짓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타거나, 관직에 등용되거나 하는 모든것에 신분적인 제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구분은 <4두품이하 평민>, <5두품>, <6두품>, <진골> 로 만 구분하고 있다.

<성골>이전 시기라고 믿고 있던 1대 <박혁거세>로 부터 28대 <진덕왕>시기 까지도 <왕자>나 <태자>도 관직에 나아가 전쟁을 수행하고 내정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골>과 <진골>을 구분할때.

신라 왕의 근친혼을 들어 <성골>은 왕족과 왕족간의 혼인 또는 왕과 왕의 형제와 결혼을 해야 성골을 유지하고 그렇지 않다면 김서현처럼 진골출신과 결혼을 하면 <진골>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구분법은 바로 <진평왕>을 보면 참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진평왕과 김춘추의 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증 -> 입종-> 진흥  -> 동륜 -> 진평

지증 - >입종 ->진흥 -> 금륜(진지왕)-> 용수 -> 춘추


진평/춘추 지증왕의 손자인 진흥왕계열이고 진평왕이나 춘추나 아버지는 왕위를 잇지 못했다. 둘다 왕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또한, 지증왕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로써 부계 때문에 <성골>,<진골>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의 절묘함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화랑세기는 왕위계승을 여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이또한, 김미추왕 이후에 적용되지 김미추 이전의 왕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화랑세기에도 성골/진골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진골만 드러날 뿐이다. 화랑세기를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드는 이유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껴가지 않고 절묘하게 이를 조화시킨다는데 있다. 오히려, 화랑세기가 의심스런 대목이 이런 절묘함이다.

화랑세기가 있고 400~500년 후 나타난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서로 보완하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다른 이설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삼국사기, 삼국유사 보다 400년 이전 화랑세기가 후대의 사서를 넘나들면서도 이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화랑세기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고 작성된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성골과 진골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온  가설이

<성골>인 <김춘추>가 <진골>인 금관가야 구형왕의 후손인 <김서현>의 자식 <문희>를 맞이하여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적자가 아닌 첩의 자식이나 노비의 후손이라면 모르지만 본인이 <성골>인데 단지 <부인>이 진골이기 때문에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지는 것이라면 <설계두>가 당나라로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어미>에 의해서 자식의 신분이 정해 정해지기는 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김씨계 첫왕인 13대 미추왕은 신라에 의해서 패망한 소문국의 공주와 결혼한 구도의 후손이다. 그런데도 미추는 성골이 된다. 김씨계의 선조인 김알지도 성골출신은 아니였고, 석탈해도 성골출신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이들 석씨왕들은 성골일까? 진골일까?  

<부인>을 맞이함에 따라서 본인의 신분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성스런 성골일 수 없는 것이다. 신분제약이 심한 조선에서 조차도 왕가의 씨는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수리>에서 난 <영조>가 그러했고, <철종>또한 그러했다. 일반 귀족이던 양반이던 자신의 대에는 계급적 차별이 없고 단지 후손에게 신분상의 제약이 있을 뿐이다. 본인이 <왕가>와 결혼하면 <왕가>로 편입되지 그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그 후손 또한 왕가의 후손일 뿐이다. 이를 맞이하는 부인에 의해서 올라갈수는 있지만 내려가는 예가 없는 것이다. 어미 신분에 따라서 신분이 결정되는 것은 후손들의 문제일 뿐이다. 화랑세기는 왕족에서 남여 구분없이 결혼상대자는 높은 지위쪽으로 레벨상승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또다른 가설을 내세우는 경우는 26대 진지왕의 폐위를어 진지왕의 후손들은 진골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또한,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18대 실성왕은 고구려를 등에 업은 눌지로 대변되는 '국인'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그러나 실성왕의 딸과 결혼한 19대 눌지왕은 성골일까? 진골일까? 그의 후손으로 왕이 된, 20대 자비와 21대 소지왕은 성골일까? 진골일까?

설령 <성골>, <진골>을 구분할 수 있다면 김춘추는 <성골>이고, 그의 아들들인 <문무:법민>,<인문> 등과 그의 자손 부터 <진골>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김춘추>부터 <진골>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왕족>과 결혼하면 <왕족>이 되는 수는 있지만 반대로 <진골>이 <성골>부인을 맞이하면 <성골>이 된다는 이야기 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 놓는 사람은 없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진골/성골은 단지 시대를 구분하는 말이상 이하도 아니다. 진골이 성골이고 성골이 진골인 것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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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미케미케 2009.07.1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지럽네요.. 그렇다면 애초에 성골과 진골이란 단어의 사용은 왜 이루어진 것인가요?
    통일신라이후에 진골이란 소린가요? 예전에 국사선생님마다 설명이 달라서... 정말로 이건 논쟁거리가 될것같네요 누구하나 확실한게 없으니 ㅎㅎ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선덕여왕 고증포스트가 많은것 같은데 구독도하고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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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갓쉰동 2009.07.10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첫번째 링크를 따라 가보심이.. 성골은 없다..

      국사 선생님마다 설명이 다르기 때문에 성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저의 핵심 주장입니다.
      제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거지요.. ^___^

      미케님의 글 자주 뵌것 같군요.. ^___^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2. BlogIcon thezle 2009.07.10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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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4. BlogIcon balloons 2011.12.19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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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logIcon 천사 2012.01.03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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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BlogIcon 가브리엘라 2012.04.03 2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10. BlogIcon 알렉 산드라 2012.04.05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먹었습니다.

  11. BlogIcon 제비꽃 2012.05.08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12. BlogIcon 테일러 2012.05.11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을 살 여유가 없습니다.

  13.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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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역사이야기] - 사극으로 배우는 역사, 성골은 없다.] 에서 성골은 없고, 진골이 곧 성골이며, 왕족이라고 주장했다. 위글에 이어서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일명 <성골>,<진골> 있었다고 생각 하는 진평왕때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삼국사기> <설계두>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설계두(薛頭)<어느 책에는 [설(薛)을] 살(薩)자로 썼다.>도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런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 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면 만족하겠다.” - 삼국사기 열전 설계두 

최고위 귀족층인 6부 호진공 <설>씨 가문인 <설계두> 조차도 계급적 차별을 느끼고 당나라에 망명하고 있다. 이처럼 신라의 신분제도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있다.  당시 계급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설계두 조차도 <귀족>과 <골품>을 구별하기는 하지만 <성골>, <진골>을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설계두는 <골품>때문에 신라에서 상위 등급으로 오르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뼈속깊이 느끼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영호징 또한 골품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설계두는  무덕(武德) 4년 신사(진평왕43년: 621)에 몰래 바다 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646년 당나라 태종(이세민)이 고구려를 칠때 안시성 앞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군에 당군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죽었다. 이를 기화로 당군이 고구려군에 역전을 하고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몰살을 당하고 항복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그래서 당태종이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이르길 집을 짓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타거나, 관직에 등용되거나 하는 모든것에 신분적인 제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구분은 <4두품이하 평민>, <5두품>, <6두품>, <진골> 로 만 구분하고 있다.

<성골>이전 시기라고 믿고 있던 1대 <박혁거세>로 부터 28대 <진덕왕>시기 까지도 <왕자>나 <태자>도 관직에 나아가 전쟁을 수행하고 내정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골>과 <진골>을 구분할때.

신라 왕의 근친혼을 들어 <성골>은 왕족과 왕족간의 혼인 또는 왕과 왕의 형제와 결혼을 해야 성골을 유지하고 그렇지 않다면 김서현처럼 진골출신과 결혼을 하면 <진골>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구분법은 바로 <진평왕>을 보면 참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진평왕과 김춘추의 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증 -> 입종-> 진흥  -> 동륜 -> 진평

지증 - >입종 ->진흥 -> 금륜(진지왕)-> 용수 -> 춘추


진평/춘추 지증왕의 손자인 진흥왕계열이고 진평왕이나 춘추나 아버지는 왕위를 잇지 못했다. 둘다 왕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또한, 지증왕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로써 부계 때문에 <성골>,<진골>을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의 절묘함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화랑세기는 왕위계승을 여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이또한, 김미추왕 이후에 적용되지 김미추 이전의 왕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화랑세기에도 성골/진골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진골만 드러날 뿐이다. 화랑세기를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드는 이유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껴가지 않고 절묘하게 이를 조화시킨다는데 있다. 오히려, 화랑세기가 의심스런 대목이 이런 절묘함이다.

화랑세기가 있고 400~500년 후 나타난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서로 보완하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다른 이설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삼국사기, 삼국유사 보다 400년 이전 화랑세기가 후대의 사서를 넘나들면서도 이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화랑세기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고 작성된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성골과 진골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온  가설이

<성골>인 <김춘추>가 <진골>인 금관가야 구형왕의 후손인 <김서현>의 자식 <문희>를 맞이하여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적자가 아닌 첩의 자식이나 노비의 후손이라면 모르지만 본인이 <성골>인데 단지 <부인>이 진골이기 때문에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지는 것이라면 <설계두>가 당나라로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어미>에 의해서 자식의 신분이 정해 정해지기는 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김씨계 첫왕인 13대 미추왕은 신라에 의해서 패망한 소문국의 공주와 결혼한 구도의 후손이다. 그런데도 미추는 성골이 된다. 김씨계의 선조인 김알지도 성골출신은 아니였고, 석탈해도 성골출신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이들 석씨왕들은 성골일까? 진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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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성골>, <진골>을 구분할 수 있다면 김춘추는 <성골>이고, 그의 아들들인 <문무:법민>,<인문> 등과 그의 자손 부터 <진골>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김춘추>부터 <진골>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왕족>과 결혼하면 <왕족>이 되는 수는 있지만 반대로 <진골>이 <성골>부인을 맞이하면 <성골>이 된다는 이야기 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 놓는 사람은 없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진골/성골은 단지 시대를 구분하는 말이상 이하도 아니다. 진골이 성골이고 성골이 진골인 것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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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미케미케 2009.07.1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지럽네요.. 그렇다면 애초에 성골과 진골이란 단어의 사용은 왜 이루어진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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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 선생님마다 설명이 다르기 때문에 성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저의 핵심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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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thezle 2009.07.10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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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7.10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BlogIcon balloons 2011.12.19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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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logIcon 천사 2012.01.03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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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BlogIcon 고명진 2012.01.07 0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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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BlogIcon 제비꽃 2012.05.08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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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BlogIcon 테일러 2012.05.11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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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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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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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BlogIcon great websites 2009 2012.11.14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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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BlogIcon best emergency food kit 2012.11.21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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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BlogIcon katadyn vario water filter 2012.12.19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랑이전 원화제도가 있을때에는 나이어린 소녀가 아닌 농익은 성인 여성을 원화로 세웠을 개연성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창작한 위서가 된다.

  18. BlogIcon flexpetz review 2012.12.27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를 기화로 당군이 고구려군에 역전을 하고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몰살을 당하고 항복에 이르게 한 인물이다. 그래서 당태종이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 BlogIcon medical accessories of australia milton 2013.01.05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방지에 사사를 받은 강채윤은 이방지의 적통제자로 출상술과 북방의 무예와 투박술까지 고루 익힌 숨은 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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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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