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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양반을 죽이려는 업복이(공형진)와 대길(장혁)의 첫사랑 언년이(이다해)에 대한 애증과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내고 사라진 언년이의 오라버니 큰놈이(조재완)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노비에 대한 과도한 증오로 인해서 추노꾼이 되었다.

 
반면에 업복이(공형진)는 노비로서 삶에서 벗어나려고, 청나라로 도망을 치지만 추노군 대길에게 잡히고 만다.

그래서 업복이는 양반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어서 만민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뉴패러다임를 가지고 있던 만민당(?)으로 불릴 수 있는 당에 가입한 후 이들로 부터 받은 화승총을 받아 제일 먼저 추노꾼 대길의 마빡을 골로 보내버리는 계획을 세우고 저격을 시도 하지만 실패하고 많다.

송태하(오지호)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명분가의 양반으로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나서지만, 소현세자가 말리는 바람에 청까지 소현세자를 보좌하는 호의무사 역할을 하고, 청으로부터 돌아온 이후에는 1645년 4월 소현세자의 죽음과 함께 자신은 노비로 전락한다.

소현세자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647년 5월 장자 12살의 석철과 차남 8살인 석린과 4살인 막내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하지만, 장남인 석철은 1648년 9월 당시 장독이 있던 제주도에서 죽고, 둘째인 석린도 1648년 12월 알수 없는 질병에 의해서 죽는다. 그래서 막내인 어린 아들 석견만 남는다.

송태하는 소현의 막내인 이석견을 보호하라는 소현세자의 지지자들의 모임의 부탁을 받고 탈출을 감행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날 탈출하려던 공노들을 도와 같이 탈출한다. 일반적으로 중요도에 따라서 소현세자의 아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탈출시 노비들과 같이 길을 나선것이다. 일단 훈련청에서 벗어나면 길을 달리 해야 하지만 탈출도 같이한다. 대길과 갈대숲 결투를 벌린다.


이과정에서 천지호(성동일)파의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니다. 더나가 송태하는 빨리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을 호위하기 위해서 청주로 길을 나서야 하지만, 화살을 맞은 놈임에도 불구하고 강간을 당하려는 언년이를 구하고, 절에서도 언년이와 같이 길을 떠난다.

이처럼 송태하는 자기코가 석자임에도 불구하고 오지랖 넓게 길을 가는길에 모든 일에 관여를 한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무협에서 주인공이 하던 바른 생활 사나이다. 


대길은 좌상 이경석(김응수)으로 부터 공교롭게도 자신이 추적하던 송태하에게 500냥을 줄테니 찾아 오던지 아니면 목을 가져오라고 한다. 이에 대길은 5,000냥이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다고 딜을 한다. 드라마 추노에서는 좌상을 당시 좌상이였던 이경석 대신에 이경식으로 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이경식을 악역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배려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대길은 같은 일행인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에게는 500냥만을  받기로 했다고 뻥을 친다. 그러나, 최장군은 위에것들에게 더 높은 딜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또한, 최장군은 대길과 왕손이를 위해서 한지에 풀을 먹인 갑옷을 준다.


최장군은 동료애를 발휘하지만, 대길은 4,500냥이란 거금을 착복하여 동료애라고는 없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대화에서 추후 좌상 이경석에 의해서 추노군인 대길과 최장군과 왕손이는 추격을 당한다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길과  송태하가 한편이 되어 이경석과 대립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또한, 암자에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중이 된 자의 말에 의하면 송태하는 다시 복권이 된다는 장치를 두고 있어서 대길의 불행한 죽음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대길은 송태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송태하를 편전으로 저격하려고 한다. 하지만 10년을 넘게 찾아다닌 언년이가 송태하와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져 화살을 겨누지 못한다.

어쨌든, 업복이와 송태하와 대길이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업복이와 대길이의 차이점은 신분의 차이나 쫓기는자와 쫓는자의 차이점뿐만 아니고 활을 쏘고 총을 쏜다는 커다란 차이점도 있지만, 이보다 더큰 차이는 총을 쏘는 방법과 활을 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있다.


업복이는 일반적인 총을 쏘듯이 자연스럽게 겨눔을 하는 오른쪽 눈을 뜨고 가늠자를 맞추고 있지만, 이대길(장혁)은 활(편시) 겨눔을 하는 오른쪽 눈을 감고 쏘고 있다.

또다른 재미는 추노에서 이대길이 활을 겨누고 있는 장소는 선덕여왕에서 대남보가 천명을 죽이던 장소와 같은 한탄강변이란 사실이다. 사극에서 나오는 강변 장면은 대부분 한탄강인 경우가 많다.


그 만큼 한탄강이 그림이 잘 나오기도 하고, 그만큼 인간의 손때를 덜탄 이유이기도 할것이다. 하지만, 한탄강은 이제 더이상 볼수 없다는 아쉬임이 있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2009/08/12 - [역사이야기] - 천명의 마지막 촬영지, 비둘기낭 동굴 수몰위기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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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 [역사이야기] - 추노 김하은 엽전키스 아이리스 사탕키스 뛰어넘을까? - 사당패 고구려 벽화에도 있다
2010/01/13 - [역사이야기] - 추노 노비 문신은 사실일까? 현대판 전자팔찌?
2010/01/11 - [TV&ETC] - 같은 시대 전혀 다른 이야기 명가와 추노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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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파비 2010.01.15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드라마 보면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수몰이라니...

  2. BlogIcon zin, 2010.01.15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쓰셨네요..추론도 재미있고요..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 BlogIcon rinda 2010.01.16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탈출하려다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는군요.
    얖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해집니다.
    갓쉰동님의 리뷰를 기다려야겠습니다ㅎㅎㅎ

  4. BlogIcon 라이너스™ 2010.01.18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생한 리뷰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5. BlogIcon 풀칠아비 2010.01.20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보는 재미가 배가될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6. 2010.01.21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BlogIcon 둥둥 2010.01.21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기가 거기였군요.. 참 한적해보이고 좋던데..
    잘봤습니다..저도 요즘 추노에 푹 빠져 산답니다^^

  8.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9. BlogIcon Comprar Cialis 2013.02.07 0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ㅋㅋ
    잘보고 갑니다 ㅋ

  10. BlogIcon Levitra kopen 2013.02.07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하 손연재 체조 연습할때 신발 벗고 하드만 싀1바년아 신발 벗고 하는데 무슨 깔창이고 머고 싀1바 신발 벗기고 같이섯을때 7센치는 차이나더만 손연재 이쁘장하게 생기고 어리니까 무조건 보호하는 식이지 ? 참 .. 장미란이 사고 나서 안타깝게 4위할때는 졸라1리 욕하던 섹히들이 참 아주 수호천사 납셧어요?

양반을 죽이려는 업복이(공형진)와 대길(장혁)의 첫사랑 언년이(이다해)에 대한 애증과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내고 사라진 언년이의 오라버니 큰놈이(조재완)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노비에 대한 과도한 증오로 인해서 추노꾼이 되었다.

 
반면에 업복이(공형진)는 노비로서 삶에서 벗어나려고, 청나라로 도망을 치지만 추노군 대길에게 잡히고 만다.

그래서 업복이는 양반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어서 만민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뉴패러다임를 가지고 있던 만민당(?)으로 불릴 수 있는 당에 가입한 후 이들로 부터 받은 화승총을 받아 제일 먼저 추노꾼 대길의 마빡을 골로 보내버리는 계획을 세우고 저격을 시도 하지만 실패하고 많다.

송태하(오지호)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명분가의 양반으로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나서지만, 소현세자가 말리는 바람에 청까지 소현세자를 보좌하는 호의무사 역할을 하고, 청으로부터 돌아온 이후에는 1645년 4월 소현세자의 죽음과 함께 자신은 노비로 전락한다.

소현세자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647년 5월 장자 12살의 석철과 차남 8살인 석린과 4살인 막내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하지만, 장남인 석철은 1648년 9월 당시 장독이 있던 제주도에서 죽고, 둘째인 석린도 1648년 12월 알수 없는 질병에 의해서 죽는다. 그래서 막내인 어린 아들 석견만 남는다.

송태하는 소현의 막내인 이석견을 보호하라는 소현세자의 지지자들의 모임의 부탁을 받고 탈출을 감행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날 탈출하려던 공노들을 도와 같이 탈출한다. 일반적으로 중요도에 따라서 소현세자의 아들을 보호하려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탈출시 노비들과 같이 길을 나선것이다. 일단 훈련청에서 벗어나면 길을 달리 해야 하지만 탈출도 같이한다. 대길과 갈대숲 결투를 벌린다.


이과정에서 천지호(성동일)파의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니다. 더나가 송태하는 빨리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을 호위하기 위해서 청주로 길을 나서야 하지만, 화살을 맞은 놈임에도 불구하고 강간을 당하려는 언년이를 구하고, 절에서도 언년이와 같이 길을 떠난다.

이처럼 송태하는 자기코가 석자임에도 불구하고 오지랖 넓게 길을 가는길에 모든 일에 관여를 한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무협에서 주인공이 하던 바른 생활 사나이다. 


대길은 좌상 이경석(김응수)으로 부터 공교롭게도 자신이 추적하던 송태하에게 500냥을 줄테니 찾아 오던지 아니면 목을 가져오라고 한다. 이에 대길은 5,000냥이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다고 딜을 한다. 드라마 추노에서는 좌상을 당시 좌상이였던 이경석 대신에 이경식으로 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이경식을 악역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배려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대길은 같은 일행인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에게는 500냥만을  받기로 했다고 뻥을 친다. 그러나, 최장군은 위에것들에게 더 높은 딜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또한, 최장군은 대길과 왕손이를 위해서 한지에 풀을 먹인 갑옷을 준다.


최장군은 동료애를 발휘하지만, 대길은 4,500냥이란 거금을 착복하여 동료애라고는 없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대화에서 추후 좌상 이경석에 의해서 추노군인 대길과 최장군과 왕손이는 추격을 당한다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길과  송태하가 한편이 되어 이경석과 대립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또한, 암자에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중이 된 자의 말에 의하면 송태하는 다시 복권이 된다는 장치를 두고 있어서 대길의 불행한 죽음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대길은 송태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송태하를 편전으로 저격하려고 한다. 하지만 10년을 넘게 찾아다닌 언년이가 송태하와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져 화살을 겨누지 못한다.

어쨌든, 업복이와 송태하와 대길이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업복이와 대길이의 차이점은 신분의 차이나 쫓기는자와 쫓는자의 차이점뿐만 아니고 활을 쏘고 총을 쏜다는 커다란 차이점도 있지만, 이보다 더큰 차이는 총을 쏘는 방법과 활을 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있다.


업복이는 일반적인 총을 쏘듯이 자연스럽게 겨눔을 하는 오른쪽 눈을 뜨고 가늠자를 맞추고 있지만, 이대길(장혁)은 활(편시) 겨눔을 하는 오른쪽 눈을 감고 쏘고 있다.

또다른 재미는 추노에서 이대길이 활을 겨누고 있는 장소는 선덕여왕에서 대남보가 천명을 죽이던 장소와 같은 한탄강변이란 사실이다. 사극에서 나오는 강변 장면은 대부분 한탄강인 경우가 많다.


그 만큼 한탄강이 그림이 잘 나오기도 하고, 그만큼 인간의 손때를 덜탄 이유이기도 할것이다. 하지만, 한탄강은 이제 더이상 볼수 없다는 아쉬임이 있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2009/08/12 - [역사이야기] - 천명의 마지막 촬영지, 비둘기낭 동굴 수몰위기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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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파비 2010.01.15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드라마 보면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수몰이라니...

  2. BlogIcon zin, 2010.01.15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쓰셨네요..추론도 재미있고요..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 BlogIcon rinda 2010.01.16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탈출하려다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는군요.
    얖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해집니다.
    갓쉰동님의 리뷰를 기다려야겠습니다ㅎㅎㅎ

  4. BlogIcon 라이너스™ 2010.01.18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생한 리뷰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5. BlogIcon 풀칠아비 2010.01.20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 보는 재미가 배가될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6. 2010.01.21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BlogIcon 둥둥 2010.01.21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기가 거기였군요.. 참 한적해보이고 좋던데..
    잘봤습니다..저도 요즘 추노에 푹 빠져 산답니다^^

  8.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5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9. BlogIcon Comprar Cialis 2013.02.07 0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ㅋㅋ
    잘보고 갑니다 ㅋ

  10. BlogIcon Levitra kopen 2013.02.07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하 손연재 체조 연습할때 신발 벗고 하드만 싀1바년아 신발 벗고 하는데 무슨 깔창이고 머고 싀1바 신발 벗기고 같이섯을때 7센치는 차이나더만 손연재 이쁘장하게 생기고 어리니까 무조건 보호하는 식이지 ? 참 .. 장미란이 사고 나서 안타깝게 4위할때는 졸라1리 욕하던 섹히들이 참 아주 수호천사 납셧어요?

노비 문신은 사실일까?

추노를 보고 있노라면 송태하(오지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노비들이 이마나 가슴에 노비 문신(묵형)이나 인두로 노비를 뜻하는 <인>을 하고 있다.  

서양의 노비나 노예 처럼 노비를 매매하거나 상속되었던 것은 맞지만, 미국의 노예 드라마에서 가축에게 자신의 소유를 증명하는 가문의 인장으로 만든 인두로 불에 달군 <인>을 하듯이 노비들에게 인을 하지는 않았다.


묵형(문신)은 조선시대에 노비에게 하지 않고, 아주 강력한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형벌로서 하였다. 조선에서는 5개의 중형이 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대벽이 있고, 남자의 성기를 짜르는 궁형이 있고, 아킬레스건 처럼 발뒤꿈치 힘줄을 짤라 버리는 월형(비형)이 있고, 코를 베어내는 의형이 있고, 머리에 문신을 하는 자자(묵형)이 있다.

사극에서 많이 보이는 태형은 장을 치는 형태로 형벌중에서는 낮은 형에 불과했다.


5개의 중형중에서 상위 3위 안에 들어가는 형벌이 대벽(사형), 의형(코베기), 자자(묵형)이다. 코베기(의형)나 문신형(묵형)을 하는 이유는 요즘으로 치면 여론재판으로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한마디로 죄인에게 평생 쪽팔리며 살아가라는 형벌이다. 묵형을 자자(刺字)라고 하듯이 묵형을 하는 방법은 이마에 칼로 찌르듯이 글을 쓰고 먹물을 사용해서 상처가 아물더라도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체면을 중요시 하는 조선으로써는 묵형 만큼 커다란 형벌도 없었다. 남자의 생식기인 불알을 잘라버리는 궁형이나 아킬레스 힘줄을 자르는 형벌보다도 높은 형에 해당하였다.

묵형(문신)은 현대판 전자팔찌?

요즘 성범죄를 저지른 자들에서 쪽팔림을 주기 위해서 인터넷에 신원을 공개한다거나, 거주 이전을 할때 관할 경찰에서 보호관찰을 하듯이 집에 "이집은 성범죄가 사는집'처럼 팻말을 놓는다거나, 이동경로를 추적하도록 발목이나 손목에 GPS 수신기를 장착하게 하는 전자팔찌 형벌과는 차원이 다른 형벌인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 <추노>에서 요즘으로 치면 깡패들이 문신을 새기듯이 침으로 뜸을 뜬 다음 먹을 입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옷을 입었을 때 볼 수 없도록 가슴에 묵형(문신)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언년이(이다해)의 오라비가 가슴를 보여주면서 더이상 노비로 살지 않아도 되니 문신을 지울 때 아퍼서 운것이 아니고 기뻐서 울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제중원>에서 백정 출신인 주인공이 길가던 양반의 호패와 물건를 빼앗고 자신을 호패를 빼앗은 인물로 속이는 장면이 나오고, <추노>에서 언년이(김혜원:이다해)의 오라비인 큰놈이(김성환:조재환) 양반의 <호패>를 빼앗고 죽인 다음에 자신의 신분을 위조하는 행위를 한다.  이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자형에 해당하고 태형 100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형벌로 묵형을 하는 형벌에 해당하는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자자(묵형/문신)형을 집행하지 않고, 왕들이 감형을 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자자형이나 궁형이나 코를 베어 버리는 형벌들은 태형이나 유배형이나 벌금형과 병행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자형(묵형)을 제외하고 다른 형벌로 가중해서 처벌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였다.

설령 자자형(묵형)에 처한 자일 경우도 <추노>에서 처럼 송태하(오지호)와 같이 도망하는 노비중에 수적질을 하다 잡혀 공노비 신세가 된후 송태하의 도움으로 도망친 노비도  <노비(奴婢)>라고 하지 않고, 죄명을 기입한다. 예를 들어 성폭행범이면 이마에 <성폭행>이라 하고, 국가재산인 우마를 훔치고 죽였을 경우 단순히 <절도>라고 문신하지 않고, <도우마:盜牛馬>라고 기록해서 재범했을 경우 참고하도록 하였고, 어떠한 중죄를 지었는지를 모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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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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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임현철 2010.01.13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배움이었습니다.

  2. BlogIcon 따뜻한카리스마 2010.01.13 0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시대에서 있었던 신분의 한, 지독하군요-_-;;;;
    우리 민족의 DNA 뿌리 깊은 곳에 그 한이 숨겨져 있겠죠.

  3. BlogIcon koc/SALM 2010.01.13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분의 한? 한국에서 신분 질서는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 농노만 되도 한국의 노비보다 훨씬 제약이 심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노비에게 문신을 할 정도라면, 아예 국왕이 사유를 물었을 겁니다.
    오히려, 법률적으로 천민이 아니었던, 백정(도살업자)이나 무당, 광대 등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한 사회였습니다.
    이런저런 면에서 추노는 과장이 심하죠.

  4. BlogIcon 비단장수왕서방 2010.01.13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때 ?
    이렇게 배웠던 조상의 그 빛난 얼에는 저런 무자비한 행위도 포함 되어 있었던 것이었군요
    흔치않은 귀한 자료 자알 보고 갑니다

  5. BlogIcon DJ야루 2010.01.13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만약에 이게 지금까지 행해졌다면, 죄를 지고는 부끄러워서 못살았을 것 같네요..
    혹시 무단횡단하다 걸리면 이마에.. "무단횡단" 이렇게 쓰여지는거 아닌지 모르겠네요ㅋㅋㅋㅋㅋ

    죄송합니다 쓸때없는 얘기를....

  6. BlogIcon 탁발 2010.01.13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전 이와 관련한 글을 쓴 것이 있는데, 요점만 말하자면 추노의 자자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좀 있을 것 같더군요. 자자형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중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추노에 첫회에 보면 여자와 어린이 모두에게 자자가 있었죠.

  7. BlogIcon 감자꿈 2010.01.13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갓쉰동님이십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

  8. BlogIcon 넷테나 2010.01.13 14: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인데 궁금했던 것 보다 더 많은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9. BlogIcon 꼬마낙타 2010.01.13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추노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10. BlogIcon 레오 ~ 2010.01.13 1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지른 죄의 무게만큼의 벌의 무게가 지어졌야 합니다 ..묵형이야말로 무거운 벌이군요 -_-"

  11. BlogIcon skagns 2010.01.13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드디어 추노로 갓쉰동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가요? ^^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구요~!!

  12. 2010.01.15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3. 육체언어 2010.01.16 0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영화 음란서생이 생각나는군요.

    이마에 음란...

  14. BlogIcon 여름지기 2010.03.05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에... 그렇군요^^
    역시 드라마는 각본이 되여 있습니다.
    거기다 연출까지 포합되니 외곡되는경우는 다반사같습니다!

  15. BlogIcon Pussy Tube 2012.07.14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비가 가슴를 보여주면서 더이상 노비로 살지 않아도 되니 문신을 지울 때 아

  16. BlogIcon Whitley 2012.10.06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해서 상처가 아물더라도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체면을 중요시 하는 조선으로써는 묵형 만큼 커

  17. BlogIcon radio am fm portable 2012.11.26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강력한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형벌로서 하였다. 조선에서는 5개의 중형이 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대벽이 있고, 남자의 성기를 짜르는 궁형이 있고, 아킬레스건 처럼 발뒤꿈치 힘줄을 짤라 버리는 월형(비형)이 있고, 코를 베어내는 의형이 있고, 머리에 문신을 하는 자자(묵형)이 있다.

  18. BlogIcon discount foodsaver bags 2012.12.04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노를 보고 있노라면 송태하(오지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노비들이 이마나 가슴에 노비 문신(묵형)이나 인두로 노비를 뜻하는 <인>을 하고 있다.

노비 문신은 사실일까?

추노를 보고 있노라면 송태하(오지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노비들이 이마나 가슴에 노비 문신(묵형)이나 인두로 노비를 뜻하는 <인>을 하고 있다.  

서양의 노비나 노예 처럼 노비를 매매하거나 상속되었던 것은 맞지만, 미국의 노예 드라마에서 가축에게 자신의 소유를 증명하는 가문의 인장으로 만든 인두로 불에 달군 <인>을 하듯이 노비들에게 인을 하지는 않았다.


묵형(문신)은 조선시대에 노비에게 하지 않고, 아주 강력한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형벌로서 하였다. 조선에서는 5개의 중형이 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대벽이 있고, 남자의 성기를 짜르는 궁형이 있고, 아킬레스건 처럼 발뒤꿈치 힘줄을 짤라 버리는 월형(비형)이 있고, 코를 베어내는 의형이 있고, 머리에 문신을 하는 자자(묵형)이 있다.

사극에서 많이 보이는 태형은 장을 치는 형태로 형벌중에서는 낮은 형에 불과했다.


5개의 중형중에서 상위 3위 안에 들어가는 형벌이 대벽(사형), 의형(코베기), 자자(묵형)이다. 코베기(의형)나 문신형(묵형)을 하는 이유는 요즘으로 치면 여론재판으로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한마디로 죄인에게 평생 쪽팔리며 살아가라는 형벌이다. 묵형을 자자(刺字)라고 하듯이 묵형을 하는 방법은 이마에 칼로 찌르듯이 글을 쓰고 먹물을 사용해서 상처가 아물더라도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체면을 중요시 하는 조선으로써는 묵형 만큼 커다란 형벌도 없었다. 남자의 생식기인 불알을 잘라버리는 궁형이나 아킬레스 힘줄을 자르는 형벌보다도 높은 형에 해당하였다.

묵형(문신)은 현대판 전자팔찌?

요즘 성범죄를 저지른 자들에서 쪽팔림을 주기 위해서 인터넷에 신원을 공개한다거나, 거주 이전을 할때 관할 경찰에서 보호관찰을 하듯이 집에 "이집은 성범죄가 사는집'처럼 팻말을 놓는다거나, 이동경로를 추적하도록 발목이나 손목에 GPS 수신기를 장착하게 하는 전자팔찌 형벌과는 차원이 다른 형벌인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 <추노>에서 요즘으로 치면 깡패들이 문신을 새기듯이 침으로 뜸을 뜬 다음 먹을 입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옷을 입었을 때 볼 수 없도록 가슴에 묵형(문신)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언년이(이다해)의 오라비가 가슴를 보여주면서 더이상 노비로 살지 않아도 되니 문신을 지울 때 아퍼서 운것이 아니고 기뻐서 울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제중원>에서 백정 출신인 주인공이 길가던 양반의 호패와 물건를 빼앗고 자신을 호패를 빼앗은 인물로 속이는 장면이 나오고, <추노>에서 언년이(김혜원:이다해)의 오라비인 큰놈이(김성환:조재환) 양반의 <호패>를 빼앗고 죽인 다음에 자신의 신분을 위조하는 행위를 한다.  이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자형에 해당하고 태형 100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형벌로 묵형을 하는 형벌에 해당하는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자자(묵형/문신)형을 집행하지 않고, 왕들이 감형을 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자자형이나 궁형이나 코를 베어 버리는 형벌들은 태형이나 유배형이나 벌금형과 병행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자형(묵형)을 제외하고 다른 형벌로 가중해서 처벌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였다.

설령 자자형(묵형)에 처한 자일 경우도 <추노>에서 처럼 송태하(오지호)와 같이 도망하는 노비중에 수적질을 하다 잡혀 공노비 신세가 된후 송태하의 도움으로 도망친 노비도  <노비(奴婢)>라고 하지 않고, 죄명을 기입한다. 예를 들어 성폭행범이면 이마에 <성폭행>이라 하고, 국가재산인 우마를 훔치고 죽였을 경우 단순히 <절도>라고 문신하지 않고, <도우마:盜牛馬>라고 기록해서 재범했을 경우 참고하도록 하였고, 어떠한 중죄를 지었는지를 모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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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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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임현철 2010.01.13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배움이었습니다.

  2. BlogIcon 따뜻한카리스마 2010.01.13 0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시대에서 있었던 신분의 한, 지독하군요-_-;;;;
    우리 민족의 DNA 뿌리 깊은 곳에 그 한이 숨겨져 있겠죠.

  3. BlogIcon koc/SALM 2010.01.13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분의 한? 한국에서 신분 질서는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 농노만 되도 한국의 노비보다 훨씬 제약이 심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노비에게 문신을 할 정도라면, 아예 국왕이 사유를 물었을 겁니다.
    오히려, 법률적으로 천민이 아니었던, 백정(도살업자)이나 무당, 광대 등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한 사회였습니다.
    이런저런 면에서 추노는 과장이 심하죠.

  4. BlogIcon 비단장수왕서방 2010.01.13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때 ?
    이렇게 배웠던 조상의 그 빛난 얼에는 저런 무자비한 행위도 포함 되어 있었던 것이었군요
    흔치않은 귀한 자료 자알 보고 갑니다

  5. BlogIcon DJ야루 2010.01.13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만약에 이게 지금까지 행해졌다면, 죄를 지고는 부끄러워서 못살았을 것 같네요..
    혹시 무단횡단하다 걸리면 이마에.. "무단횡단" 이렇게 쓰여지는거 아닌지 모르겠네요ㅋㅋㅋㅋㅋ

    죄송합니다 쓸때없는 얘기를....

  6. BlogIcon 탁발 2010.01.13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전 이와 관련한 글을 쓴 것이 있는데, 요점만 말하자면 추노의 자자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좀 있을 것 같더군요. 자자형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중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추노에 첫회에 보면 여자와 어린이 모두에게 자자가 있었죠.

  7. BlogIcon 감자꿈 2010.01.13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갓쉰동님이십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

  8. BlogIcon 넷테나 2010.01.13 14: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인데 궁금했던 것 보다 더 많은걸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9. BlogIcon 꼬마낙타 2010.01.13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추노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10. BlogIcon 레오 ~ 2010.01.13 1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지른 죄의 무게만큼의 벌의 무게가 지어졌야 합니다 ..묵형이야말로 무거운 벌이군요 -_-"

  11. BlogIcon skagns 2010.01.13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드디어 추노로 갓쉰동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가요? ^^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구요~!!

  12. 2010.01.15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3. 육체언어 2010.01.16 0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영화 음란서생이 생각나는군요.

    이마에 음란...

  14. BlogIcon 여름지기 2010.03.05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에... 그렇군요^^
    역시 드라마는 각본이 되여 있습니다.
    거기다 연출까지 포합되니 외곡되는경우는 다반사같습니다!

  15. BlogIcon Pussy Tube 2012.07.14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비가 가슴를 보여주면서 더이상 노비로 살지 않아도 되니 문신을 지울 때 아

  16. BlogIcon Whitley 2012.10.06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해서 상처가 아물더라도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체면을 중요시 하는 조선으로써는 묵형 만큼 커

  17. BlogIcon radio am fm portable 2012.11.26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강력한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형벌로서 하였다. 조선에서는 5개의 중형이 있는데 사형에 해당하는 대벽이 있고, 남자의 성기를 짜르는 궁형이 있고, 아킬레스건 처럼 발뒤꿈치 힘줄을 짤라 버리는 월형(비형)이 있고, 코를 베어내는 의형이 있고, 머리에 문신을 하는 자자(묵형)이 있다.

  18. BlogIcon discount foodsaver bags 2012.12.04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노를 보고 있노라면 송태하(오지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노비들이 이마나 가슴에 노비 문신(묵형)이나 인두로 노비를 뜻하는 <인>을 하고 있다.

화랑세기를 모본으로 삼고, 만들어진 소설 중에서 <선덕여왕>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기록한 덕만이 맏언니, 천명이 동생과는 다르게 설정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화랑세기의 천명의 동생 덕만으로 설정한듯 하지만, 화랑세기와는 다르게 천명을 같은 나이 동복의 쌍둥이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천명의 쌍둥이 동생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많은 부분에서 역사와는 다른 시대 상황을 만들고, 그에 따라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얼키고 설켜 버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덕만과 천명 그리고 통설

그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다르게 화랑세기에서는 덕만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맏딸이고. 덕만의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반면에, 천명은 진평왕의 딸이다. 

이 둘의 기록을 그냥 생각없이 읽는다면, 진평왕의 맏딸은 덕만이고, 천명은 진평왕의 딸이니, 천명은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 된다. 그리고  덕만이 맏딸이니 천명은 당연히 첫째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삼단논법이다. 만약, ~라면, ~다. 이런 류의 소설을 기반으로 논설을 쓰는 자칭,  국내 유수의 자신들의 할말 만 하는 신문사도 있다. 일명 라면사설 또는 라면일보라고도 불리운다. 대부분 이런 라면소설은 그럴듯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기본 개념이 미 장착인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삼국유사>에 보이는 서동요로 너무나 유명한 <서동과 선화>에서 '선화'가 진평왕의 3번째 딸이라고 했으니, 이들의 서열을 비교하면 덕만이 맏이 되고, 천명이 둘째가 되고, 선화가 셋째가 된다. 그런데 이런 설정이 맞는 걸일까?

통설의 문제점

하지만, 글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덕만은 진평왕의 맏딸이 맞다. 문제는 마야왕후인 정비의 소생으로 맏 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천명은 단지 진평왕의 딸이라고 만 기록하고 있다. 몇번째 딸인지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마야의 소생이라고 기록하지도 않았다.
 
만약,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였다면, 삼국사기는 천명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분명히 진평왕의 정비가 마야인것을 알면서도 천명을 마야의 소생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현재와 같이 1부1처제가 확립된 관점이라면, 누구나 천명의 어머니도 마야라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50년전으로만 돌아가더라도 첩실이란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될 정도로 첩의 자식이 있었다. 홍길동전에도 첩도 아니고, 집안 노비를 어머니로 둔 홍길동이지만, 홍판서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설움을 이야기한다. 고려시대만도 사대부 정도만 되더라도 첩은 무수히 많았다.

하물며, 왕의 아내들인 정비와 후비와 비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무수리의 몸에서 난 자식도 왕이 될수 있는게 왕이 가지는 성스러운 특수성이다. 그러니 고려시대를 살아간 김부식이나 일연으로써는 당연히 진평왕의 소생인 것은 맞지만, 천명의 모후가 누구인지 모를때는 덕만의 어머니인 마야를 천명의 어머니로 보지 않았다.
 
천명이 진평왕의 소생인것은 맞지만,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야의 딸이라고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천명의 어머니를 삼국사기.유사에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마야의 소생이 아닐뿐더러, 손씨 승만왕후의 소생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상식으로 과거를 단지, 겉보기 기록을 가지고, 덕만의 어미인 마야를 기록하지 않는 천명의 어머니로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알 수 없는 덕만이 언제(몇살) 왕위에 올랐을까를 추적한다. 추적의 기준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닌 '천명'을 기준으로 한다. 만약 천명과 덕만이 동부이모라면 이 추척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말이다.

통설이 가는 곳은 삼천포

가설이나 가정을 잘못세우면 결과가 전혀 다른 길로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통설로 알려진 가설을 따라 추적을 해볼 생각이다.

천명을 기존으로 했을때 덕만의 나이를 추적하는 방법은 없다. 단지, 천명이 낳았다는 춘추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춘추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603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03년 8월은 신라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603년 8월 고구려와 신라가 경기도 영역을 걸고, 고구려는 잃어버린 옛영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이고, 신라는 대 중국 교역로의 교두보를 잃어 버릴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신라국운을 걸고,  한수에서 일대 결전을 벌인다. 이때, 진평왕은 손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는 고구려 군을 북한산성(한수) 전쟁(투)에서 무찔러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한가위와 추석과 중추절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같은 날짜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명절이다. 공교롭게 중첩되었을 뿐이다. 광복절과 한가위가 겹치는 것처럼 말이다. 광복절은 광복절이고 추석은 추석이고 한가위는 한가위 일뿐이다. 603년 8월 이때의 승전을 기념하여 중추절이 생겼다. 이에 관한 글은 별도로 포스팅 할 예정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춘추가 603년에 태어 났다면, 천명의 대략적인 나이를 추측할 수가 있다. 천명이 15세~20세에 춘추을 낳았다면, 천명은 584~589년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천명의 언니인 덕만의 탄생 시기는 582~588년 사이가 된다. 그러니 덕만은 왕위에 오르는 632년에는 45~51세가 된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천명과 덕만이 동복이란 어떠한 기록도 없다. 그런데 잘못된 가정이 덕만을 40중~50초반에 왕에 등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대참사가 발생되었다. 만약, 이 사실을 죽은 선덕여왕이 알았다면, 대성통곡할 일이 아닌가?

칭찬한 답시고, 잘 알지 못하는 길가던 아가씨에게 "아줌마 너무 섹시해요"라고  말을 해도 별 "미친놈을 다 봤나"라는 듯 눈흘김을 당하거나 좋은 말 들어 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아줌마에게 "아가씨 너무 섹시해요" 라고 한다면 아줌마가 별미친놈 하면서 돌아서며 내가 아직도 먹어주는구나 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겠지만 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문제가 아닌 연구자의 문제

사실 덕만을 50대로 설정하는 순간, 덕만과 관련된 삼국.유사 모든 기록은 덕만과 관련이 없는 또는 다 늙은 노처녀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는 있다. 하지만, '모란꽃'사건이나 '지귀심화', 634년 결혼과 연호 변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어진다.

이 같은 사건들이 40대 넘은 노처녀나 50이 넘은 노처녀가 할 만한 일은 아니다. 또한, 등극 후 3년이 지난 635년 남편을 두었다는 기록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란꽃은 애들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나 아빠랑 결혼할래 엄마랑 결혼할래를 갓 졸업한 아이에게나 했음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관점이 아닌 당대의 관점으로 역사를 본다면

이제 아래의 글을 차분히 현재의 1부일처제 관점이 아닌 과거 수 없이 많은 여자를 거느렸을 진평왕 시대로 돌아가 읽어 보기 바란다.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634년 3년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가정하지 않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해석한다면,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른시기는 절대 20 대를 넘기지 못한다.

화랑세기가 본 덕만과 용춘

화랑세기는 기존의 통설을 통쾌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건 "니들 생각이고~" 너희들이 틀렸다라고, 만약,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저작한 화랑세기를 필사한 필사본이라면, 그동안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한마디로 엿먹은 것이다. 그래도 화랑세기라는 필사본이 발견되었으니 쪽팔림은 있더라도 학계발전을 위해서는 만족할 만 하다.


하지만, 박창화가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모방한 가짜라면 이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1930년대의 종이에 필사된 화랑세기라면, 1930년대에 이미 개인 박창화는 현재 2010년 즈음의 전체 역사학계 보다도 뛰어난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역사학계는 밥숫가락 놓고, 모두 대운하 삽질공사에 일일잡부로 참여하거나  다른일을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덕만과 천명을 화랑세기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도록 하자.

화랑세기는 좀 더 나아가 천명이 덕만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의 출생일이 언제인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화랑세기의 기록들을 토대로 덕만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덕만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정황증거 기록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언제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용춘(龍春)은 무술(戊戌)년(578) 생이고 병진(丙辰)년(596)에 낭주(郎主)가 되었다.〉


공의 손 윗누이인 용명공주는 곧 진흥의 딸이다.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화랑세기 13세 용춘

용춘은 이 기록으로 19살에 13세 풍월주에 올랐다. 용춘의 어미인 지도(기오/흥도)는 금륜(진지)뿐만 아니라, 진흥도 섬겼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도의 딸인 용명공주가 진평을 섬기고, 용춘을 뒤에서 밀어주어서 용춘이 13세 풍월주에 올랐다는 새로운 기록을 보는 것이다. 

그럼 지금 까지 알지 못했던 용수.용춘 누이에 관한 기록이다. 용수, 용명공주, 용춘이거나 용명, 용수, 용춘이 된다. 그런데 지도는 천주공과도 관계해서 17세 풍월주가 되는 염장을 낳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이는 다른 포스팅으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용춘의 나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용춘은 578년생이고, 천명은 588~590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춘추의 아비인 용수는 용춘보다 보다도 나이가 많아야 한다. 그러니 용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576~7년 생이 된다.

결국은 용수는 금륜이 왕위에 오르는 시점에 태어났고, 용춘은 금륜이 왕위를 내주고, 폐위되어 살아가는 동안에 아비의 얼굴을 모르고 컸다는 말이 된다. 용수는 26~28살 전후에 자신보다 최소 나이가 10살 어린신부 천명과 관계를 하여 603년 춘추를 낳은 것이다.
이말은 용수.용춘에게는 이미 본처가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서 낭도로 등용된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호림에 풍월주 지위를 넘겨 주는 시기는 603년이다. 그후 용춘은 조정에 들어가서 열심히 조정일을 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와 천명을 구하려 출동한 대남보는 여래사에서 16세 풍월주이며 미실과 설원랑의 아들인 보종을 활로 상처를 입힌다. 용춘의 충성스런 '대남보'도 이때 기용한것이 아닐까 한다. 용춘의 기록중 대남보의 기록을 보면 꼭 일본의 자객집단인 닌자들을 보는 듯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덕여왕에서도 가면을 쓰고 음지에서 용춘을 호위하는 음병으로 나온다. 김유신이 죽을때에 유신의 집에서 나오는 한 무리들이 있엇다고 한다. 유신 평생 뒤에서 유신을 호위했지만, 유신이 죽자 울려 떠나 버렸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되겠다.

 (선덕여왕에서는 대남보가 미생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중에 하나로 나왔나 봅니다.  또한, 보종(미실/설원랑)을 쏜사람은 임종으로 나왔다고 하네요.. 당연히 용춘의 그림자 무사 대남보 일줄 알았는데.. 소설 선덕여왕은 견적이 안나오는 군요.. 진심으로 견적이 안나오는 원소설을 가지고, 대단하고 재미있는 사극을 만든 mbc에 경의를 표함 ^^)  


건복(建福)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帝)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 전군(殿君)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전군이 (용춘)공에게 물었다. 공이 답하기를 “대왕의 나이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전군은 이에 따라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603년 진평왕은 적자가 없어서 용수를 천명의 부군으로, 즉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용수를 부군으로 삼아 물려주려 했다는 대목이 아니고 적자 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말로 왕후의 소생인 왕자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비를 통해서는 왕자가 있다는 다른 표현인것이다.

603년 시기까지 덕만은 존재가 없는 것이다. 있더라도 나이가 어려서 결혼적령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시기에 용수와 천명이 결혼해서 '춘추'를 낳은 것이다. 

삼국사기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진흥은 7살에 왕위에 올랐고, 화랑세기 12세 풍월주 보리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의 비인 사도는 7살에 진흥에 시집을 갔다고 한다. 또한 12세 풍월주인 보리는 13살에 결혼을 하는데 7살의 어린 신부를 얻어서 업고 궁궐 출입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았을때, 덕만이 있었다면 용수랑 엮어 주지 않았을까? 아무리 어린신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문근영이 고딩때 결혼해서 어린신부였지만 당시는 어린신부 축에도 끼지도 못하고 10세 미만이 되야 어린 신부축에 들었다.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崩)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용춘)공을 마음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596년~603년

"그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崩)다"

덕만이 다 자라기도 전에 마야왕후는 죽었다. 덕만의 어린시절에 모후가 없었다. 그러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이 어린 나이에 죽은 마야가 다큰 성인이 된 시점에 모녀 상봉을 하는 것은 엽기에 가깝고, 매년 여름방학 납량특선에나 나옴직한 설정이 된다. 또한, 진평은 덕만이 어린나이때 승만 손씨를 왕후로 받아 들인것이다. 물론, 승만 왕후가 후비였을때 왕자를 생산해서 왕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단락이 있다. "왕위를 이를 아들이 달리 없었다"는 기록이다. 이는 왕자들은 있지만, 대권(왕권)을 넘기기에는 '왕자들의 자질이 덕만에 비해 부족함이 있다'는 다른 표현이다. 또한, 그전에 천명이 왕위를 받는 수업을 받았음도 짐작할 수 있고, 진평은 전왕들의 선례에 비추어 사위를 왕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가지 579년 13세에 왕위에 오른 진평(567년생)은 603년 37살이 될때까지 적자가 없었다.하고 있고, 603년이 한참 지난후 선덕이 자라면서 왕의 자질이 보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야가 죽고, 덕만이 어려서 왕의 자질을 보일때에도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왕의 자질을 보인 덕만에게 도전자가 생긴다. 다름 아닌 손승만후가 아들을 낳아 덕만을 밀어낼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일찍 죽어 버린다. 이 시기 승만은 왕자를 생산한 비들을 음모를 꾸며서 궁밖으로 축출한다. 어찌 보면 어부지리를 덕만이 한것이고, 아니면, 어리지만 덕만의 정치술수가 뛰어났을 수도 있다.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그 때 승만황후(僧滿皇后)가 …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용춘)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角干)에 봉해졌다. 용수전군이 죽기(薨)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1차로 덕만이 용춘과 관계를 가지고, 천명이 궁을 벗어난 때를 알아보자. 이시기에 덕만은 용봉의 자질을 가지고 결혼을 한때이다.  

승만왕후가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이 일찍 죽었다. 아들이 죽은 원인을 용수.용춘형제로 하고, 지방으로 축출한다. 이는 단순히 용수.용춘을 대상으로 하는게 아닌 덕만의 지지세력을 축출하는 것이다. 그런 용춘이 고구려 원정에 출정하여 큰공을 세운다. 화랑세기에는 고구려에 출정한 전쟁이 어느때인지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서현, 용춘, 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치는데 큰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우리 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 삼국사기 본기 진평왕 51년

위의 기록을 보면, 승만왕후의 자식이 죽은 때는 629년 8월 낭비성 전투 이전시기 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용춘의 나이는 50세가 된다. 603년까지 덕만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629년 8월 낭비성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전에 용봉의 자질을 보이는 덕만이 용춘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승만 왕후의 자식이 죽자, 승만 왕후는 자식이 죽은 용춘.용수 형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이에 지방으로 나아가고, 낭비성 전투를 계기로 서라벌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러니 629년 전후를 기해서 덕만의 나이는 성숙한 성인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여기서 성숙한 여인이란 당대 13세 전후 결혼하는 일반적인 신라 상황을 고려할때, 덕만도 13세~16세 전후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용춘,용수와 관계하고 몇년 후가 629년이 된다. 그러니 덕만이 632년 진평을 이어 왕위에 오른때는 16~20세 이전이 된다. 또한, "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라고 한다. "총명하고, 감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사람들에게나 하는 말이지, 50살 근처에 있는 늙은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은 늙은 용춘과 용수가 젊은 여인 덕만에 할 말이지, 같이 늙은 사람을 대상으로 애를 낳기 위해서 멸사봉공할 수는 없는 말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용수.용춘형제라도 50근처의 여인에게서 후사를 보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많이 양보해도 629년 즈음 용춘의 나이 50일때 덕만은 20초반을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로써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의 기록을 토대로 덕만의 나이를 유추해 보았다.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서이던 위서이던 관계없이 상당히 합리적으로 기술되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살펴봐도 덕만이 50세의 노파로는 왕위에 올랐다고 볼 근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마야의 소생으로 천명을 기록한 것 같지만, 화랑세기에는 천명의 어미로 마야를 묘사한 대목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여전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다르게 천명의 모후가 마야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만, 천명이 덕만보다 나이가 아주 아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마야의 여식으로 천화, 천명, 덕만이다. 천화는 용수에게 시집을 갔다. 용수가 천명과 혼인을 하자, 천화는 추후 603년 낭비성 전투에 용춘과 같이 참여했던 백룡에게 다시 시집을 간다.  그러니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는 잘못되었다고 반박을 하는 셈이다.


덕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심층해부 시리즈

화랑세기는 단 한줄도 인용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토대로 덕만이 현재의 이요원의 나이가 아닌 어린 아역을 해서 주목을 받았던, 남지현 나이때 왕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시리즈 글을 기시로 송고했었다.

위 기사들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또는 마야 이전 황후의 소생이다.

셋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넷째, 천명은 정비인 마야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마야의 후손으로는 덕만 말고도 또다른 자매(들)이 있다.  설령, 덕만과 천명이 같은 마야의 소생일지라도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일곱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80년생이며 한국나이 30살인 이요원보다도 어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의 아역역할을 한 남지현은 2009년 현재 15세이다. 덕만은 실제로 632년에 15~18세 정도에 늦어도 20세 전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다음은 신라사 연구의 전설이며 철옹성으로  통하는 <성골>, <진골>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성골, 진골의 허구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만으로 얼마나 잘못된 역사 상식속에서 살아왔는지 조목조목 파헤칠 예정이다. 물론, 단지 예정이지 꼭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기사를 송고하는 중간 중간에 간간히 언급을 할 것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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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케케 2009.08.10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전희 헷갈려 .... 암튼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음다.

  3. dar 2009.08.10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론은 드라마는 구라라는거네요.ㅡ;;
    하긴 좀 전체적으로 이상하긴했어요
    먼가 않 맞는느낌?
    드라마는 드라마니 역사와 다르다<<라고 우리나라 pd들은 그러는데.ㅡㅡ
    그럼 이름을 왜 역사이름으로 쓰는건지???
    이름 전혀다르게해서 이건 퓨전사극이다<라고 할것이지
    우리나라는 요즘 특히 드라마에서 역사왜곡이 심하네요.
    PD들 역사 공부 점 해야겠음

  4. BlogIcon news119 2009.08.10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노력 많이 하셨네요. 초딩때 삼국사기를 열심히 읽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심오한 글은 첨이어요~

  5. 물음표 2009.08.10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기쁜 날 되세요.

  6. 백마강 2009.08.10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난 노력의 산물입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나게 봤습니다 ^^
    역사라는게 기록이 모두 옳다고 할수 없듯이 유추한 자의 기록도 옳다고 볼순 없겠죠

    • BlogIcon 갓쉰동 2009.08.10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엄청난 노력에 비해서 성과는 별루네용.. ㅠ.ㅠ.

      맞습니당.. 누가 더 합리적인가의 싸움이지요.. ㅋㅋ

  7. BlogIcon Nehe 2009.08.10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정말 유익한 글이였습니다~

  8. BlogIcon labyrint 2009.08.11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걸 연구하셨네요...

    역사학 교수님도 갓쉰동님처럼 자세한 연구는 하지 못한 것 같아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9. 현아엄마 2009.08.11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았습니다. 재미있네요^_^
    그럼 여기서 드리는 질문하나!
    유신은 덕만공주보다 한참 아래연배이지요?
    지금 드라마상에서는 유신과 덕만공주가 러브라인인데, 유신이 김춘추의 셋째딸과 결혼한다고 알려져있는데.. 드라마상에서는 천명이 15~6세에 낳은설정이자나요.. 지금 유신은(엄태웅) 아무리봐도 서른전중반인데..ㅋㅋ 내생각으로는 김춘추 결혼도 멀은것 같은데.. 언제 셋째딸 기다리나.. ㅎㅎㅎㅎ 아니면 부인중 하나가 김춘추의 셋째딸인건가요.. 드라마 설정으로 유신이 더 어리다고 한번 지나가듯이 나왔기도 했는데..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오면서 너무 나이를 먹었나..)ㅎㅎ 알려주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1 1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춘추 셋째딸은 문희와의 사이에 난 지조부인인데요..
      유신과 결혼한 때는 유신이 한갑인 655년에 합니당..
      이때 지조는 꽃다운 15~6세 정도지용..

      춘추와 문희의 결혼은 626~628년 사이이구용..

      화랑세기에 의하면 춘추 24세 바로 직전에 결혼한다고 하네용.. 603년 생이니 626년이 되는군요.. 드라마상 최소 앞으로 20년후가 되겠습니당.

  10. BlogIcon 관찰사 2009.08.11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

  11. BlogIcon 구여사 2009.08.28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를 보면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의문들이 풀리는 글이었습니다. ^^

    역사드라마를 보는 매력은 이런 것인가 봅니다.ㅎㅎㅎ

  12. BlogIcon jocuri online 2011.08.25 0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을 지키기 위해 중악으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13. 2011.11.03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4. 2011.11.03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BlogIcon Mumbai Car Hire 2011.12.26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Really great work,I would like to join your blog anyway.24세 바로 직전에 결혼한다고 하네용.. 603년 생이

  16.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7. BlogIcon Discount offers in India 2012.11.22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라당 후보, 장상 민주당 후

  18. BlogIcon internet marketing 2013.02.18 1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9. BlogIcon internet marketing 2013.02.18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치의 가감도 없이 왜곡도 없어야 하는데 기존 통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안목도 없고, 능력도 없이 왜곡하고 있지요. 사실 왜곡이 아니라.. 수준이 낮은 거지만.. 알아야 왜곡도 하는 거지요.. 모르면 왜곡도 못해요.. 모르고 한일은 그냥 무식하다고 하는 겁니다.

  20. BlogIcon internet marketing 2013.02.18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안목으로 쓰는게 아니다 이미 일어난사실을 한치의 가감도 없이 왜곡도 피하며 그 옳고 그름을 읽는 사람이 판단할것을 맡겨두고 적어가는 일종의 계산서다. 이렇듯이나 비뚤어진 사고방식으로 "모든것을 거꾸로!"를 외치고 싶다면 일본의 후쇼샤는 좋아 할것이다. 동지의식에........

  21. BlogIcon real estate 2013.02.18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치의 가감도 없이 왜곡도 없어야 하는데 기존 통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안목도 없고, 능력도 없이 왜

화랑세기를 모본으로 삼고, 만들어진 소설 중에서 <선덕여왕>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기록한 덕만이 맏언니, 천명이 동생과는 다르게 설정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화랑세기의 천명의 동생 덕만으로 설정한듯 하지만, 화랑세기와는 다르게 천명을 같은 나이 동복의 쌍둥이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천명의 쌍둥이 동생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많은 부분에서 역사와는 다른 시대 상황을 만들고, 그에 따라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얼키고 설켜 버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덕만과 천명 그리고 통설

그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다르게 화랑세기에서는 덕만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맏딸이고. 덕만의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반면에, 천명은 진평왕의 딸이다. 

이 둘의 기록을 그냥 생각없이 읽는다면, 진평왕의 맏딸은 덕만이고, 천명은 진평왕의 딸이니, 천명은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 된다. 그리고  덕만이 맏딸이니 천명은 당연히 첫째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삼단논법이다. 만약, ~라면, ~다. 이런 류의 소설을 기반으로 논설을 쓰는 자칭,  국내 유수의 자신들의 할말 만 하는 신문사도 있다. 일명 라면사설 또는 라면일보라고도 불리운다. 대부분 이런 라면소설은 그럴듯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고 보면,  기본 개념이 미 장착인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삼국유사>에 보이는 서동요로 너무나 유명한 <서동과 선화>에서 '선화'가 진평왕의 3번째 딸이라고 했으니, 이들의 서열을 비교하면 덕만이 맏이 되고, 천명이 둘째가 되고, 선화가 셋째가 된다. 그런데 이런 설정이 맞는 걸일까?

통설의 문제점

하지만, 글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덕만은 진평왕의 맏딸이 맞다. 문제는 마야왕후인 정비의 소생으로 맏 딸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천명은 단지 진평왕의 딸이라고 만 기록하고 있다. 몇번째 딸인지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마야의 소생이라고 기록하지도 않았다.
 
만약,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였다면, 삼국사기는 천명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분명히 진평왕의 정비가 마야인것을 알면서도 천명을 마야의 소생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현재와 같이 1부1처제가 확립된 관점이라면, 누구나 천명의 어머니도 마야라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50년전으로만 돌아가더라도 첩실이란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될 정도로 첩의 자식이 있었다. 홍길동전에도 첩도 아니고, 집안 노비를 어머니로 둔 홍길동이지만, 홍판서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설움을 이야기한다. 고려시대만도 사대부 정도만 되더라도 첩은 무수히 많았다.

하물며, 왕의 아내들인 정비와 후비와 비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무수리의 몸에서 난 자식도 왕이 될수 있는게 왕이 가지는 성스러운 특수성이다. 그러니 고려시대를 살아간 김부식이나 일연으로써는 당연히 진평왕의 소생인 것은 맞지만, 천명의 모후가 누구인지 모를때는 덕만의 어머니인 마야를 천명의 어머니로 보지 않았다.
 
천명이 진평왕의 소생인것은 맞지만,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야의 딸이라고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천명의 어머니를 삼국사기.유사에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마야의 소생이 아닐뿐더러, 손씨 승만왕후의 소생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상식으로 과거를 단지, 겉보기 기록을 가지고, 덕만의 어미인 마야를 기록하지 않는 천명의 어머니로 만들고, 이를 기준으로 알 수 없는 덕만이 언제(몇살) 왕위에 올랐을까를 추적한다. 추적의 기준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닌 '천명'을 기준으로 한다. 만약 천명과 덕만이 동부이모라면 이 추척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말이다.

통설이 가는 곳은 삼천포

가설이나 가정을 잘못세우면 결과가 전혀 다른 길로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통설로 알려진 가설을 따라 추적을 해볼 생각이다.

천명을 기존으로 했을때 덕만의 나이를 추적하는 방법은 없다. 단지, 천명이 낳았다는 춘추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춘추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603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03년 8월은 신라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603년 8월 고구려와 신라가 경기도 영역을 걸고, 고구려는 잃어버린 옛영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이고, 신라는 대 중국 교역로의 교두보를 잃어 버릴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신라국운을 걸고,  한수에서 일대 결전을 벌인다. 이때, 진평왕은 손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는 고구려 군을 북한산성(한수) 전쟁(투)에서 무찔러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한가위와 추석과 중추절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같은 날짜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명절이다. 공교롭게 중첩되었을 뿐이다. 광복절과 한가위가 겹치는 것처럼 말이다. 광복절은 광복절이고 추석은 추석이고 한가위는 한가위 일뿐이다. 603년 8월 이때의 승전을 기념하여 중추절이 생겼다. 이에 관한 글은 별도로 포스팅 할 예정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춘추가 603년에 태어 났다면, 천명의 대략적인 나이를 추측할 수가 있다. 천명이 15세~20세에 춘추을 낳았다면, 천명은 584~589년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천명의 언니인 덕만의 탄생 시기는 582~588년 사이가 된다. 그러니 덕만은 왕위에 오르는 632년에는 45~51세가 된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천명과 덕만이 동복이란 어떠한 기록도 없다. 그런데 잘못된 가정이 덕만을 40중~50초반에 왕에 등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대참사가 발생되었다. 만약, 이 사실을 죽은 선덕여왕이 알았다면, 대성통곡할 일이 아닌가?

칭찬한 답시고, 잘 알지 못하는 길가던 아가씨에게 "아줌마 너무 섹시해요"라고  말을 해도 별 "미친놈을 다 봤나"라는 듯 눈흘김을 당하거나 좋은 말 들어 보기 힘들 것이다. 물론, 아줌마에게 "아가씨 너무 섹시해요" 라고 한다면 아줌마가 별미친놈 하면서 돌아서며 내가 아직도 먹어주는구나 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겠지만 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문제가 아닌 연구자의 문제

사실 덕만을 50대로 설정하는 순간, 덕만과 관련된 삼국.유사 모든 기록은 덕만과 관련이 없는 또는 다 늙은 노처녀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는 있다. 하지만, '모란꽃'사건이나 '지귀심화', 634년 결혼과 연호 변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없어진다.

이 같은 사건들이 40대 넘은 노처녀나 50이 넘은 노처녀가 할 만한 일은 아니다. 또한, 등극 후 3년이 지난 635년 남편을 두었다는 기록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란꽃은 애들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나 아빠랑 결혼할래 엄마랑 결혼할래를 갓 졸업한 아이에게나 했음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관점이 아닌 당대의 관점으로 역사를 본다면

이제 아래의 글을 차분히 현재의 1부일처제 관점이 아닌 과거 수 없이 많은 여자를 거느렸을 진평왕 시대로 돌아가 읽어 보기 바란다.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634년 3년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가정하지 않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해석한다면,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른시기는 절대 20 대를 넘기지 못한다.

화랑세기가 본 덕만과 용춘

화랑세기는 기존의 통설을 통쾌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건 "니들 생각이고~" 너희들이 틀렸다라고, 만약,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저작한 화랑세기를 필사한 필사본이라면, 그동안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한마디로 엿먹은 것이다. 그래도 화랑세기라는 필사본이 발견되었으니 쪽팔림은 있더라도 학계발전을 위해서는 만족할 만 하다.


하지만, 박창화가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모방한 가짜라면 이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1930년대의 종이에 필사된 화랑세기라면, 1930년대에 이미 개인 박창화는 현재 2010년 즈음의 전체 역사학계 보다도 뛰어난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역사학계는 밥숫가락 놓고, 모두 대운하 삽질공사에 일일잡부로 참여하거나  다른일을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덕만과 천명을 화랑세기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도록 하자.

화랑세기는 좀 더 나아가 천명이 덕만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의 출생일이 언제인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화랑세기의 기록들을 토대로 덕만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덕만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정황증거 기록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언제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용춘(龍春)은 무술(戊戌)년(578) 생이고 병진(丙辰)년(596)에 낭주(郎主)가 되었다.〉


공의 손 윗누이인 용명공주는 곧 진흥의 딸이다.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화랑세기 13세 용춘

용춘은 이 기록으로 19살에 13세 풍월주에 올랐다. 용춘의 어미인 지도(기오/흥도)는 금륜(진지)뿐만 아니라, 진흥도 섬겼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도의 딸인 용명공주가 진평을 섬기고, 용춘을 뒤에서 밀어주어서 용춘이 13세 풍월주에 올랐다는 새로운 기록을 보는 것이다. 

그럼 지금 까지 알지 못했던 용수.용춘 누이에 관한 기록이다. 용수, 용명공주, 용춘이거나 용명, 용수, 용춘이 된다. 그런데 지도는 천주공과도 관계해서 17세 풍월주가 되는 염장을 낳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이는 다른 포스팅으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용춘의 나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용춘은 578년생이고, 천명은 588~590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춘추의 아비인 용수는 용춘보다 보다도 나이가 많아야 한다. 그러니 용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576~7년 생이 된다.

결국은 용수는 금륜이 왕위에 오르는 시점에 태어났고, 용춘은 금륜이 왕위를 내주고, 폐위되어 살아가는 동안에 아비의 얼굴을 모르고 컸다는 말이 된다. 용수는 26~28살 전후에 자신보다 최소 나이가 10살 어린신부 천명과 관계를 하여 603년 춘추를 낳은 것이다.
이말은 용수.용춘에게는 이미 본처가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서 낭도로 등용된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호림에 풍월주 지위를 넘겨 주는 시기는 603년이다. 그후 용춘은 조정에 들어가서 열심히 조정일을 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와 천명을 구하려 출동한 대남보는 여래사에서 16세 풍월주이며 미실과 설원랑의 아들인 보종을 활로 상처를 입힌다. 용춘의 충성스런 '대남보'도 이때 기용한것이 아닐까 한다. 용춘의 기록중 대남보의 기록을 보면 꼭 일본의 자객집단인 닌자들을 보는 듯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선덕여왕에서도 가면을 쓰고 음지에서 용춘을 호위하는 음병으로 나온다. 김유신이 죽을때에 유신의 집에서 나오는 한 무리들이 있엇다고 한다. 유신 평생 뒤에서 유신을 호위했지만, 유신이 죽자 울려 떠나 버렸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되겠다.

 (선덕여왕에서는 대남보가 미생의 알려지지 않은 아들중에 하나로 나왔나 봅니다.  또한, 보종(미실/설원랑)을 쏜사람은 임종으로 나왔다고 하네요.. 당연히 용춘의 그림자 무사 대남보 일줄 알았는데.. 소설 선덕여왕은 견적이 안나오는 군요.. 진심으로 견적이 안나오는 원소설을 가지고, 대단하고 재미있는 사극을 만든 mbc에 경의를 표함 ^^)  


건복(建福)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帝)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 전군(殿君)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전군이 (용춘)공에게 물었다. 공이 답하기를 “대왕의 나이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전군은 이에 따라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603년 진평왕은 적자가 없어서 용수를 천명의 부군으로, 즉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용수를 부군으로 삼아 물려주려 했다는 대목이 아니고 적자 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말로 왕후의 소생인 왕자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비를 통해서는 왕자가 있다는 다른 표현인것이다.

603년 시기까지 덕만은 존재가 없는 것이다. 있더라도 나이가 어려서 결혼적령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시기에 용수와 천명이 결혼해서 '춘추'를 낳은 것이다. 

삼국사기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진흥은 7살에 왕위에 올랐고, 화랑세기 12세 풍월주 보리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의 비인 사도는 7살에 진흥에 시집을 갔다고 한다. 또한 12세 풍월주인 보리는 13살에 결혼을 하는데 7살의 어린 신부를 얻어서 업고 궁궐 출입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았을때, 덕만이 있었다면 용수랑 엮어 주지 않았을까? 아무리 어린신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문근영이 고딩때 결혼해서 어린신부였지만 당시는 어린신부 축에도 끼지도 못하고 10세 미만이 되야 어린 신부축에 들었다.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崩)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용춘)공을 마음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596년~603년

"그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崩)다"

덕만이 다 자라기도 전에 마야왕후는 죽었다. 덕만의 어린시절에 모후가 없었다. 그러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이 어린 나이에 죽은 마야가 다큰 성인이 된 시점에 모녀 상봉을 하는 것은 엽기에 가깝고, 매년 여름방학 납량특선에나 나옴직한 설정이 된다. 또한, 진평은 덕만이 어린나이때 승만 손씨를 왕후로 받아 들인것이다. 물론, 승만 왕후가 후비였을때 왕자를 생산해서 왕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단락이 있다. "왕위를 이를 아들이 달리 없었다"는 기록이다. 이는 왕자들은 있지만, 대권(왕권)을 넘기기에는 '왕자들의 자질이 덕만에 비해 부족함이 있다'는 다른 표현이다. 또한, 그전에 천명이 왕위를 받는 수업을 받았음도 짐작할 수 있고, 진평은 전왕들의 선례에 비추어 사위를 왕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가지 579년 13세에 왕위에 오른 진평(567년생)은 603년 37살이 될때까지 적자가 없었다.하고 있고, 603년이 한참 지난후 선덕이 자라면서 왕의 자질이 보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야가 죽고, 덕만이 어려서 왕의 자질을 보일때에도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왕의 자질을 보인 덕만에게 도전자가 생긴다. 다름 아닌 손승만후가 아들을 낳아 덕만을 밀어낼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일찍 죽어 버린다. 이 시기 승만은 왕자를 생산한 비들을 음모를 꾸며서 궁밖으로 축출한다. 어찌 보면 어부지리를 덕만이 한것이고, 아니면, 어리지만 덕만의 정치술수가 뛰어났을 수도 있다.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그 때 승만황후(僧滿皇后)가 …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용춘)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角干)에 봉해졌다. 용수전군이 죽기(薨)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1차로 덕만이 용춘과 관계를 가지고, 천명이 궁을 벗어난 때를 알아보자. 이시기에 덕만은 용봉의 자질을 가지고 결혼을 한때이다.  

승만왕후가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이 일찍 죽었다. 아들이 죽은 원인을 용수.용춘형제로 하고, 지방으로 축출한다. 이는 단순히 용수.용춘을 대상으로 하는게 아닌 덕만의 지지세력을 축출하는 것이다. 그런 용춘이 고구려 원정에 출정하여 큰공을 세운다. 화랑세기에는 고구려에 출정한 전쟁이 어느때인지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서현, 용춘, 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치는데 큰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우리 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 삼국사기 본기 진평왕 51년

위의 기록을 보면, 승만왕후의 자식이 죽은 때는 629년 8월 낭비성 전투 이전시기 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용춘의 나이는 50세가 된다. 603년까지 덕만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629년 8월 낭비성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전에 용봉의 자질을 보이는 덕만이 용춘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승만 왕후의 자식이 죽자, 승만 왕후는 자식이 죽은 용춘.용수 형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이에 지방으로 나아가고, 낭비성 전투를 계기로 서라벌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러니 629년 전후를 기해서 덕만의 나이는 성숙한 성인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여기서 성숙한 여인이란 당대 13세 전후 결혼하는 일반적인 신라 상황을 고려할때, 덕만도 13세~16세 전후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용춘,용수와 관계하고 몇년 후가 629년이 된다. 그러니 덕만이 632년 진평을 이어 왕위에 오른때는 16~20세 이전이 된다. 또한, "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라고 한다. "총명하고, 감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사람들에게나 하는 말이지, 50살 근처에 있는 늙은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은 늙은 용춘과 용수가 젊은 여인 덕만에 할 말이지, 같이 늙은 사람을 대상으로 애를 낳기 위해서 멸사봉공할 수는 없는 말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용수.용춘형제라도 50근처의 여인에게서 후사를 보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많이 양보해도 629년 즈음 용춘의 나이 50일때 덕만은 20초반을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로써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의 기록을 토대로 덕만의 나이를 유추해 보았다.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서이던 위서이던 관계없이 상당히 합리적으로 기술되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살펴봐도 덕만이 50세의 노파로는 왕위에 올랐다고 볼 근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마야의 소생으로 천명을 기록한 것 같지만, 화랑세기에는 천명의 어미로 마야를 묘사한 대목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여전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다르게 천명의 모후가 마야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만, 천명이 덕만보다 나이가 아주 아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마야의 여식으로 천화, 천명, 덕만이다. 천화는 용수에게 시집을 갔다. 용수가 천명과 혼인을 하자, 천화는 추후 603년 낭비성 전투에 용춘과 같이 참여했던 백룡에게 다시 시집을 간다.  그러니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는 잘못되었다고 반박을 하는 셈이다.


덕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심층해부 시리즈

화랑세기는 단 한줄도 인용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토대로 덕만이 현재의 이요원의 나이가 아닌 어린 아역을 해서 주목을 받았던, 남지현 나이때 왕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시리즈 글을 기시로 송고했었다.

위 기사들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또는 마야 이전 황후의 소생이다.

셋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넷째, 천명은 정비인 마야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마야의 후손으로는 덕만 말고도 또다른 자매(들)이 있다.  설령, 덕만과 천명이 같은 마야의 소생일지라도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일곱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80년생이며 한국나이 30살인 이요원보다도 어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의 아역역할을 한 남지현은 2009년 현재 15세이다. 덕만은 실제로 632년에 15~18세 정도에 늦어도 20세 전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다음은 신라사 연구의 전설이며 철옹성으로  통하는 <성골>, <진골>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성골, 진골의 허구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만으로 얼마나 잘못된 역사 상식속에서 살아왔는지 조목조목 파헤칠 예정이다. 물론, 단지 예정이지 꼭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기사를 송고하는 중간 중간에 간간히 언급을 할 것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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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케케 2009.08.10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전희 헷갈려 .... 암튼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음다.

  3. dar 2009.08.10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론은 드라마는 구라라는거네요.ㅡ;;
    하긴 좀 전체적으로 이상하긴했어요
    먼가 않 맞는느낌?
    드라마는 드라마니 역사와 다르다<<라고 우리나라 pd들은 그러는데.ㅡㅡ
    그럼 이름을 왜 역사이름으로 쓰는건지???
    이름 전혀다르게해서 이건 퓨전사극이다<라고 할것이지
    우리나라는 요즘 특히 드라마에서 역사왜곡이 심하네요.
    PD들 역사 공부 점 해야겠음

  4. BlogIcon news119 2009.08.10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노력 많이 하셨네요. 초딩때 삼국사기를 열심히 읽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심오한 글은 첨이어요~

  5. 물음표 2009.08.10 1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기쁜 날 되세요.

  6. 백마강 2009.08.10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난 노력의 산물입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나게 봤습니다 ^^
    역사라는게 기록이 모두 옳다고 할수 없듯이 유추한 자의 기록도 옳다고 볼순 없겠죠

    • BlogIcon 갓쉰동 2009.08.10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엄청난 노력에 비해서 성과는 별루네용.. ㅠ.ㅠ.

      맞습니당.. 누가 더 합리적인가의 싸움이지요.. ㅋㅋ

  7. BlogIcon Nehe 2009.08.10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정말 유익한 글이였습니다~

  8. BlogIcon labyrint 2009.08.11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걸 연구하셨네요...

    역사학 교수님도 갓쉰동님처럼 자세한 연구는 하지 못한 것 같아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9. 현아엄마 2009.08.11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았습니다. 재미있네요^_^
    그럼 여기서 드리는 질문하나!
    유신은 덕만공주보다 한참 아래연배이지요?
    지금 드라마상에서는 유신과 덕만공주가 러브라인인데, 유신이 김춘추의 셋째딸과 결혼한다고 알려져있는데.. 드라마상에서는 천명이 15~6세에 낳은설정이자나요.. 지금 유신은(엄태웅) 아무리봐도 서른전중반인데..ㅋㅋ 내생각으로는 김춘추 결혼도 멀은것 같은데.. 언제 셋째딸 기다리나.. ㅎㅎㅎㅎ 아니면 부인중 하나가 김춘추의 셋째딸인건가요.. 드라마 설정으로 유신이 더 어리다고 한번 지나가듯이 나왔기도 했는데..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오면서 너무 나이를 먹었나..)ㅎㅎ 알려주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1 1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춘추 셋째딸은 문희와의 사이에 난 지조부인인데요..
      유신과 결혼한 때는 유신이 한갑인 655년에 합니당..
      이때 지조는 꽃다운 15~6세 정도지용..

      춘추와 문희의 결혼은 626~628년 사이이구용..

      화랑세기에 의하면 춘추 24세 바로 직전에 결혼한다고 하네용.. 603년 생이니 626년이 되는군요.. 드라마상 최소 앞으로 20년후가 되겠습니당.

  10. BlogIcon 관찰사 2009.08.11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

  11. BlogIcon 구여사 2009.08.28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를 보면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의문들이 풀리는 글이었습니다. ^^

    역사드라마를 보는 매력은 이런 것인가 봅니다.ㅎㅎㅎ

  12. BlogIcon jocuri online 2011.08.25 0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을 지키기 위해 중악으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13. 2011.11.03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4. 2011.11.03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BlogIcon Mumbai Car Hire 2011.12.26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Really great work,I would like to join your blog anyway.24세 바로 직전에 결혼한다고 하네용.. 603년 생이

  16.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7. BlogIcon Discount offers in India 2012.11.22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라당 후보, 장상 민주당 후

  18. BlogIcon internet marketing 2013.02.18 1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9. BlogIcon internet marketing 2013.02.18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치의 가감도 없이 왜곡도 없어야 하는데 기존 통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안목도 없고, 능력도 없이 왜곡하고 있지요. 사실 왜곡이 아니라.. 수준이 낮은 거지만.. 알아야 왜곡도 하는 거지요.. 모르면 왜곡도 못해요.. 모르고 한일은 그냥 무식하다고 하는 겁니다.

  20. BlogIcon internet marketing 2013.02.18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안목으로 쓰는게 아니다 이미 일어난사실을 한치의 가감도 없이 왜곡도 피하며 그 옳고 그름을 읽는 사람이 판단할것을 맡겨두고 적어가는 일종의 계산서다. 이렇듯이나 비뚤어진 사고방식으로 "모든것을 거꾸로!"를 외치고 싶다면 일본의 후쇼샤는 좋아 할것이다. 동지의식에........

  21. BlogIcon real estate 2013.02.18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치의 가감도 없이 왜곡도 없어야 하는데 기존 통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안목도 없고, 능력도 없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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