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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성조황고>라 불리운다. 또한, 김유신(엄태웅)이 비담(김남길)의 술수에 속아 <우산국(울릉도)>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 선덕여왕 덕만(이요원)은 김유신에게 밀서를 주고 서쪽 변경을 염탐하도록 밀명을 내린다.

일단 선덕여왕시기에 우산국(울릉도)를 쓸 수 있는 말인지는 지금 논한다면 글이 길어지니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자. 다음 포스팅을 본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별도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덕만 "성조황고"를 쓸 수 있을까?

밀서에 다음과 같은 황제의 밀서임을 알리는 단어가 들어간다. 덕만의 수결이 아닌 <성조황고(聖祖皇姑)>의 덕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선덕여왕은 죽은 다음에 사용하는 시호 용어이니 선덕여왕 당시에 선덕여왕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된다.
 


우리는 잠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역사를 거슬러 진흥왕 말년의 시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진흥왕은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자신이 옥새를 맡긴 <새주> 미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자신의 측근이라고 믿었던 설원에게 밀서를 주면서 미실을 차단할것을 주문하지만 설원은 미실의 편에 서서 진흥왕이 미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반대로 진흥왕을 암살할것을 모의하고, 실천하려 독을 들고 들어간다.


이때 준 밀서가 미실의 손에서 설원의 손으로 넘어간다. 만약, 미실이 설원을 배신한다면 협박 보험용으로 써먹으라고 준다. 이 밀서는 다시 설원에게서 미실의 손을 거처 소화의 손으로 다시  덕만에게 넘어가고, 덕만이 숨겨둔 장소를 비담에게 알려 비담의 손에 들어간다. 비담이 밀서를 공개했을 때는 다음 사진처럼 나온다. 밀서의 형식이 아닌 공문서의 형식을 띄고 있고, 무신년 <간지>와 <옥새>가 명확히 찍혀있다. 

무신년 3월(588년) 진펴왕 10년

무신戊申
588년
신   라 :  진평왕 10년
백   제 :  위덕왕 35년
고구려 :  평원왕 30년

무신년 년도는 고사하고 몇가지 문제가 있으니 미실, 비담 덕만 등은 당연히 의문을 품는게 정상적이다. 옥새를 주관 하는 자는 미실이다. 진흥왕이 미실의 손을 통하지 않고 <옥새>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미실이 마찬가지로 천신황녀였고 새주인 진평왕때도 옥새는 미실의 수중에 있었다. 하지만 진평왕은 옥새를 미실의 손이 닿지 않는 소화의 손에 숨긴다.

또하나의 극중 논리적 모순은 <간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흥왕은 연호를 사용했다. 무신년은 진흥왕이 죽은 576년보다 12년 후인 588년으로 진평왕 10년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연호가 우선이다. 옥새도 찍히지 않아야 하고, 단지 수결만이 진흥왕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비담이 가지고 있는 신라의적 미실척살 밀서는 <위서>이고 조작된 문서라는 뜻이다.

하지만 머리 좋고 귀신도 잡고, 미실을 닮아  꾀돌이인 비담도 알지 못하고, 어릴적 부터 영민한 덕만도 이를 알지 못한다. 또한, 미실, 설원 등 이해당사자들도 밀지가 <조작>되어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2009/11/0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49회, 진흥왕(이순재) 신라의적 미실(고현정)척살 - 만화보다 못한 미실 죽음 고현정 하차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성조황고 덕만과 천신황녀 미실 누가 더 높을까?

성조황고


밀서에 등장하는 <성조황고>왜 등장하게 되었을까? 정상적인 문서라면 덕만의 이름이 들어가고 <수결>처럼 왕의 싸인이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옥쇄를 찍던지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하필 성조황고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황제인 덕만이니 천신황녀보다 성조황고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글을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성조황고>를 빗대서 미실을 <천신황녀>라는 직위를 부여한적이 있고, 덕만은 <천신황녀>의 직위를 있을 수 없는 보름날 일식 사건으로 미실로 부터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때 <성조황고>가 된것이다.

문제는 <천신황녀>가 <성조황고> 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다. <성조>는 단순히 하늘의 대행자인 성스런 조상을 둔 자란 뜻이고, <천신>은 직접적으로 하늘신이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신 >> 성조의 뜻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덕만은 공주였을때 천신황녀에서 왕이 되었지만 직급이 내려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는 뜻이다.


또한, <황녀>와 <황고>를 대응하여 황녀<<황고라고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이는 별차이가 없는 용법에 지나지 않는다. 많이 양보한다면 <황고>는 여인(아줌마)의 급수이고, <황녀>는 시집안간 처녀(아가씨) 급이다. 요즘은 처녀들한테 아줌마 하면 기분이 나쁜것처럼 당시에도 처녀에게 아줌마라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뻤을 것이다. 오히려 아줌마를 <아가씨>라고 불려주면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드라마 내용상 미실은 <황녀>의 직급을 받을 수 없다. 미실은 미천한 가문의 자손으로 그리고 있는데 어찌 <황녀>일 수 있으며, 시집을 가고 늙은 노구인 미실이 <황녀>가 될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성조>보다 높은 단계인 <천신>의 지위까지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냥,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성조황고>를 염두해 두고 미실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만든  조어인 <천신황녀>는 만들어 낼수 없는 조어라는 뜻이다. 또한, <황:皇>의 단어는 황제만이 쓸수 있는 단어이다. 어쨌든,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정체를 알수 없는 단어들이 나오지만 알고보면 웃어버릴 일이 넘쳐난다.

덕만은 왜 성조황고라 불리우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631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난을 일으키고, 진평왕이 난을 진압한다. 칠숙이 난을 일으키는 이유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줄 알았는데 여자인 덕만이 왕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복불복의 심정으로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를 한다. 하지만, 진평왕이 사전에 칠숙이 난을 일으킨다는 정보를 듣고, 난을 조기 진압해 버린다. 역사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칠숙의 난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2009/07/26 -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하지만, 덕만이 왕이 되지만 불평불만 세력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덕만은 난을 진압하고 귀족들에게 자신이 왕이 되는데 복속할것을 요구하게 되고 자신이 진평왕의 뒤를 이를 정통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귀족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충성 맹세를 요구한다. 그래서 귀족들은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올리고 충성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조황고>란 성스런 조상을 둔 여황제가 되는 것이다. 성조황고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2009/07/28 -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덕만이 성스런 황제를 조상으로 두었으니 왕위를 잇는데 정통성이 있다는 뜻이니, 칠숙처럼 불평불만하지 말고 정통성에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이다. 위에서 잠시 <황녀>와 <황고>의 차이를 언급했듯이 <황녀>는 아가씨 급이고, <황고>는 아줌마급이다.

또한, <고(姑)
는 여인을 존칭해서 부르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도 덕만이 <처녀>가 아니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 왕력편에 덕만 남편으로 <음갈문왕>이 있었다고 기록한것이다.


결론은 미칭에 불과한 <성조황고>를 밀서에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조황고는 덕만이 아닌 아랫사람들이 덕만을 부를때 쓸 수 있는 용어이지, 덕만 스스로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다. 한마디로 신하들이 "만세 만세 폐하"라고 하는데 황제인 덕만이 스스로 "<만세 만세 폐하>"라고 쓰는 꼴이다. 설령 백배 양보해서 <성조황고>를 사용한다고 해도 <성조황고 덕만>이라고 유신의 밀서에 써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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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라이너스™ 2009.11.28 0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벌써 주말입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2. 임현철 2009.11.28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배우고 가네요.

  3. BlogIcon 영웅전쟁 2009.11.28 0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반쯤 보고 나중에 오지요.
    오늘 블로그님들 모임있어 지금 가야한다는 ㅎㅎㅎ
    잘보고 갑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4. BlogIcon 푸른솔™ 2009.11.28 0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조황고....
    처음 듣는 말이라서 많이 의아했는데...
    잘 배웠습니다.

  5. BlogIcon 탁발 2009.11.28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 리뷰만 따로 엮으면 재미있을 듯 하네요.

  6. BlogIcon rinda 2009.11.28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스로 성조황고를 쓰니 웃긴 꼴이지요.
    드라마 작가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고 대본을 써야할텐데
    또 아쉬워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7. BlogIcon labyrint 2009.11.28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조황고가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네요....
    잘 읽었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8. BlogIcon 레오 ~ 2009.11.28 1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복잡하군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

  9. 갓쉰동최고 2009.11.29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스개 소리로 우라나라나 중국은 일본의 천황을 싫어한다죠
    천황이면 조선의 왕보다도 위인것은 당연하고
    황제를 뜻하는 천자 보다도 위이니 말이에요 ㅋㅋㅋ

    • BlogIcon 갓쉰동 2009.11.30 1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아용.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불편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현인신이라고 하니.. 다들 자신들이 하늘의 아들이이고 대행자인뎅.. ㅋㅋ

  10. 갓쉰동님 광팬 2009.11.30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면 작가들은 한문공부 안하나봅니다^^;;

  11. 은루히 2009.12.02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개소문이 드라마로 자주 나오는 것처럼(-아버지에게 들은 얘기
    선덕여왕도 다시 한번 또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선덕여왕 해외로 수출한다던가.....
    뭐 작가 입장에서는 돈이 다 겠지만요

    • BlogIcon 갓쉰동 2009.12.02 0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개소문을 자주한것 같지는 않아용.. 조금씩 등장해지용. 그리고 너무 텀이 길지용.. 월드컵 주기보다 기니..

      아는 사람 없으니 그나마 난데...상식에 가까운 기본적인건 수정하고 내 보냈음.. 하는 바람만이 있네용.. ㅋㅋ

  12. BlogIcon best emergency sleeping bag 2012.11.01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

  13. BlogIcon dehydrated foods walmart 2012.12.10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이는 한때 꿀벅지라는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꿀벅지라는 말이 가지는 성적인 취향임을 알았을 때 유이는 꿀벅지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성조황고>라 불리운다. 또한, 김유신(엄태웅)이 비담(김남길)의 술수에 속아 <우산국(울릉도)>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 선덕여왕 덕만(이요원)은 김유신에게 밀서를 주고 서쪽 변경을 염탐하도록 밀명을 내린다.

일단 선덕여왕시기에 우산국(울릉도)를 쓸 수 있는 말인지는 지금 논한다면 글이 길어지니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자. 다음 포스팅을 본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별도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덕만 "성조황고"를 쓸 수 있을까?

밀서에 다음과 같은 황제의 밀서임을 알리는 단어가 들어간다. 덕만의 수결이 아닌 <성조황고(聖祖皇姑)>의 덕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선덕여왕은 죽은 다음에 사용하는 시호 용어이니 선덕여왕 당시에 선덕여왕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된다.
 


우리는 잠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역사를 거슬러 진흥왕 말년의 시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진흥왕은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워 오자 자신이 옥새를 맡긴 <새주> 미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자신의 측근이라고 믿었던 설원에게 밀서를 주면서 미실을 차단할것을 주문하지만 설원은 미실의 편에 서서 진흥왕이 미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반대로 진흥왕을 암살할것을 모의하고, 실천하려 독을 들고 들어간다.


이때 준 밀서가 미실의 손에서 설원의 손으로 넘어간다. 만약, 미실이 설원을 배신한다면 협박 보험용으로 써먹으라고 준다. 이 밀서는 다시 설원에게서 미실의 손을 거처 소화의 손으로 다시  덕만에게 넘어가고, 덕만이 숨겨둔 장소를 비담에게 알려 비담의 손에 들어간다. 비담이 밀서를 공개했을 때는 다음 사진처럼 나온다. 밀서의 형식이 아닌 공문서의 형식을 띄고 있고, 무신년 <간지>와 <옥새>가 명확히 찍혀있다. 

무신년 3월(588년) 진펴왕 10년

무신戊申
588년
신   라 :  진평왕 10년
백   제 :  위덕왕 35년
고구려 :  평원왕 30년

무신년 년도는 고사하고 몇가지 문제가 있으니 미실, 비담 덕만 등은 당연히 의문을 품는게 정상적이다. 옥새를 주관 하는 자는 미실이다. 진흥왕이 미실의 손을 통하지 않고 <옥새>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미실이 마찬가지로 천신황녀였고 새주인 진평왕때도 옥새는 미실의 수중에 있었다. 하지만 진평왕은 옥새를 미실의 손이 닿지 않는 소화의 손에 숨긴다.

또하나의 극중 논리적 모순은 <간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흥왕은 연호를 사용했다. 무신년은 진흥왕이 죽은 576년보다 12년 후인 588년으로 진평왕 10년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연호가 우선이다. 옥새도 찍히지 않아야 하고, 단지 수결만이 진흥왕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비담이 가지고 있는 신라의적 미실척살 밀서는 <위서>이고 조작된 문서라는 뜻이다.

하지만 머리 좋고 귀신도 잡고, 미실을 닮아  꾀돌이인 비담도 알지 못하고, 어릴적 부터 영민한 덕만도 이를 알지 못한다. 또한, 미실, 설원 등 이해당사자들도 밀지가 <조작>되어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2009/11/0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49회, 진흥왕(이순재) 신라의적 미실(고현정)척살 - 만화보다 못한 미실 죽음 고현정 하차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성조황고 덕만과 천신황녀 미실 누가 더 높을까?

성조황고


밀서에 등장하는 <성조황고>왜 등장하게 되었을까? 정상적인 문서라면 덕만의 이름이 들어가고 <수결>처럼 왕의 싸인이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옥쇄를 찍던지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하필 성조황고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황제인 덕만이니 천신황녀보다 성조황고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글을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성조황고>를 빗대서 미실을 <천신황녀>라는 직위를 부여한적이 있고, 덕만은 <천신황녀>의 직위를 있을 수 없는 보름날 일식 사건으로 미실로 부터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때 <성조황고>가 된것이다.

문제는 <천신황녀>가 <성조황고> 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다. <성조>는 단순히 하늘의 대행자인 성스런 조상을 둔 자란 뜻이고, <천신>은 직접적으로 하늘신이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신 >> 성조의 뜻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덕만은 공주였을때 천신황녀에서 왕이 되었지만 직급이 내려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는 뜻이다.


또한, <황녀>와 <황고>를 대응하여 황녀<<황고라고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이는 별차이가 없는 용법에 지나지 않는다. 많이 양보한다면 <황고>는 여인(아줌마)의 급수이고, <황녀>는 시집안간 처녀(아가씨) 급이다. 요즘은 처녀들한테 아줌마 하면 기분이 나쁜것처럼 당시에도 처녀에게 아줌마라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뻤을 것이다. 오히려 아줌마를 <아가씨>라고 불려주면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드라마 내용상 미실은 <황녀>의 직급을 받을 수 없다. 미실은 미천한 가문의 자손으로 그리고 있는데 어찌 <황녀>일 수 있으며, 시집을 가고 늙은 노구인 미실이 <황녀>가 될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성조>보다 높은 단계인 <천신>의 지위까지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냥,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성조황고>를 염두해 두고 미실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만든  조어인 <천신황녀>는 만들어 낼수 없는 조어라는 뜻이다. 또한, <황:皇>의 단어는 황제만이 쓸수 있는 단어이다. 어쨌든,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정체를 알수 없는 단어들이 나오지만 알고보면 웃어버릴 일이 넘쳐난다.

덕만은 왜 성조황고라 불리우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631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난을 일으키고, 진평왕이 난을 진압한다. 칠숙이 난을 일으키는 이유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줄 알았는데 여자인 덕만이 왕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복불복의 심정으로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를 한다. 하지만, 진평왕이 사전에 칠숙이 난을 일으킨다는 정보를 듣고, 난을 조기 진압해 버린다. 역사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칠숙의 난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2009/07/26 -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하지만, 덕만이 왕이 되지만 불평불만 세력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덕만은 난을 진압하고 귀족들에게 자신이 왕이 되는데 복속할것을 요구하게 되고 자신이 진평왕의 뒤를 이를 정통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귀족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충성 맹세를 요구한다. 그래서 귀족들은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올리고 충성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조황고>란 성스런 조상을 둔 여황제가 되는 것이다. 성조황고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2009/07/28 -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덕만이 성스런 황제를 조상으로 두었으니 왕위를 잇는데 정통성이 있다는 뜻이니, 칠숙처럼 불평불만하지 말고 정통성에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이다. 위에서 잠시 <황녀>와 <황고>의 차이를 언급했듯이 <황녀>는 아가씨 급이고, <황고>는 아줌마급이다.

또한, <고(姑)
는 여인을 존칭해서 부르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도 덕만이 <처녀>가 아니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 왕력편에 덕만 남편으로 <음갈문왕>이 있었다고 기록한것이다.


결론은 미칭에 불과한 <성조황고>를 밀서에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조황고는 덕만이 아닌 아랫사람들이 덕만을 부를때 쓸 수 있는 용어이지, 덕만 스스로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다. 한마디로 신하들이 "만세 만세 폐하"라고 하는데 황제인 덕만이 스스로 "<만세 만세 폐하>"라고 쓰는 꼴이다. 설령 백배 양보해서 <성조황고>를 사용한다고 해도 <성조황고 덕만>이라고 유신의 밀서에 써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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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라이너스™ 2009.11.28 0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벌써 주말입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2. 임현철 2009.11.28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배우고 가네요.

  3. BlogIcon 영웅전쟁 2009.11.28 0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반쯤 보고 나중에 오지요.
    오늘 블로그님들 모임있어 지금 가야한다는 ㅎㅎㅎ
    잘보고 갑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4. BlogIcon 푸른솔™ 2009.11.28 0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조황고....
    처음 듣는 말이라서 많이 의아했는데...
    잘 배웠습니다.

  5. BlogIcon 탁발 2009.11.28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 리뷰만 따로 엮으면 재미있을 듯 하네요.

  6. BlogIcon rinda 2009.11.28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스로 성조황고를 쓰니 웃긴 꼴이지요.
    드라마 작가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고 대본을 써야할텐데
    또 아쉬워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7. BlogIcon labyrint 2009.11.28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조황고가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네요....
    잘 읽었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8. BlogIcon 레오 ~ 2009.11.28 1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복잡하군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

  9. 갓쉰동최고 2009.11.29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스개 소리로 우라나라나 중국은 일본의 천황을 싫어한다죠
    천황이면 조선의 왕보다도 위인것은 당연하고
    황제를 뜻하는 천자 보다도 위이니 말이에요 ㅋㅋㅋ

    • BlogIcon 갓쉰동 2009.11.30 1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아용.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불편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현인신이라고 하니.. 다들 자신들이 하늘의 아들이이고 대행자인뎅.. ㅋㅋ

  10. 갓쉰동님 광팬 2009.11.30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면 작가들은 한문공부 안하나봅니다^^;;

  11. 은루히 2009.12.02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개소문이 드라마로 자주 나오는 것처럼(-아버지에게 들은 얘기
    선덕여왕도 다시 한번 또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선덕여왕 해외로 수출한다던가.....
    뭐 작가 입장에서는 돈이 다 겠지만요

    • BlogIcon 갓쉰동 2009.12.02 0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개소문을 자주한것 같지는 않아용.. 조금씩 등장해지용. 그리고 너무 텀이 길지용.. 월드컵 주기보다 기니..

      아는 사람 없으니 그나마 난데...상식에 가까운 기본적인건 수정하고 내 보냈음.. 하는 바람만이 있네용.. ㅋㅋ

  12. BlogIcon best emergency sleeping bag 2012.11.01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

  13. BlogIcon dehydrated foods walmart 2012.12.10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이는 한때 꿀벅지라는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꿀벅지라는 말이 가지는 성적인 취향임을 알았을 때 유이는 꿀벅지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선덕여왕 52회에서 미실의 난을 진압한 덕만은 신라 27대왕에 오른다. 등극과 함께 용춘을 상대등에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을 병부령에 임명한다.

정상적인 선덕여왕의 극중흐름이라면 미실의 난은 병자년 615년에 일어나야 극중 리얼리티가 살아 나는 것이지만, 그동안 드라마 선덕여왕이 아닌 드라마 미실을 찍고 있던 선덕여왕 제작자는 자신들의 주장인 드라마 선덕여왕의 재위기간 17년을 남은 12회로는 덕만의 본모습을 그릴 수 없다는 판단에 미실의 난을 631년에 일어난 칠숙과 석품의 난으로 바꾸어 버렸다. 극중에서 16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같은 해에 일어난 일로 극화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실의 난을 극화 하면서 제작자는 극중 리얼리티를 해치는 우를 범했다. 병자년 615년에 덕만이 중과세안과 화백회의 중망제(다수결)를 만들려 하자 바로 미실이 정변을 일으키고 덕만을 잡으려는 칙령을 발표한다. 이때 미실은 기유년(649년)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다시 631년 칠숙의 난으로 돌변한다.  

작가의 창작의 자유와 한계 

사실 소설이나 사극이나 드라마나 상관없이 특정한 사건을 배제하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작가의 선택사항이다. 이는 작가의 창작의 자유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비판하거나 비난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지귀설화>나 <미혼모 문희의 불쇼>나 덕만의 지기삼사 중 <모란꽃 병풍>이나 덕만의 예지력 중의 백제군의 게릴라가 독산성에 침입한 것을 알았다는 영묘사 <옥문지 사건>은 나오지 않아도 이를 비판하면 안된다.  

특정한 역사적인 기록의 사건에 대해서 작가가 인용하고 극에 노출을 했다면, 사건의 해석상의 문제는 <창작>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하는건 불문가지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견해나 해석이 아닌 <사건>에 기록이 존재한 인물 기초 정보 설정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한, <사건>의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이를 극에서 충분히 녹여내는 건 작가의 영역에 속한다. 이를 녹여내지 못한다면 비판받아야 하는 건 자명하다.  

그런면에서 미실의 난이 칠숙의 난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극에 칠숙의 난이 미실의 난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615년 전후의 사건으로 그리고 있던 극중 시제가 갑자기 631년 칠숙의 난으로 15년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면, 덕만이 왕이 되고 유신이나 극중 인물들이 수염을 달고 10년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장치를 마련했어야 한다.  이는 사극이 아닌 일반 드라마에서도 기초상식에 해당한다.  

어찌 되었던, 제목은 선덕여왕이였지만, 실제 제작가가 의도한 대로 미실 중심으로 극이 전개 되므로해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덕만은 미실의 그늘에 가리운 존재가 되었으며, <덕치>보다는 <공포정치>로 미실 따라하기에 여념이 없다. 덕만이 왕위에 오르고 죽고 나서 왜 시호가 <선덕>이였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은 극중에 없다는 뜻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작가가 비판 받는 이유

 역사학계의 미스테리중에 하나는 덕만이 몇살에 왕위에 올랐는가?하는 의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반적인 통설에 따르면, 덕만은 50세 안팎에 왕위에 올랐다는 설이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항상 오른건 아니다. 어찌되었던 덕만은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천명의 동생이 아니고, 천명의 누이이기 때문에 극중에서 천명과 쌍둥이로 그런것은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논란이 되고 있는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여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는 설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기존 통설과 절충안으로 덕만과 천명을 쌍둥이로 만들어 <어출쌍생>이라는 기발한 장치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덕만이 천명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동생으로 그려져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화랑세기와 기존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을 절충했지만, 화랑세기의 기록를 전혀 배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내용이 덕만에게는 3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기록은 철저히 배격하고 있고,  천명이 덕만보다 더 오래 천수를 누렸다는 기록을 버리고 <대남보>의 잘못된 화살에 죽여 버렸다. 이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또한, 극중에 <장치>없이 드라마 갖춰야할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극중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부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선덕여왕은 전체적으로 극중 개연성을 만드는데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고대 신라 경주로 가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네비게이션이 엉뚱하게 제주도나 저 멀리 삼천포 달나라에 가버리고 말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신라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글쓴이가 선덕여왕 작가의 사극을 비판하는 줄 아는 분이 있다. 위에 언급했지만 창작의 자유는 지켜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건을 해석하는 건 작가의 영역에 속한다. 다만, 극중 장치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갈지자 횡보를 하는 드라마 기초 상식인 극중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부재는 비판의 칼을 드리댄다.

이는 사극이 갖춰야할 기본을 비판하는게 아니고 일반 드라마가 갖춰야 할 기본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알려면 <다큐>를 보지 왜 드라마를 보냐거나 재미를 위해서 작가가 일부러 그랬다"는 드라마, 역사 둘다 모르고 네티켓도 없는 유아틱한 댓글을 달지 말아 주었음 한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사실 덕만이 칠숙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왕위에 올랐는지, 칠숙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 왕이 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는 <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632년 봄 1월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이설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딴지맨 일연은 덕만이 인평원년 634년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14년간 다스렸다고 전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은 580년생이다. 덕만은 632년에 왕위를 잇는다. 이때 덕만은 53세이다,  90살이 넘은 흑발마녀 미실처럼 덕만도 늙지 않는 묘약을 먹은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드라마 극이 아닌 실제 역사에 기록된 미실의 난으로 압축된 615년에서 631년 사이에 신라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 났을까? 또한, 덕만이 632년에 27대 왕으로 등극하고 10년을 건너뛰고 극중 시제인 640년 사이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일단, 덕만이 왕이 되었을 때 몇살이였는지 부터 알아 보도록 하자. 
 

성조황고? 어린 덕만은 불쌍하다.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 632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근거로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라는 설이 통설이다. 하지만, 통설의 잘못된 점이 있다. 일단, 덕만이 천명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란 근거는 춘추가 왕이 될 때의 기록에서부터 비롯된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湌) 서현의 딸이다.

 이기록에는 춘추에 출자에 대한 이설이 있음을 <당서>의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고, 김부식은 <당서>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일부일처제라는 환상을 깨면 개안이 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상식을 알 필요가 있다 왕은 1부1처가 아니다. 왕후와 후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기초적인 상식을 항상 상기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라고만 했으니 천명부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모른다는게 상식이다. 왜냐 하면, 이미 덕만의 어머니가 마야부인인 줄을 알고 있는 김부식이나 일연은 상식에 기반하여 천명부인의 어머니를 마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존 통설은 상식에 반하여 덕만의 기록을 끌어와서 천명도 덕만과 같은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삼국유사 태종 김춘추공

 인터넷의 잘못된 김춘추의 생년들

 


김춘추가 661년 5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면, 김춘추는 603년생이 된다. 인터넷에 김춘추가 태어난 때를 602년부터 604년까지 다양하게 나온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상식이 드라마 뿐만 아니고 인터넷에서도 횡횡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나이계산법은 현재 우리가 계산하는 나이법과 동일한 태어날때 부터 한살을 먹고 들어간다. 그래서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있는 계산법은
(몰년 혹은 기준년)-나이+1년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춘추는 661년 - 59세 + 1 = 603년생이 되는 것이다.  

기존통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춘추가 603년에 태어났으니,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대략 13~20세 전후에 춘추를 낳았다고 한다면 584~589년까지 태어났다고 본 것이다. 천명부인은 대략 김진평(백정)이 579년 13(화랑세기)~15세(통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린나이에 낳을 수도 있다.  

문제는 위에서 왕가의 기본상식인 초년의 정비의 후손이나? 아니면 후비의 후손이냐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 하기 바란다. 이 기록은 천명의 출생년을 추측하는데 만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말하지 않는 천명과 덕만는 마야의 자식?

 


하지만, 기존 통설은 천명의 어머니와 덕만의 어머니는 같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접근을 시작한다. 천명이 584~589년 사이라면, 덕만이 진평의 장녀라고 했으니 천명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는 접근이다. 그래서 덕만은 583~588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설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여기도 또한번의 통설의 잘못된 접근이 시작된다. 진평왕의 장녀 덕만은 진평왕의 모든 자식들의 장녀일까 하는 문제이다. 

 김춘추가 왕이 되었을 때 정비는 문명(문희)왕비 였다. 그렇다고 해서 불쇼의 미혼모 문희가 김춘추의 첫번째 부인 소생이고 642년 대야성에 죽은 고타소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될 수 없다. 법률적 어머니는 될 수 있지만 말이다. 또한, 김유신의 첫번째 아들인 <원술>이 춘추와 문희의 소생인 지소(조)부인의  생물학적 첫번째 아들일 수 있지만, 원술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영모>의 소생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요즘도 자식보다 나이가 어린 부인을 맞이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접근법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장녀가 된다. 그러니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지기삼사의 모란꽃 병풍과 모란씨 에피소드 예와 덕만의 왕이 될때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말은 기존 통설대로 50대의 늙은 노파에게 할 말은 아니다.  

또한, 지귀설화에서 지귀가 아름다운 덕만을 보고 심화가 생겨 몸이 불타 죽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보았을때 이 또한 덕만이 팔팔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증거가 된다.  

더 나아가 덕만은 왕위에 오르고 삼국유사 왕력편에 의하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갈문왕과 결혼을 한다." 남성과는 다르게 적통을 잇기 위해서 50세의 노파가 결혼할 이유는 하등에 없다.  

그러니 드라마 선덕여왕 작가들과 제작진은 여자 왕은 결혼하면 안된다는 여성 차별적 사관을 가지고 있고, 신라 당대의 결혼관과도 배치된다. 성처녀로 만든 덕만은 드라마의 재미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재미를 위해서 세종이 맏아들이라는 설정만큼 생뚱맞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에는 자신이 병석에 누어서 언제 죽을지 알고 묘자리를 보는 상황에서 자신이 무자가 된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를 한다. 이는 덕만이 결혼 생활을 했다는 뜻이고 여러 명의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화룡첨정 성조황고의 허구

 기존 통설을 가장 그럴듯 하게 만들어준 화룡첨정의 마지막은 성조황고(聖祖皇姑)의 허상이다. 황고는 마고, 미고, 니고랑 별차이가 없는 용법이다. 니고(尼姑)는 할머니 중이 아닌 그저 여중인 비구니의 존칭에 지나지 않는다. 성조황고의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해석은 성스런 조상(聖祖)을 둔 <여황제(皇姑)>라는 뜻이다. 의역을 하면 진평왕의 뒤를 이은 적통 여황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할미고, 시어미고>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성스런 늙은 여황제나 성스런 황제의 시어미나 시어미 같이 늙은 황제라면 해석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한, <고(姑)>는  ㉢계집, 여자(), 부녀()의 통칭() 등 상용적으로 사용하는 용법이 있다.  

기록을 토대로한 덕만은 언제 왕위에 올랐을까?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治十四年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634년)에 왕이 되어 14년동안 다스렸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第二十七 善德女王  名德曼.  父眞平王 母 麻耶夫人金氏. 圣骨男尽 故女王立.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治十四年.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이 631~32년에 죽고, 덕만이 왕위에 올랐지만, 정식으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승계한 때는 갑오년 (634년)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14년동안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평이 건복원년 (684년)에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고 직접통치한 것 처럼, 덕만도 634년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고 직접통치를 한것이다. 이 또한, 덕만이 진흥이나 진평이 13세~15세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이은 것 처럼, 덕만도 나이가 어릴때 왕위에 올랐다는 반증이다.


통설을 겉어 치우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해석한다면,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른시기는 절대 20대를 넘길 수가 없다.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는 단 한줄도 인용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토대로 덕만이 현재의 이요원의 나이가 아닌 어린 덕만역으로 주목을 받았던 남지현만한 나이때 왕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시리즈 글을 기시로 송고했었다.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과 천명은 이복자매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역사이야기] - 조선 세종, 신라 덕만, 천명의 기록 비교해 보니

 위의 기사들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의 장녀다.
둘째, 천명이 덕만보다 나이는 많지만,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또는 마야 이전 황후나 후비의 소생이다.
셋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넷째, 천명은 정비인 마야의 후손이 아니였기 때문에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그래서 춘추가 왕위에 오를때도 왕위 승계에서 알천보다 후순위였다.
다섯째, 마야의 후손으로는 덕만 말고도 또다른 자매(들)이 있다.  
설령, 덕만과 천명이 같은 마야의 소생일지라도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일곱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 때, 현재 80년생이며 한국나이 30살인 이요원보다도 어렸다. 

결론, 덕만은 실제로 632년에 15~18세 정도에 늦어도 20세 전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동안인 덕만 이요원이 실제 선덕여왕 덕만역을 해도 되지만, 남지현이 선덕여왕에 등극하기 전후 까지 존재하고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이요원으로 바뀌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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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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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11.19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넷티켓 넷티켓하시는데 님이 네티켓에 좀더 신경을 쓰셔야겠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11.19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115.20.91.74로 들어 오는 아이피에 대응 하지 않습니당.. 차분히 님들 고장의 속담이 어떻게 변천되었나 부터 알고 오시기 바랍니당.. 그리고 도배는 하지 마셈..

      댓글은 지우지 않지만 의미 없는 도배성 댓글은 삭제하니까요..

  3. BlogIcon 모노마토 2009.11.19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평왕이 52년동안 왕을 하다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제가 알기론 덕만이 왕이 될때는 거의 할머니였다고 알고있습니다... 20세가 안되서 왕위와 올랐다면 비담의 난이 일어날때는 30대 중반이라는 이야긴데요.......

  4. BlogIcon pennpenn 2009.11.19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심층직인 분석글 잘 읽고 갑니다.

  5. 저도 갓쉰동님 글에 찬성합니다. 2009.11.19 1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폐경기의 여성을 왕이 될리가 없죠.
    후사가 없는 왕은 그 자체로 왕권이 약한데
    왕권이 강력한 진평왕이 부군으로 올릴리가 없습니다.
    어쨋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선덕여왕이 할머니란 근거는 존재하지 않죠.

    그리고 갓쉰동님. 저 쓰레기같은 도배글은 삭제해버리시죠.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아무리 찾아봐도 선덕여왕이 늙은이란 사실은 없고, 오히려 어린 선덕만 발견하게 된다눈.. ㅋㅋ

      그건 그렇고..저정도는 애교 수준의 댓글이니 냅두는 겁니당.. 잘못알고 있는게 죄는 아니지만 대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데.. 암튼 잘못된 지식의 표본정도로 냅둘랍니다. ㅋㅋ
      이제 알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이 좋은점 아니겠어용.. 잘못된 점을 알게된다는 것이..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6. 하얀가루눈ii 2009.11.19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난 글 잘 읽고 갑니다. 갓쉰동 님 포스트를 즐겨 있는 저로서는 천명, 덕만 이복자매설이 가장 흥미롭네요. (저는 동복자매 설에 좀 더 무게를 두지만요. ㅎㅎ)

    근데 포스팅 된 글을 읽으면 진짜 선덕여왕이 나이 들어서 왕위에 올랐다는게 어불성설이긴 해요. 정말 폐경기의 여성이 왕위에 올라서 후사를 어찌 잇겠다고.. 그리고 지귀설화도 그렇고 그런 걸 보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는군요.

    그러면 마야는 아이를 낳고 얼마 안되서 죽은 건가요?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50여년이란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마야는 자신의 딸이 왕위에 오르는 걸 못보고 죽었다고 하니..

    하나 더 질문이 있어요.
    신라시대에도 일본의 헤이안 시대, 특히 후지와라 가 섭관 정치기 처럼 왕이 정실부인을 동시에 두 명 이상을 둘 수 있었던 거예요? 고려시대를 보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한데, 어떤 글을 읽으니까 그래도 정실은 하나고, 왕위를 이은 아들들이 추존한 황후도 많다고 해서요. 물론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였고 철저히 후궁은 배제되었긴 합니다만...

    그렇게 보면 마야가 진평왕의 첫번째 정실이 아니고, 화랑세기 기록처럼 보명과 미실이 둘다 황후였다고 하는 게 어찌보면 이해도 됩니다만.. 그러면 용수와 천명을 결혼시켜서 용수전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는 마야의 속내는... 이 분 대인배신가요..??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세기에도 동복자매라는 언급은 없었던 같더군요.. 기억이 가물가물..ㅠ.ㅠ.

      진평에게는 덕만이.. 늦동이니 얼마나 귀여웠을가용. 거기에 재기도 발랄하고 민첩하고,, ㅋㅋ

      마야는 어쩌면 대인배 일수동.. ㅋㅋ

  7. BlogIcon 너돌양 2009.11.20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의 선덕여왕 관련 글에는 역사적 근거가 자세히 수록되어있다고 하던데 역시 그렇군요.아무튼 갓쉰동님의 풍부한 역사 지식에 감탄을 합니다

    전 선덕여왕을 보지는 않고. 단지 역사에 조금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선덕여왕의 드라마가 재미있고 배울점이 많은 드라마인건 공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사 왜곡은 아닌 것 같네요. 사실 신라시대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한참 후 고려시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삼국유사뿐이고 화랑세기가 아직 진위여부 논란이 있다고하고 작가 스스로도 이건 허구가 많다고 애초부터 밝혔지만 그래도 아직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초등생들이나 학생들이 보면 머리에 혼란이 오지 않을까 괜히 걱정스럽네요. 머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지만요^^

    아무튼 유익하고 알찬 글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졌나용.. ㅋㅋ

      저는 오히려 역사의 자료가 부족하니 힘써 지켜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작가는 없으니 내맘대로 인가 봅니당.. 관점의 차이가 명확하지용..

      잘보셨다니 ㄳ 합니당.. ㅋㅋ

  8. 갓쉰동 최고 2009.11.20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존 통설에 덕만의 즉위시기가 50세 전후라는 것은 처음 듣네요.
    어린이용 역사책에도 덕만이 젊은시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덕만의 출생년도가 정확하지가 않죠. 들쭉 날쭉하니 고대사부분은 정말
    진실을 찾기가 어렵네요.
    그리고 화랑세기는 천명을 덕만의 동생으로보고 용춘이 덕만과 결혼을 하였으며
    천명과도 결혼을해서 재부가되었다고하는데
    문제는 이 동생이란 언급은 아마도 적통순위에서 밀려서 된듯합니다.
    그리고 이부분은 선화공주와 더불어서 아직도 학계에서 활발히 논쟁중이구요.
    결국 선덕여왕으로인한 신라사에대한 오해는 기존통설과 학게의 주장보다는
    감수도제대로못받은 드라마 선덕여왕과 OST콘서트에 뮤지컬까지 밀어주는 MBC의
    상업적 정책의 영향인듯합니다.
    삼국사기조차 제대로 이해못하는 애들이 통설은 알겠습니까?

    • 갓쉰동 최고 2009.11.20 0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삼국사기가 아니라 화랑세기였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삼국사기를 볼정도면 드라마가 이정도까지는 아니었을테니
      과대평가할 뻔했군요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수설이라고 하지용.. ㅋㅋ 몇개 안될걸용.. 암튼..

      덕만과 천명의 언니냐 동생이냐는 적통 순위와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용.. 단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난 자식인가에 따라 해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순위이지용.. 전체로는 명확하지용.. 동생이 언니가 될수 없고, 언니가 동생이될 수없는 것처럼 용..

      님의 말씀이 맞아용.. 역사책을 읽지 않고 소설책과 드라마만 본 작가들이 알기나 하겠어용.. ㅋㅋ

  9. 소연이 2009.11.20 0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드라마에서 역사적 감동은 얻을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찾는 것은 정말...(음, 요즘은 말 조심을 해야하니까^^;)

    암튼 역사적 사실(?)을 기록을 통해 보여주시니 고맙군요...

    그 시대에 살아보지않은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자신이 "읽은" 내용이 진실인 것처럼 떠드는 것이 참 어리석게 보일때도 있죠. 인터넷의 폐해 일까요...

    역사는 정말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이럴땐 역사학자들이 참 존경스러워요...

    풍부한 역사적 지식에 감탄합니다...많이 배우고 갑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냅.. 읽은게 지식이고 진실이 되니.. 그건 정보에 지나지 않지용. 취사선택을 하고 흡수한 이후에나 자신의 것이 되고 지식이 되고 지혜가 되는 거지요.. 소화하지 않는 정보는 그저 쓰레기일 뿐입니당.. ㅋㅋ

  10. zz 2009.11.22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 뭐 다 괜찮은데요
    글좀...맞춤법이...

  11. 갓쉰동님 광팬 2009.11.23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극에서 여성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모습을 왜 안보여주나 좀 아쉽습니다. 눈 밑을 조금 어둡게 처리하던가 피부색을 탁하게 하던하 해서 나이든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남성들만 수염길고 나이가 드는 것을 보면 여성은 꼭 이쁘기만 해야 하는가 아쉬움이 좀 남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11.24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 말입니당. 여성들의 현실적인 꿈을 드라마로 만들어 주는건지도요.. 여성주의 사극이잖아요.. 선덕여왕.. ㅋㅋ

  12. 레아 2009.12.07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조황고라는 것 중에서 고는 옛고자를 말하는데 그것은 할머니나 혹은 중년의 아줌마를 뜻하는 말로 오히려 덕만이 상당이 늦은 나이에 등극했음을 알수있죠.

  13. 레아 2009.12.07 1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리고 소설선덕여왕의 작가는 선덕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안돼긴 하죠.

  14. BlogIcon onlinemovie 2010.10.15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안돼긴 하죠.

  15. BlogIcon Hairy Pussy 2012.07.12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보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6. BlogIcon Amos 2012.10.14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여자

  17. BlogIcon military meals for sale 2012.11.01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

  18. BlogIcon invisible fence wire gauge 2012.11.06 1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 놀라운 것입니다. 수많은 새로운 브랜드 이름은 다른 가전 제품과 함께

  19. BlogIcon mountain house cans sale free shipping 2012.12.10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막연한 올림픽 참피언이, 우리 자식도 투자를 하면 김연아처럼 할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하면 할수록 김연아의 존재가 다가갈수 없는 넘사벽의 존재라는 것을 실감한것이다. 이런 피겨맘이 많아진다면 피겨는 다시 암흑기로 접어들지 모른다.

  20. BlogIcon waterproof shock collars for dogs 2012.12.22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어난 칠숙과 석품의 난으로 바꾸어 버렸다. 극중에서 16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같은 해에 일어난 일로 극화해버린

  21. BlogIcon filters water well 2013.01.02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왕위에 오르고 죽고 나서 왜 시호가 <선덕>이였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은 극중에 없다는 뜻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52회에서 미실의 난을 진압한 덕만은 신라 27대왕에 오른다. 등극과 함께 용춘을 상대등에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을 병부령에 임명한다.

정상적인 선덕여왕의 극중흐름이라면 미실의 난은 병자년 615년에 일어나야 극중 리얼리티가 살아 나는 것이지만, 그동안 드라마 선덕여왕이 아닌 드라마 미실을 찍고 있던 선덕여왕 제작자는 자신들의 주장인 드라마 선덕여왕의 재위기간 17년을 남은 12회로는 덕만의 본모습을 그릴 수 없다는 판단에 미실의 난을 631년에 일어난 칠숙과 석품의 난으로 바꾸어 버렸다. 극중에서 16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같은 해에 일어난 일로 극화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실의 난을 극화 하면서 제작자는 극중 리얼리티를 해치는 우를 범했다. 병자년 615년에 덕만이 중과세안과 화백회의 중망제(다수결)를 만들려 하자 바로 미실이 정변을 일으키고 덕만을 잡으려는 칙령을 발표한다. 이때 미실은 기유년(649년)이라고 발표한다. 그리고 다시 631년 칠숙의 난으로 돌변한다.  

작가의 창작의 자유와 한계 

사실 소설이나 사극이나 드라마나 상관없이 특정한 사건을 배제하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작가의 선택사항이다. 이는 작가의 창작의 자유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비판하거나 비난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지귀설화>나 <미혼모 문희의 불쇼>나 덕만의 지기삼사 중 <모란꽃 병풍>이나 덕만의 예지력 중의 백제군의 게릴라가 독산성에 침입한 것을 알았다는 영묘사 <옥문지 사건>은 나오지 않아도 이를 비판하면 안된다.  

특정한 역사적인 기록의 사건에 대해서 작가가 인용하고 극에 노출을 했다면, 사건의 해석상의 문제는 <창작>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하는건 불문가지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견해나 해석이 아닌 <사건>에 기록이 존재한 인물 기초 정보 설정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한, <사건>의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이를 극에서 충분히 녹여내는 건 작가의 영역에 속한다. 이를 녹여내지 못한다면 비판받아야 하는 건 자명하다.  

그런면에서 미실의 난이 칠숙의 난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극에 칠숙의 난이 미실의 난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615년 전후의 사건으로 그리고 있던 극중 시제가 갑자기 631년 칠숙의 난으로 15년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면, 덕만이 왕이 되고 유신이나 극중 인물들이 수염을 달고 10년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장치를 마련했어야 한다.  이는 사극이 아닌 일반 드라마에서도 기초상식에 해당한다.  

어찌 되었던, 제목은 선덕여왕이였지만, 실제 제작가가 의도한 대로 미실 중심으로 극이 전개 되므로해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덕만은 미실의 그늘에 가리운 존재가 되었으며, <덕치>보다는 <공포정치>로 미실 따라하기에 여념이 없다. 덕만이 왕위에 오르고 죽고 나서 왜 시호가 <선덕>이였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은 극중에 없다는 뜻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작가가 비판 받는 이유

 역사학계의 미스테리중에 하나는 덕만이 몇살에 왕위에 올랐는가?하는 의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반적인 통설에 따르면, 덕만은 50세 안팎에 왕위에 올랐다는 설이 다수설이다. 다수설이 항상 오른건 아니다. 어찌되었던 덕만은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천명의 동생이 아니고, 천명의 누이이기 때문에 극중에서 천명과 쌍둥이로 그런것은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논란이 되고 있는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여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는 설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기존 통설과 절충안으로 덕만과 천명을 쌍둥이로 만들어 <어출쌍생>이라는 기발한 장치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덕만이 천명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동생으로 그려져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화랑세기와 기존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을 절충했지만, 화랑세기의 기록를 전혀 배제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내용이 덕만에게는 3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기록은 철저히 배격하고 있고,  천명이 덕만보다 더 오래 천수를 누렸다는 기록을 버리고 <대남보>의 잘못된 화살에 죽여 버렸다. 이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또한, 극중에 <장치>없이 드라마 갖춰야할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극중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부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선덕여왕은 전체적으로 극중 개연성을 만드는데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고대 신라 경주로 가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네비게이션이 엉뚱하게 제주도나 저 멀리 삼천포 달나라에 가버리고 말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신라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글쓴이가 선덕여왕 작가의 사극을 비판하는 줄 아는 분이 있다. 위에 언급했지만 창작의 자유는 지켜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건을 해석하는 건 작가의 영역에 속한다. 다만, 극중 장치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갈지자 횡보를 하는 드라마 기초 상식인 극중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부재는 비판의 칼을 드리댄다.

이는 사극이 갖춰야할 기본을 비판하는게 아니고 일반 드라마가 갖춰야 할 기본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알려면 <다큐>를 보지 왜 드라마를 보냐거나 재미를 위해서 작가가 일부러 그랬다"는 드라마, 역사 둘다 모르고 네티켓도 없는 유아틱한 댓글을 달지 말아 주었음 한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631)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

 사실 덕만이 칠숙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왕위에 올랐는지, 칠숙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 왕이 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는 <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632년 봄 1월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이설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딴지맨 일연은 덕만이 인평원년 634년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14년간 다스렸다고 전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은 580년생이다. 덕만은 632년에 왕위를 잇는다. 이때 덕만은 53세이다,  90살이 넘은 흑발마녀 미실처럼 덕만도 늙지 않는 묘약을 먹은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드라마 극이 아닌 실제 역사에 기록된 미실의 난으로 압축된 615년에서 631년 사이에 신라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 났을까? 또한, 덕만이 632년에 27대 왕으로 등극하고 10년을 건너뛰고 극중 시제인 640년 사이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일단, 덕만이 왕이 되었을 때 몇살이였는지 부터 알아 보도록 하자. 
 

성조황고? 어린 덕만은 불쌍하다.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 632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근거로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라는 설이 통설이다. 하지만, 통설의 잘못된 점이 있다. 일단, 덕만이 천명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란 근거는 춘추가 왕이 될 때의 기록에서부터 비롯된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湌) 서현의 딸이다.

 이기록에는 춘추에 출자에 대한 이설이 있음을 <당서>의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고, 김부식은 <당서>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일부일처제라는 환상을 깨면 개안이 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상식을 알 필요가 있다 왕은 1부1처가 아니다. 왕후와 후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기초적인 상식을 항상 상기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라고만 했으니 천명부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모른다는게 상식이다. 왜냐 하면, 이미 덕만의 어머니가 마야부인인 줄을 알고 있는 김부식이나 일연은 상식에 기반하여 천명부인의 어머니를 마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존 통설은 상식에 반하여 덕만의 기록을 끌어와서 천명도 덕만과 같은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삼국유사 태종 김춘추공

 인터넷의 잘못된 김춘추의 생년들

 


김춘추가 661년 5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면, 김춘추는 603년생이 된다. 인터넷에 김춘추가 태어난 때를 602년부터 604년까지 다양하게 나온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상식이 드라마 뿐만 아니고 인터넷에서도 횡횡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나이계산법은 현재 우리가 계산하는 나이법과 동일한 태어날때 부터 한살을 먹고 들어간다. 그래서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있는 계산법은
(몰년 혹은 기준년)-나이+1년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춘추는 661년 - 59세 + 1 = 603년생이 되는 것이다.  

기존통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춘추가 603년에 태어났으니,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대략 13~20세 전후에 춘추를 낳았다고 한다면 584~589년까지 태어났다고 본 것이다. 천명부인은 대략 김진평(백정)이 579년 13(화랑세기)~15세(통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린나이에 낳을 수도 있다.  

문제는 위에서 왕가의 기본상식인 초년의 정비의 후손이나? 아니면 후비의 후손이냐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 하기 바란다. 이 기록은 천명의 출생년을 추측하는데 만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말하지 않는 천명과 덕만는 마야의 자식?

 


하지만, 기존 통설은 천명의 어머니와 덕만의 어머니는 같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접근을 시작한다. 천명이 584~589년 사이라면, 덕만이 진평의 장녀라고 했으니 천명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는 접근이다. 그래서 덕만은 583~588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설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여기도 또한번의 통설의 잘못된 접근이 시작된다. 진평왕의 장녀 덕만은 진평왕의 모든 자식들의 장녀일까 하는 문제이다. 

 김춘추가 왕이 되었을 때 정비는 문명(문희)왕비 였다. 그렇다고 해서 불쇼의 미혼모 문희가 김춘추의 첫번째 부인 소생이고 642년 대야성에 죽은 고타소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될 수 없다. 법률적 어머니는 될 수 있지만 말이다. 또한, 김유신의 첫번째 아들인 <원술>이 춘추와 문희의 소생인 지소(조)부인의  생물학적 첫번째 아들일 수 있지만, 원술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영모>의 소생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요즘도 자식보다 나이가 어린 부인을 맞이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접근법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장녀가 된다. 그러니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지기삼사의 모란꽃 병풍과 모란씨 에피소드 예와 덕만의 왕이 될때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말은 기존 통설대로 50대의 늙은 노파에게 할 말은 아니다.  

또한, 지귀설화에서 지귀가 아름다운 덕만을 보고 심화가 생겨 몸이 불타 죽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보았을때 이 또한 덕만이 팔팔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증거가 된다.  

더 나아가 덕만은 왕위에 오르고 삼국유사 왕력편에 의하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갈문왕과 결혼을 한다." 남성과는 다르게 적통을 잇기 위해서 50세의 노파가 결혼할 이유는 하등에 없다.  

그러니 드라마 선덕여왕 작가들과 제작진은 여자 왕은 결혼하면 안된다는 여성 차별적 사관을 가지고 있고, 신라 당대의 결혼관과도 배치된다. 성처녀로 만든 덕만은 드라마의 재미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재미를 위해서 세종이 맏아들이라는 설정만큼 생뚱맞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에는 자신이 병석에 누어서 언제 죽을지 알고 묘자리를 보는 상황에서 자신이 무자가 된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를 한다. 이는 덕만이 결혼 생활을 했다는 뜻이고 여러 명의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화룡첨정 성조황고의 허구

 기존 통설을 가장 그럴듯 하게 만들어준 화룡첨정의 마지막은 성조황고(聖祖皇姑)의 허상이다. 황고는 마고, 미고, 니고랑 별차이가 없는 용법이다. 니고(尼姑)는 할머니 중이 아닌 그저 여중인 비구니의 존칭에 지나지 않는다. 성조황고의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해석은 성스런 조상(聖祖)을 둔 <여황제(皇姑)>라는 뜻이다. 의역을 하면 진평왕의 뒤를 이은 적통 여황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할미고, 시어미고>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성스런 늙은 여황제나 성스런 황제의 시어미나 시어미 같이 늙은 황제라면 해석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한, <고(姑)>는  ㉢계집, 여자(), 부녀()의 통칭() 등 상용적으로 사용하는 용법이 있다.  

기록을 토대로한 덕만은 언제 왕위에 올랐을까?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治十四年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634년)에 왕이 되어 14년동안 다스렸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第二十七 善德女王  名德曼.  父眞平王 母 麻耶夫人金氏. 圣骨男尽 故女王立.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治十四年.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이 631~32년에 죽고, 덕만이 왕위에 올랐지만, 정식으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승계한 때는 갑오년 (634년)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14년동안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평이 건복원년 (684년)에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고 직접통치한 것 처럼, 덕만도 634년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고 직접통치를 한것이다. 이 또한, 덕만이 진흥이나 진평이 13세~15세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이은 것 처럼, 덕만도 나이가 어릴때 왕위에 올랐다는 반증이다.


통설을 겉어 치우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해석한다면,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른시기는 절대 20대를 넘길 수가 없다.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는 단 한줄도 인용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의 기록을 토대로 덕만이 현재의 이요원의 나이가 아닌 어린 덕만역으로 주목을 받았던 남지현만한 나이때 왕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시리즈 글을 기시로 송고했었다.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과 천명은 이복자매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역사이야기] - 서녀 천명의 나이 어린 적통 동생 덕만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역사이야기] - 조선 세종, 신라 덕만, 천명의 기록 비교해 보니

 위의 기사들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의 장녀다.
둘째, 천명이 덕만보다 나이는 많지만,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또는 마야 이전 황후나 후비의 소생이다.
셋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넷째, 천명은 정비인 마야의 후손이 아니였기 때문에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그래서 춘추가 왕위에 오를때도 왕위 승계에서 알천보다 후순위였다.
다섯째, 마야의 후손으로는 덕만 말고도 또다른 자매(들)이 있다.  
설령, 덕만과 천명이 같은 마야의 소생일지라도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일곱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 때, 현재 80년생이며 한국나이 30살인 이요원보다도 어렸다. 

결론, 덕만은 실제로 632년에 15~18세 정도에 늦어도 20세 전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동안인 덕만 이요원이 실제 선덕여왕 덕만역을 해도 되지만, 남지현이 선덕여왕에 등극하기 전후 까지 존재하고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이요원으로 바뀌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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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수출이 부끄러운 이유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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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11.19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넷티켓 넷티켓하시는데 님이 네티켓에 좀더 신경을 쓰셔야겠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11.19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115.20.91.74로 들어 오는 아이피에 대응 하지 않습니당.. 차분히 님들 고장의 속담이 어떻게 변천되었나 부터 알고 오시기 바랍니당.. 그리고 도배는 하지 마셈..

      댓글은 지우지 않지만 의미 없는 도배성 댓글은 삭제하니까요..

  3. BlogIcon 모노마토 2009.11.19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평왕이 52년동안 왕을 하다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제가 알기론 덕만이 왕이 될때는 거의 할머니였다고 알고있습니다... 20세가 안되서 왕위와 올랐다면 비담의 난이 일어날때는 30대 중반이라는 이야긴데요.......

  4. BlogIcon pennpenn 2009.11.19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심층직인 분석글 잘 읽고 갑니다.

  5. 저도 갓쉰동님 글에 찬성합니다. 2009.11.19 1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폐경기의 여성을 왕이 될리가 없죠.
    후사가 없는 왕은 그 자체로 왕권이 약한데
    왕권이 강력한 진평왕이 부군으로 올릴리가 없습니다.
    어쨋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선덕여왕이 할머니란 근거는 존재하지 않죠.

    그리고 갓쉰동님. 저 쓰레기같은 도배글은 삭제해버리시죠.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아무리 찾아봐도 선덕여왕이 늙은이란 사실은 없고, 오히려 어린 선덕만 발견하게 된다눈.. ㅋㅋ

      그건 그렇고..저정도는 애교 수준의 댓글이니 냅두는 겁니당.. 잘못알고 있는게 죄는 아니지만 대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데.. 암튼 잘못된 지식의 표본정도로 냅둘랍니다. ㅋㅋ
      이제 알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이 좋은점 아니겠어용.. 잘못된 점을 알게된다는 것이..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6. 하얀가루눈ii 2009.11.19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난 글 잘 읽고 갑니다. 갓쉰동 님 포스트를 즐겨 있는 저로서는 천명, 덕만 이복자매설이 가장 흥미롭네요. (저는 동복자매 설에 좀 더 무게를 두지만요. ㅎㅎ)

    근데 포스팅 된 글을 읽으면 진짜 선덕여왕이 나이 들어서 왕위에 올랐다는게 어불성설이긴 해요. 정말 폐경기의 여성이 왕위에 올라서 후사를 어찌 잇겠다고.. 그리고 지귀설화도 그렇고 그런 걸 보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는군요.

    그러면 마야는 아이를 낳고 얼마 안되서 죽은 건가요?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50여년이란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마야는 자신의 딸이 왕위에 오르는 걸 못보고 죽었다고 하니..

    하나 더 질문이 있어요.
    신라시대에도 일본의 헤이안 시대, 특히 후지와라 가 섭관 정치기 처럼 왕이 정실부인을 동시에 두 명 이상을 둘 수 있었던 거예요? 고려시대를 보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한데, 어떤 글을 읽으니까 그래도 정실은 하나고, 왕위를 이은 아들들이 추존한 황후도 많다고 해서요. 물론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였고 철저히 후궁은 배제되었긴 합니다만...

    그렇게 보면 마야가 진평왕의 첫번째 정실이 아니고, 화랑세기 기록처럼 보명과 미실이 둘다 황후였다고 하는 게 어찌보면 이해도 됩니다만.. 그러면 용수와 천명을 결혼시켜서 용수전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는 마야의 속내는... 이 분 대인배신가요..??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세기에도 동복자매라는 언급은 없었던 같더군요.. 기억이 가물가물..ㅠ.ㅠ.

      진평에게는 덕만이.. 늦동이니 얼마나 귀여웠을가용. 거기에 재기도 발랄하고 민첩하고,, ㅋㅋ

      마야는 어쩌면 대인배 일수동.. ㅋㅋ

  7. BlogIcon 너돌양 2009.11.20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의 선덕여왕 관련 글에는 역사적 근거가 자세히 수록되어있다고 하던데 역시 그렇군요.아무튼 갓쉰동님의 풍부한 역사 지식에 감탄을 합니다

    전 선덕여왕을 보지는 않고. 단지 역사에 조금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선덕여왕의 드라마가 재미있고 배울점이 많은 드라마인건 공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사 왜곡은 아닌 것 같네요. 사실 신라시대에 관한 남아있는 기록이 한참 후 고려시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삼국유사뿐이고 화랑세기가 아직 진위여부 논란이 있다고하고 작가 스스로도 이건 허구가 많다고 애초부터 밝혔지만 그래도 아직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초등생들이나 학생들이 보면 머리에 혼란이 오지 않을까 괜히 걱정스럽네요. 머 아주 쓸데없는 걱정이지만요^^

    아무튼 유익하고 알찬 글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서 그런 소문이 퍼졌나용.. ㅋㅋ

      저는 오히려 역사의 자료가 부족하니 힘써 지켜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작가는 없으니 내맘대로 인가 봅니당.. 관점의 차이가 명확하지용..

      잘보셨다니 ㄳ 합니당.. ㅋㅋ

  8. 갓쉰동 최고 2009.11.20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존 통설에 덕만의 즉위시기가 50세 전후라는 것은 처음 듣네요.
    어린이용 역사책에도 덕만이 젊은시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덕만의 출생년도가 정확하지가 않죠. 들쭉 날쭉하니 고대사부분은 정말
    진실을 찾기가 어렵네요.
    그리고 화랑세기는 천명을 덕만의 동생으로보고 용춘이 덕만과 결혼을 하였으며
    천명과도 결혼을해서 재부가되었다고하는데
    문제는 이 동생이란 언급은 아마도 적통순위에서 밀려서 된듯합니다.
    그리고 이부분은 선화공주와 더불어서 아직도 학계에서 활발히 논쟁중이구요.
    결국 선덕여왕으로인한 신라사에대한 오해는 기존통설과 학게의 주장보다는
    감수도제대로못받은 드라마 선덕여왕과 OST콘서트에 뮤지컬까지 밀어주는 MBC의
    상업적 정책의 영향인듯합니다.
    삼국사기조차 제대로 이해못하는 애들이 통설은 알겠습니까?

    • 갓쉰동 최고 2009.11.20 0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삼국사기가 아니라 화랑세기였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삼국사기를 볼정도면 드라마가 이정도까지는 아니었을테니
      과대평가할 뻔했군요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수설이라고 하지용.. ㅋㅋ 몇개 안될걸용.. 암튼..

      덕만과 천명의 언니냐 동생이냐는 적통 순위와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용.. 단지, 누구와 누구 사이에 난 자식인가에 따라 해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순위이지용.. 전체로는 명확하지용.. 동생이 언니가 될수 없고, 언니가 동생이될 수없는 것처럼 용..

      님의 말씀이 맞아용.. 역사책을 읽지 않고 소설책과 드라마만 본 작가들이 알기나 하겠어용.. ㅋㅋ

  9. 소연이 2009.11.20 0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드라마에서 역사적 감동은 얻을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찾는 것은 정말...(음, 요즘은 말 조심을 해야하니까^^;)

    암튼 역사적 사실(?)을 기록을 통해 보여주시니 고맙군요...

    그 시대에 살아보지않은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자신이 "읽은" 내용이 진실인 것처럼 떠드는 것이 참 어리석게 보일때도 있죠. 인터넷의 폐해 일까요...

    역사는 정말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이럴땐 역사학자들이 참 존경스러워요...

    풍부한 역사적 지식에 감탄합니다...많이 배우고 갑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1.20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냅.. 읽은게 지식이고 진실이 되니.. 그건 정보에 지나지 않지용. 취사선택을 하고 흡수한 이후에나 자신의 것이 되고 지식이 되고 지혜가 되는 거지요.. 소화하지 않는 정보는 그저 쓰레기일 뿐입니당.. ㅋㅋ

  10. zz 2009.11.22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 뭐 다 괜찮은데요
    글좀...맞춤법이...

  11. 갓쉰동님 광팬 2009.11.23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극에서 여성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모습을 왜 안보여주나 좀 아쉽습니다. 눈 밑을 조금 어둡게 처리하던가 피부색을 탁하게 하던하 해서 나이든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남성들만 수염길고 나이가 드는 것을 보면 여성은 꼭 이쁘기만 해야 하는가 아쉬움이 좀 남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11.24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 말입니당. 여성들의 현실적인 꿈을 드라마로 만들어 주는건지도요.. 여성주의 사극이잖아요.. 선덕여왕.. ㅋㅋ

  12. 레아 2009.12.07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조황고라는 것 중에서 고는 옛고자를 말하는데 그것은 할머니나 혹은 중년의 아줌마를 뜻하는 말로 오히려 덕만이 상당이 늦은 나이에 등극했음을 알수있죠.

  13. 레아 2009.12.07 1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리고 소설선덕여왕의 작가는 선덕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안돼긴 하죠.

  14. BlogIcon onlinemovie 2010.10.15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안돼긴 하죠.

  15. BlogIcon Hairy Pussy 2012.07.12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보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16. BlogIcon Amos 2012.10.14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여자

  17. BlogIcon military meals for sale 2012.11.01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왕이 마흔일곱의 나이에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젊은 나이에 성조황고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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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BlogIcon waterproof shock collars for dogs 2012.12.22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어난 칠숙과 석품의 난으로 바꾸어 버렸다. 극중에서 16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같은 해에 일어난 일로 극화해버린

  21. BlogIcon filters water well 2013.01.02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왕위에 오르고 죽고 나서 왜 시호가 <선덕>이였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은 극중에 없다는 뜻이다.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 이유는 진평왕이 딸만을 낳았는데, 그 후 왕위를 이을 왕제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삼국사기에는 진평왕 원년 왕위에 오른 후 진평왕의 동모제(?)인 동생 둘을 갈문왕에 봉하고 있다. 복승의 딸이고 진평왕의 비이며, 덕만과 천명의 어미인 마야부인 또한 성골이다. 그렇다면 복승도 성골이라는 의미다. 진평왕은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의 동생들에게는 남자 아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춘추가 왕이 되기전에 왕의 우선 순위는 알천이였다. 알천이 나이가 많아, 춘추에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 실제는 유신계와 춘추의 어미인 천명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정말 진골위에 성골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천만에 만만의 콩떡이 되시겠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고고학 유물이나 기록 어디에도 <성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진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학을 전공하는 자들이 성골, 진골을 나누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데 이들의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이 서로 다르다.

어떤이는 왕족과 왕족간의 근친혼을 성골이라고하고 귀족과의 결혼을 하게 되면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진다(족강)고 한다. 물론, 신라 중기 이후 후대로 넘어가면 근친혼이 사라지기는 한다. 그렇다고 성골이 씨가 마르고 진골만이 남게 되겠는가? 어찌 되었던 왕족과 왕족의 결혼은 계속 되고 있는데 말이다.  

성골과 진골이 있다면, 그 기준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그런데 전공자 마다, 분류가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를 성골과 진골을 구이 나누고자 하는 이유가 나누기를 좋아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학자적인(?) 학구열일까? 아니면 성골, 진골의 분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았기 때문일까?  

글쓴이의 견해는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라는 생각이다. 춘추는 삼국 중 백제를 굴복시킨 첫 왕이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때 어찌되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굴복시켰다. 신라로 볼때는 새로운 시대의 만든이다. 그러니 당대에 이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또한, 춘추를 이은 문무나 신문왕은 기존질서와 이전 왕대와 차별화를 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도 국민의 정부, 문민정부, 참여정부 등 1공화국, 2공화국, 3공화국, 5공, 6공을 나누듯이 말이다. 우리가 시대를 구분하고자 하듯이 당대나 후대 고려사람들의 관점에서 분류하고 싶은 것이다. 신라를 나눌때 상대, 중대, 후대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삼한일통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일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조심히 들여다 보면, 성골이 진골이요, 왕족임을 알 수 있다. 성골진골의 분류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춘추(태종)시기가 아닌 고려시대의 분류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를 제시하고자 한다.  

국인이 말하다.  국인(나라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8년(654)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 <삼국사기> 28대 진덕왕 말년

지금까지 "진덕왕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고 하고, 무열왕 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고 하였다"는 기준을 넘어 설 수 없다. 이 기준을 넘어서는 분류는 존재하면 안된다. 이는 하나의 선언이고, 기준이고, 명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인>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냥 읽으면 신라의 사람으로 읽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일반적인 국인론이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진덕>왕 사후에 기록된 <국인>에 대해서 알아보자.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이말의 주체가 되는 <나라사람들 :<국인(國人)>은 진덕왕 말년 당시의 나라사람들이 될 수 없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음에 기술된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이라고 한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신라가 망한후 고려 <김부식>시기의 학자층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시기 사람들이 현재 대통령이 노무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허황된 말이다. 현재의 사람은 과거 이승만, 박정희,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사람은 미래가 어찌되었는지 알수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여기서 말하는 <국인>이란 신라가 끝나고, 고려시대 김부식때의 사람들 좁히면 당시 귀족일단이나 식자층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욱 좁히면 신라 출신자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김부식은 당시의 진덕왕때 사람들이나 신라사람들이 이야기 했다고 하지 않고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국인>을 신라 진덕왕시기의 사람들로 인식을 함으로서 비져진 코미디이다.  

영호징은 말한다. 성골, 진골은 없다 

또한, 많은 이들이 영호징의 <신라기>를 성골, 진골이 있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영호징이 말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왕족은 1골이고, 귀족은 2골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왕족은 성골이라는 말이 없다. 왕족은 그저 1골이고 귀족은 2골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골, 진골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1골은 성골이고, 2골은 진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골출신 춘추가 왕이 되었으니 진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일단 왕이 되었다면, 그 일족은 귀족이 아닌 왕족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도 제 1골인 왕족이 되는 것이다. 왕족이 귀족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인 왕족으로 왕이 된것이다. 유신 또한 신라왕족 출신이다.

신라는 남자중심이 아닌 남.여 공히 그들이 결혼한 상대는 왕족으로 편입되고 있다. 또한, 여 왕족에 장가간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된다. 신라는 왕족들에게서는 남.여 차별적이 요소가 전혀 없다. 오히려 사위로 왕이된 석탈해나 김미추 시대의 진정한 왕은 왕후로 기록된 여왕이였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또한, 영호징은 통일신라 이후의 사람이다. 그러니 영호징이 말한 제1골은 진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골인 귀족은 신라의 6두품을 이르며 6부족(씨성)에 해당할 뿐이다. 그래서 신라는 왕족(진골)과 6두품에 복식이나 집이나 가마 등 각 계급과 직제에 맞춘 규정이 있었다.  

성스런 진골만 있을 뿐이다.  

만약, 춘추 이전이 성골이라면, 왕족 출신도 아닌 석탈해, 김미추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석탈해는 성골이고, 왕족인 김춘추는 진골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그렇지만 김씨계 왕들을 성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또한,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말한 <성골>을 제외하고, <성골>이라는 단어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진골>출신은 수 없이 등장하지만 말이다. 하물며 있지도 않은 성골이 진골의 상위계급이라니 있을 수 없다.  

단지, '성스러운 진골(聖而 .. 眞骨)'만 있을 뿐이다.

 만약, 성골 진골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분들은 알려주기 바란다. 글쓴이는 아직 이를 정확히 구분하는 이를 본적이 없다. 춘추 이전 28왕 그들 스스로 성골은 있지 않다고 증명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있다면 단지 시대 구분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어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안은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는 말을 한다. 이 또한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뼈속깊이 새겨진 흔적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골은 없다는 말인가? 왕즉성조(골)

성골은 당대의 왕의 자제를 말한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성골이고, 딸들만 있다면 그 공주들이 성골이다. 그럼 진평왕은 성골일까? 왕보다 성스런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왕위에 왕없다는 말이다.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진평왕은 성골로써 왕위에 올랐을까? 아니다. 단지 진흥왕의 손자로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시기에는 진평(백정)은 성골이였다. 하지만, 진지(금륜)이 왕이 되었을때는 제1골인 진골(왕족)이였다. 진평(백정)은 진지왕의 방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지왕이 되는 순간 방계가 되는 것이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왕이 되었을때 비로서 성조(聖朝)이자 성골이 되었다.

진지왕의 후손인 용수.용춘 또한 진지왕의 폐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진평왕이 왕이 되는 순간, 진평왕의 방계인 왕족(진골)이 되는 것이다.

춘추도 진골(왕족:1골)로 왕위에 올라 성골(성조)가 되었다. 그러니 법민도 아버지 춘추가 왕이 되므로 해서 왕족(진골)에서 성골이 된것이다.

만약, 당대 왕이 성조이자 성골이 아니고, 기존 통설에 따라 진지왕의 폐위되어 용춘.용수가 족강이 되었다면,  실성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눌지왕의 후손들은 전부 진골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눌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이는 자비왕이다. 자비왕은 실성왕의 딸의 아들로써 왕이 된다. 기존 통설의 폐위되면 족강되어 진골이 된다는 설의 최대 헛점이 되는 것이다. 누구도 지비왕부터 성골이 아닌 진골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증왕은 소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 되었다. 그런데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에 불과하다. 지증왕은 단지 왕족으로 왕이 된것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이된 진흥왕 조차도 왕족으로 왕이 된것이다. 진흥왕은 법홍왕의 조카이자 외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성골.진골을 복잡하게 만든건 기존통설을 만든자들이다. 신라를 요상하고 이상한 나라로 만든이들은 신라가 아닌 현대 신라사를 연구하는 자들이 만든것이다. 신라는 당시에 있던 다른 나라와 같이 보통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족친혼은 신라만의 고유한 것도 아니고, 동양의 몇나라를 제외하면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성골(성조)은 당대왕과 자제이고, 왕의 적통이 이동하면 성골이였던 자들은 자동으로 왕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이고, 같은 왕조내에서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진골은 왕족의 다른말일 뿐이다.


그래서 덕만은 진평왕의 딸로 성조황고가 된것이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 진평왕시기 <성골남진>이 되었다고 한것이고, 삼국사기는 진덕(승만)에 성골이 없다고 한것이다. 덕만과 진덕(승만)은 그저 무자식이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평왕에 성골남진이 되지 않았고 덕만은 많은 왕자와 많은 공주를 물리치고 왕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덕만에게는 당시의 왕자와 공주보다도 왕이 될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지증왕, 진평왕이던, 선덕왕이던, 진지왕이던, 김춘추왕이던 어느왕이나 왕이 되기전 성골로써 왕이 되었건, 진골로써 왕이 되었건 상관없이 계급위에 있는 존재하는 성조이자 성골이다. 그러니 <왕즉성조>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이 일개 왕족(진골)과 동등하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김춘추시기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기존 통설에 따르면 일개 왕족(진골)과 동등한 왕이 말이다.

요즘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는 하는 자들도 기존 통설에 벗어 나지 못하고 <성골><진골>의 환상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면서 성골이 진골의 상위개념이고, 폐위되면 그의 후손은 족강이 되어 진골이 된다거나, 궁을 벗어나면 성골의 지위를 잃게 된다는 황당한 설을 내 놓기도 한다. 화랑세기는 성골.진골을 나누지 않고 있다.

용수.용춘을 두고 춘추가 전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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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회의에 난입한 춘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춘추의 실질적인 생부인 용춘을 두고, 춘추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다음 2009/09/21 - [역사이야기] - 천명만 알 수 있는 김춘추의 생부(용수?,용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춘추가 10살로 전면에 등장해서 덕만과 왕위다툼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지의 소산이다. 용수와 용춘은 612~3년 전후인 드라마 시점에서 누구도 누리지 못한 권력을 쥐고 있다.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춘추가 그의 아버지를 뒤로 하고 전면에서 "내가 왕이로 소이다"라거나 "비담을 죽여버리겠다"고 공언을 한다는 생각이 끔찍하다.

또한, 당시 왕위 승계서열상 춘추는 열손가락으로 치면 등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2진법으로 샌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2진법으로 숫자를 샌다면 10손가락은 1024개까지 숫자를 샐수 있다) 한마디로 춘추가 화백회의 중간에 등장한다는 발상자체가 이승만 정권때 이명박이나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무슨 선거고 투표냐? 내가 왕(대통령)이라고  하는 꼬라지와 같다.

물론, 드라마를 아무 생각없이 보면 극적인것 처럼 보이긴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 작가가 미실을 통해서 공언한것 처럼 "백성(시청자)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뿐만 아니고 버거워 할 뿐이다." 또한 마약에 취한것 처럼 사실을 알려주면 어린아이 처럼 오히려 성질부터 부린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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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감자꿈 2009.10.08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으면서도 복잡한 구성을 매번 이렇게 정리하시는 걸 보면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추천과 댓글 3위 안에 들었습니다. ^^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앗.. 여기도 순위 댓글 놀이가 벌어지는 군요.. ㅋㅋ
      언제나 감자꽃님의 추천과 댓글이 글쓰는데 힘이 되지용.. ^___^

  3. 목만치 2009.10.08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학도가 되려고 생각 중이였다가 요새 고민중이였는데 요새 매일 님의 글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서 이제는 꼭 하고 싶어졌어요 고마워요 ㅋ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1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앗 배고픈 직종을 선택하시려 하다니 제가 님의 밥줄을 끊어 놓는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냥 취미생활로 하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면 제2전공정도로..

      추천은 계속 하고 있지요? ㅋㅋ
      글쓴이인 저는 추천이 밥입니당.. ㅋㅋㅋ

  4. BlogIcon 초록누리 2009.10.08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춘추가 골품제도를 부정하는 말을 하길래 그 골품때문에 머리가 아프더라구요~
    갓쉰동님 글 읽고 골품 조금 정리하고 갑니다. ^^

  5. BlogIcon 모과 2009.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잊었던 신라의 역사를 상기 시켜 주었습니다.
    왕족(진골) ...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양반, 왕족이렇게 구분한 것과 같지요. 조선시대에..
      조선이 하늘에서 떨어진 용가라 통뼈가 아니기 때문에 신라부터 있었던 계급적인 구성을 이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자신의 조상이 뼈(골)이 있는 집안이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던거지요. 요런것이 신라의 흔적이지요..

  6. BlogIcon pennpenn 2009.10.08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고~
    골치아프네요~
    이를 어찌 정리하셨는지 대단한 역사학자이십니다.

  7. 상록수 2009.10.08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시원한 글..재미 있습니다.
    춘추가 덕만과 싸워서 왕이 되겠다하니 너무 한다 싶더군요.
    드라마가 나이를 초월한것이~~...
    좋은 글 고맙습니당.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드라마 드라마가 아니지요..드라마는 인과. 선후관계를 중요시 하는데 이넘의 선덕여왕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함.. ㅋㅋ

  8. BlogIcon 백두 대간 2009.10.08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쓰예요, 나이쓰~~~ ^^

  9. lethe4me 2009.10.08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1골과 2골의 이름보다 진골과 성골의 이름을 택하셨네요.

    화랑세기를 사서로 어느정도로만 인정하신다면,
    약간은 화랑세기와는 벗어나는 듯,
    하지만, 유일하게 믿을 근거로 가지는 삼국사기와 유사로 판단할땐,
    설득력있고, 재미있는 이야기인거 같아요..^^

    (진골, 성골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절대 공감합니다..^^)

    진골 성골을 이야기하면서 꼭나와야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죠..^^
    모계와 부계..
    그것도 한번 정리해주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도 지롤을 해서용. ㅋㅋ 이미 알고 있는 단어를 쓴것이고.. 표안에 친절히 그려 넣었지용.. 왕을 계급에 추가하는 멍청이들이 있는데 어쩌겠어용..

  10. 아.. 헷갈려요 2009.10.08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교에서 배운 국사랑 달라서 헷갈려요.
    학교에선 춘추가 왕이 된 이후로, 귀족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왕을 죽이고,
    왕이 그 후로 자주 교체되었는데.. 그 이유가 진골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춘추가 보여줌으로서
    이제껏 성골이 왕이었기에 그저 바라만 봐야했던 진골귀족들이 자기들이 왕이 되려고 음모를 꾸며서,
    왕이 자주 교체되었다는데... 그럼 그건 그 국사선생님이 잘못가르쳐 준건가요?
    김춘추 이후로 왕이 자주 교체된 것은 신라 말기라서 그랬던 건가요?
    가르쳐주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구하지 않고, 남의 글을 그냥 외워서 그래용.. 선생이..
      외부의 적이 없으면 반란이 자주 일어나지요.. 배부르면 딴생각을 하듯이.. 투쟁의 대상이 내부로 향하는게 일반적이닌까요..

      춘추 이후 왕이 자주 바뀌지도 않았어용..
      춘추이후 654년 26(?) 인데.. 약 935년 망할때까지.. 평균년으로 하면 약 15년 정도는 되는데용.. 말왕과 최소의 시작왕을 빼면 적은 년수는 아니지요.. 오히려 이전왕으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이라고 보시는게..

  11. BlogIcon 윤서아빠세상보기 2009.10.08 2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갓쉰동 님이시네요. 잘 보고 갑니다.
    !

  12. BlogIcon 유리-MyEurope 2009.10.09 0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친혼이 저 시대 전까지 있었다면...유럽보다는 일찍 멈춘 결과가 되는건가요? ^^;;

    • BlogIcon 갓쉰동 2009.10.09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4촌밖은 아직도 결혼하지 않나요?

      고려시대까지는 근친혼은 계속 지속된것으로 생각되며..
      그당시에도 근친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것 같습니당.. 진흥왕도 그렇고.. 양도도 그렇고,..

  13. 이리닷컴 2009.10.09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란 소통하는게 역사라고 배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 소통은 아무래도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력과 원하는 포인트를 맞혀가는게 그게 현재로서의
    역사적 사실인 즉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이렇게 구분 지었지 않나 생각듭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09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골은 혈통이고.. 품은 제도이지요. 당연히 혈통에 따라 직위가 나뉘는게 당시에는 정상적일 것 같아용..

  14. 갓쉰동 최고 2009.10.09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역사학도를 꿈꾸지만 님의 역사학과를 보는 시선은 불편합니다.
    밥벌이가 힘든 학문이니 취미로 삼거나 제2의 전공으로 삼아라.
    물론 경제적으로 봤을때 역사학과나 철학과같은 기초학문을 바탕으로하는 학과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적성에 맞지않는 다른학과를 선택하고 전공하는것도 옳지않습니다.
    뿐만아니라 님의 논리대로 경제성을 중시한다면 우리나라에는 법학 의학 경영학 등 일부 실용학문의 전공자들만히 가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초학문은 부실하게 되며 님과같은 분들이 참고할 연구서적을 비롯한 자료들도 부족해 지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학문의 근본이 흔들리겠죠.
    경제성에 근거해서 다른사람의 전공을 비난하는것은 옳지 않다고봅니다. 그리고 오히려 님과같은 분들의 포스팅은 자칫 상아탑에만 갇혀있다고 생각될수있는 기초학문들의 실용화를 위해서 좋은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11 0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든 건 밥을 먹고살아야 해요.. 늘 배고픈 학문이라고 말을 하잖아요. 그들 스스로.. 그것도 그 학계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사람들 조차 그렇다면 대다수는 정말 힘들어요.. 학계라도 진출하는 극히 일부조차도요..

      요즘은 모든 학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믹스되고 있어용.. 의학과 사학, 고고학, 천문학, 등과도 교류가 되고요. 물리학과. 재료학이 역사와 연관이되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겁니다.. 그러니 정통역사학을 연구하지 않지 않더라도 충분히 역사와 연관해서 연구를 할수 있습니다. 그것도 학문을 하는 사람이야기고,, 모두 그 학과를 전공한다고 해서. 그 곳에서 밥벌이는 못해요.. 그점을 간과하지 말라는 뜻이였습니다.

      그러니 제2 전공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각오가 되어 있다면 제가 2전공을 하라고 해도, 전공을 할겁니다. 다만, 다른식으로 역사를 연구할 수 도 있는 방법이 있다는 선택을 주는 겁니다.



      님이 예로 제시한 법학이나 의학이나 경영학도 역사를 연구할 수는 있다는 거지요. 온리 역사학이 아니여도 된다는 뜻입니다..

  15. BlogIcon 갓쉰동 최고 2009.10.09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님은 단순히 역사를 취미의 하나로 생각합니다만 저는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경제 정치 과학 예술등 전분야에 뿌리이며 나아가 우리사회를 바꿀수도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삼국유사나 사기의 글귀를 풀어 옛날에 이렜었다가 아닌 진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나아가 미래를 계획하는 또 모든 학문과 사회의 뿌리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16. 갓쉰동 최고 2009.10.10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요즘은 골품제자체를 진성골제로 나누어서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교과서의 골품제 다음이 골품제 설명에서는요. 관한 네용입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하 중략 - 국사교과서 197~198쪽

    이처럼 골품제를 설명할때 보편적으로는 신분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56쪽에 있는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왕으로의 부분은 왕실내의 진 성골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주장하는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화백회의의 경우 지금의 의회제가 아닌 초기 영국식 의회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귀족 중심에 왕의 탄핵권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위엣분이 들으신 수업내용은 왕이 자주 바뀌었다기 보다는 내물왕계와 무열왕계의 왕위 다툼이 치열했다는 설명일겁니다. 사

    • BlogIcon 갓쉰동 2009.10.11 0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골과 품을 나눠서 봅니당.. 물론,골이 우선하지만요.. 그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지금도 계급사회로 가고 있거든요..

  17.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용한 면도기는 투박한 도루코인가? 아니면 최근에 나온 질렛트인가? 상투를 틀지 않으면 미성년이고 상투를 틀면 성인이란 말은 들어 봤어도 사극에서 면도하면 미성년

  18. BlogIcon water storage containers arizona 2012.11.01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이종욱이.. 왜 이리 허점 많은 설을 유포하는지 모르겠어요..님이나 이종욱처럼

  19.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cats canada 2012.11.06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자 아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춘추가 왕이 되기전에 왕의 우선 순위는 알천이였다

  20. BlogIcon underground electric dog fence 2012.12.22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 기능을 갖춘 스크린 캡쳐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프로그램 없이도 웹페이지를 가장 빠르

  21. BlogIcon family food survival kits 2013.01.02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는 삼한일통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일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 이유는 진평왕이 딸만을 낳았는데, 그 후 왕위를 이을 왕제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삼국사기에는 진평왕 원년 왕위에 오른 후 진평왕의 동모제(?)인 동생 둘을 갈문왕에 봉하고 있다. 복승의 딸이고 진평왕의 비이며, 덕만과 천명의 어미인 마야부인 또한 성골이다. 그렇다면 복승도 성골이라는 의미다. 진평왕은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의 동생들에게는 남자 아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춘추가 왕이 되기전에 왕의 우선 순위는 알천이였다. 알천이 나이가 많아, 춘추에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 실제는 유신계와 춘추의 어미인 천명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정말 진골위에 성골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천만에 만만의 콩떡이 되시겠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고고학 유물이나 기록 어디에도 <성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진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학을 전공하는 자들이 성골, 진골을 나누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데 이들의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이 서로 다르다.

어떤이는 왕족과 왕족간의 근친혼을 성골이라고하고 귀족과의 결혼을 하게 되면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진다(족강)고 한다. 물론, 신라 중기 이후 후대로 넘어가면 근친혼이 사라지기는 한다. 그렇다고 성골이 씨가 마르고 진골만이 남게 되겠는가? 어찌 되었던 왕족과 왕족의 결혼은 계속 되고 있는데 말이다.  

성골과 진골이 있다면, 그 기준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그런데 전공자 마다, 분류가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를 성골과 진골을 구이 나누고자 하는 이유가 나누기를 좋아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학자적인(?) 학구열일까? 아니면 성골, 진골의 분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았기 때문일까?  

글쓴이의 견해는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라는 생각이다. 춘추는 삼국 중 백제를 굴복시킨 첫 왕이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때 어찌되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굴복시켰다. 신라로 볼때는 새로운 시대의 만든이다. 그러니 당대에 이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또한, 춘추를 이은 문무나 신문왕은 기존질서와 이전 왕대와 차별화를 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도 국민의 정부, 문민정부, 참여정부 등 1공화국, 2공화국, 3공화국, 5공, 6공을 나누듯이 말이다. 우리가 시대를 구분하고자 하듯이 당대나 후대 고려사람들의 관점에서 분류하고 싶은 것이다. 신라를 나눌때 상대, 중대, 후대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삼한일통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일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조심히 들여다 보면, 성골이 진골이요, 왕족임을 알 수 있다. 성골진골의 분류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춘추(태종)시기가 아닌 고려시대의 분류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를 제시하고자 한다.  

국인이 말하다.  국인(나라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가?  

8년(654)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 <삼국사기> 28대 진덕왕 말년

지금까지 "진덕왕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고 하고, 무열왕 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고 하였다"는 기준을 넘어 설 수 없다. 이 기준을 넘어서는 분류는 존재하면 안된다. 이는 하나의 선언이고, 기준이고, 명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인>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냥 읽으면 신라의 사람으로 읽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일반적인 국인론이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진덕>왕 사후에 기록된 <국인>에 대해서 알아보자.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이말의 주체가 되는 <나라사람들 :<국인(國人)>은 진덕왕 말년 당시의 나라사람들이 될 수 없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음에 기술된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이라고 한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신라가 망한후 고려 <김부식>시기의 학자층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시기 사람들이 현재 대통령이 노무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허황된 말이다. 현재의 사람은 과거 이승만, 박정희,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사람은 미래가 어찌되었는지 알수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여기서 말하는 <국인>이란 신라가 끝나고, 고려시대 김부식때의 사람들 좁히면 당시 귀족일단이나 식자층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더욱 좁히면 신라 출신자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김부식은 당시의 진덕왕때 사람들이나 신라사람들이 이야기 했다고 하지 않고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국인>을 신라 진덕왕시기의 사람들로 인식을 함으로서 비져진 코미디이다.  

영호징은 말한다. 성골, 진골은 없다 

또한, 많은 이들이 영호징의 <신라기>를 성골, 진골이 있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영호징이 말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왕족은 1골이고, 귀족은 2골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왕족은 성골이라는 말이 없다. 왕족은 그저 1골이고 귀족은 2골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골, 진골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1골은 성골이고, 2골은 진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골출신 춘추가 왕이 되었으니 진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일단 왕이 되었다면, 그 일족은 귀족이 아닌 왕족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도 제 1골인 왕족이 되는 것이다. 왕족이 귀족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인 왕족으로 왕이 된것이다. 유신 또한 신라왕족 출신이다.

신라는 남자중심이 아닌 남.여 공히 그들이 결혼한 상대는 왕족으로 편입되고 있다. 또한, 여 왕족에 장가간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된다. 신라는 왕족들에게서는 남.여 차별적이 요소가 전혀 없다. 오히려 사위로 왕이된 석탈해나 김미추 시대의 진정한 왕은 왕후로 기록된 여왕이였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또한, 영호징은 통일신라 이후의 사람이다. 그러니 영호징이 말한 제1골은 진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골인 귀족은 신라의 6두품을 이르며 6부족(씨성)에 해당할 뿐이다. 그래서 신라는 왕족(진골)과 6두품에 복식이나 집이나 가마 등 각 계급과 직제에 맞춘 규정이 있었다.  

성스런 진골만 있을 뿐이다.  

만약, 춘추 이전이 성골이라면, 왕족 출신도 아닌 석탈해, 김미추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석탈해는 성골이고, 왕족인 김춘추는 진골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그렇지만 김씨계 왕들을 성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또한,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말한 <성골>을 제외하고, <성골>이라는 단어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진골>출신은 수 없이 등장하지만 말이다. 하물며 있지도 않은 성골이 진골의 상위계급이라니 있을 수 없다.  

단지, '성스러운 진골(聖而 .. 眞骨)'만 있을 뿐이다.

 만약, 성골 진골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분들은 알려주기 바란다. 글쓴이는 아직 이를 정확히 구분하는 이를 본적이 없다. 춘추 이전 28왕 그들 스스로 성골은 있지 않다고 증명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있다면 단지 시대 구분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어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안은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는 말을 한다. 이 또한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뼈속깊이 새겨진 흔적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골은 없다는 말인가? 왕즉성조(골)

성골은 당대의 왕의 자제를 말한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성골이고, 딸들만 있다면 그 공주들이 성골이다. 그럼 진평왕은 성골일까? 왕보다 성스런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왕위에 왕없다는 말이다.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진평왕은 성골로써 왕위에 올랐을까? 아니다. 단지 진흥왕의 손자로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시기에는 진평(백정)은 성골이였다. 하지만, 진지(금륜)이 왕이 되었을때는 제1골인 진골(왕족)이였다. 진평(백정)은 진지왕의 방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지왕이 되는 순간 방계가 되는 것이다.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왕이 되었을때 비로서 성조(聖朝)이자 성골이 되었다.

진지왕의 후손인 용수.용춘 또한 진지왕의 폐위여부와는 상관없이 진평왕이 왕이 되는 순간, 진평왕의 방계인 왕족(진골)이 되는 것이다.

춘추도 진골(왕족:1골)로 왕위에 올라 성골(성조)가 되었다. 그러니 법민도 아버지 춘추가 왕이 되므로 해서 왕족(진골)에서 성골이 된것이다.

만약, 당대 왕이 성조이자 성골이 아니고, 기존 통설에 따라 진지왕의 폐위되어 용춘.용수가 족강이 되었다면,  실성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눌지왕의 후손들은 전부 진골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눌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이는 자비왕이다. 자비왕은 실성왕의 딸의 아들로써 왕이 된다. 기존 통설의 폐위되면 족강되어 진골이 된다는 설의 최대 헛점이 되는 것이다. 누구도 지비왕부터 성골이 아닌 진골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증왕은 소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 되었다. 그런데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에 불과하다. 지증왕은 단지 왕족으로 왕이 된것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이된 진흥왕 조차도 왕족으로 왕이 된것이다. 진흥왕은 법홍왕의 조카이자 외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성골.진골을 복잡하게 만든건 기존통설을 만든자들이다. 신라를 요상하고 이상한 나라로 만든이들은 신라가 아닌 현대 신라사를 연구하는 자들이 만든것이다. 신라는 당시에 있던 다른 나라와 같이 보통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족친혼은 신라만의 고유한 것도 아니고, 동양의 몇나라를 제외하면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성골(성조)은 당대왕과 자제이고, 왕의 적통이 이동하면 성골이였던 자들은 자동으로 왕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이고, 같은 왕조내에서나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진골은 왕족의 다른말일 뿐이다.


그래서 덕만은 진평왕의 딸로 성조황고가 된것이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 진평왕시기 <성골남진>이 되었다고 한것이고, 삼국사기는 진덕(승만)에 성골이 없다고 한것이다. 덕만과 진덕(승만)은 그저 무자식이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평왕에 성골남진이 되지 않았고 덕만은 많은 왕자와 많은 공주를 물리치고 왕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덕만에게는 당시의 왕자와 공주보다도 왕이 될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지증왕, 진평왕이던, 선덕왕이던, 진지왕이던, 김춘추왕이던 어느왕이나 왕이 되기전 성골로써 왕이 되었건, 진골로써 왕이 되었건 상관없이 계급위에 있는 존재하는 성조이자 성골이다. 그러니 <왕즉성조>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이 일개 왕족(진골)과 동등하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김춘추시기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기존 통설에 따르면 일개 왕족(진골)과 동등한 왕이 말이다.

요즘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는 하는 자들도 기존 통설에 벗어 나지 못하고 <성골><진골>의 환상에 빠져 있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화랑세기를 사서로 인정하면서 성골이 진골의 상위개념이고, 폐위되면 그의 후손은 족강이 되어 진골이 된다거나, 궁을 벗어나면 성골의 지위를 잃게 된다는 황당한 설을 내 놓기도 한다. 화랑세기는 성골.진골을 나누지 않고 있다.

용수.용춘을 두고 춘추가 전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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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회의에 난입한 춘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춘추의 실질적인 생부인 용춘을 두고, 춘추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다음 2009/09/21 - [역사이야기] - 천명만 알 수 있는 김춘추의 생부(용수?,용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춘추가 10살로 전면에 등장해서 덕만과 왕위다툼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지의 소산이다. 용수와 용춘은 612~3년 전후인 드라마 시점에서 누구도 누리지 못한 권력을 쥐고 있다.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춘추가 그의 아버지를 뒤로 하고 전면에서 "내가 왕이로 소이다"라거나 "비담을 죽여버리겠다"고 공언을 한다는 생각이 끔찍하다.

또한, 당시 왕위 승계서열상 춘추는 열손가락으로 치면 등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2진법으로 샌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2진법으로 숫자를 샌다면 10손가락은 1024개까지 숫자를 샐수 있다) 한마디로 춘추가 화백회의 중간에 등장한다는 발상자체가 이승만 정권때 이명박이나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무슨 선거고 투표냐? 내가 왕(대통령)이라고  하는 꼬라지와 같다.

물론, 드라마를 아무 생각없이 보면 극적인것 처럼 보이긴 한다. 드라마 선덕여왕 작가가 미실을 통해서 공언한것 처럼 "백성(시청자)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뿐만 아니고 버거워 할 뿐이다." 또한 마약에 취한것 처럼 사실을 알려주면 어린아이 처럼 오히려 성질부터 부린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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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모과 2009.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잊었던 신라의 역사를 상기 시켜 주었습니다.
    왕족(진골) ...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양반, 왕족이렇게 구분한 것과 같지요. 조선시대에..
      조선이 하늘에서 떨어진 용가라 통뼈가 아니기 때문에 신라부터 있었던 계급적인 구성을 이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자신의 조상이 뼈(골)이 있는 집안이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던거지요. 요런것이 신라의 흔적이지요..

  3. BlogIcon pennpenn 2009.10.08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고~
    골치아프네요~
    이를 어찌 정리하셨는지 대단한 역사학자이십니다.

  4. 상록수 2009.10.08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시원한 글..재미 있습니다.
    춘추가 덕만과 싸워서 왕이 되겠다하니 너무 한다 싶더군요.
    드라마가 나이를 초월한것이~~...
    좋은 글 고맙습니당.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드라마 드라마가 아니지요..드라마는 인과. 선후관계를 중요시 하는데 이넘의 선덕여왕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함.. ㅋㅋ

  5. BlogIcon 백두 대간 2009.10.08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쓰예요, 나이쓰~~~ ^^

  6. lethe4me 2009.10.08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1골과 2골의 이름보다 진골과 성골의 이름을 택하셨네요.

    화랑세기를 사서로 어느정도로만 인정하신다면,
    약간은 화랑세기와는 벗어나는 듯,
    하지만, 유일하게 믿을 근거로 가지는 삼국사기와 유사로 판단할땐,
    설득력있고, 재미있는 이야기인거 같아요..^^

    (진골, 성골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절대 공감합니다..^^)

    진골 성골을 이야기하면서 꼭나와야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죠..^^
    모계와 부계..
    그것도 한번 정리해주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도 지롤을 해서용. ㅋㅋ 이미 알고 있는 단어를 쓴것이고.. 표안에 친절히 그려 넣었지용.. 왕을 계급에 추가하는 멍청이들이 있는데 어쩌겠어용..

  7. 아.. 헷갈려요 2009.10.08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교에서 배운 국사랑 달라서 헷갈려요.
    학교에선 춘추가 왕이 된 이후로, 귀족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왕을 죽이고,
    왕이 그 후로 자주 교체되었는데.. 그 이유가 진골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춘추가 보여줌으로서
    이제껏 성골이 왕이었기에 그저 바라만 봐야했던 진골귀족들이 자기들이 왕이 되려고 음모를 꾸며서,
    왕이 자주 교체되었다는데... 그럼 그건 그 국사선생님이 잘못가르쳐 준건가요?
    김춘추 이후로 왕이 자주 교체된 것은 신라 말기라서 그랬던 건가요?
    가르쳐주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10.08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구하지 않고, 남의 글을 그냥 외워서 그래용.. 선생이..
      외부의 적이 없으면 반란이 자주 일어나지요.. 배부르면 딴생각을 하듯이.. 투쟁의 대상이 내부로 향하는게 일반적이닌까요..

      춘추 이후 왕이 자주 바뀌지도 않았어용..
      춘추이후 654년 26(?) 인데.. 약 935년 망할때까지.. 평균년으로 하면 약 15년 정도는 되는데용.. 말왕과 최소의 시작왕을 빼면 적은 년수는 아니지요.. 오히려 이전왕으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이라고 보시는게..

  8. BlogIcon 윤서아빠세상보기 2009.10.08 2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갓쉰동 님이시네요. 잘 보고 갑니다.
    !

  9. BlogIcon 유리-MyEurope 2009.10.09 0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친혼이 저 시대 전까지 있었다면...유럽보다는 일찍 멈춘 결과가 되는건가요? ^^;;

    • BlogIcon 갓쉰동 2009.10.09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4촌밖은 아직도 결혼하지 않나요?

      고려시대까지는 근친혼은 계속 지속된것으로 생각되며..
      그당시에도 근친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것 같습니당.. 진흥왕도 그렇고.. 양도도 그렇고,..

  10. 이리닷컴 2009.10.09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란 소통하는게 역사라고 배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 소통은 아무래도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력과 원하는 포인트를 맞혀가는게 그게 현재로서의
    역사적 사실인 즉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이렇게 구분 지었지 않나 생각듭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09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골은 혈통이고.. 품은 제도이지요. 당연히 혈통에 따라 직위가 나뉘는게 당시에는 정상적일 것 같아용..

  11. 갓쉰동 최고 2009.10.09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역사학도를 꿈꾸지만 님의 역사학과를 보는 시선은 불편합니다.
    밥벌이가 힘든 학문이니 취미로 삼거나 제2의 전공으로 삼아라.
    물론 경제적으로 봤을때 역사학과나 철학과같은 기초학문을 바탕으로하는 학과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적성에 맞지않는 다른학과를 선택하고 전공하는것도 옳지않습니다.
    뿐만아니라 님의 논리대로 경제성을 중시한다면 우리나라에는 법학 의학 경영학 등 일부 실용학문의 전공자들만히 가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초학문은 부실하게 되며 님과같은 분들이 참고할 연구서적을 비롯한 자료들도 부족해 지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학문의 근본이 흔들리겠죠.
    경제성에 근거해서 다른사람의 전공을 비난하는것은 옳지 않다고봅니다. 그리고 오히려 님과같은 분들의 포스팅은 자칫 상아탑에만 갇혀있다고 생각될수있는 기초학문들의 실용화를 위해서 좋은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11 0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든 건 밥을 먹고살아야 해요.. 늘 배고픈 학문이라고 말을 하잖아요. 그들 스스로.. 그것도 그 학계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사람들 조차 그렇다면 대다수는 정말 힘들어요.. 학계라도 진출하는 극히 일부조차도요..

      요즘은 모든 학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믹스되고 있어용.. 의학과 사학, 고고학, 천문학, 등과도 교류가 되고요. 물리학과. 재료학이 역사와 연관이되기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겁니다.. 그러니 정통역사학을 연구하지 않지 않더라도 충분히 역사와 연관해서 연구를 할수 있습니다. 그것도 학문을 하는 사람이야기고,, 모두 그 학과를 전공한다고 해서. 그 곳에서 밥벌이는 못해요.. 그점을 간과하지 말라는 뜻이였습니다.

      그러니 제2 전공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각오가 되어 있다면 제가 2전공을 하라고 해도, 전공을 할겁니다. 다만, 다른식으로 역사를 연구할 수 도 있는 방법이 있다는 선택을 주는 겁니다.



      님이 예로 제시한 법학이나 의학이나 경영학도 역사를 연구할 수는 있다는 거지요. 온리 역사학이 아니여도 된다는 뜻입니다..

  12. BlogIcon 갓쉰동 최고 2009.10.09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님은 단순히 역사를 취미의 하나로 생각합니다만 저는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경제 정치 과학 예술등 전분야에 뿌리이며 나아가 우리사회를 바꿀수도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삼국유사나 사기의 글귀를 풀어 옛날에 이렜었다가 아닌 진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나아가 미래를 계획하는 또 모든 학문과 사회의 뿌리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13. 갓쉰동 최고 2009.10.10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요즘은 골품제자체를 진성골제로 나누어서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교과서의 골품제 다음이 골품제 설명에서는요. 관한 네용입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하 중략 - 국사교과서 197~198쪽

    이처럼 골품제를 설명할때 보편적으로는 신분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56쪽에 있는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왕으로의 부분은 왕실내의 진 성골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주장하는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화백회의의 경우 지금의 의회제가 아닌 초기 영국식 의회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귀족 중심에 왕의 탄핵권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위엣분이 들으신 수업내용은 왕이 자주 바뀌었다기 보다는 내물왕계와 무열왕계의 왕위 다툼이 치열했다는 설명일겁니다. 사

    • BlogIcon 갓쉰동 2009.10.11 0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골과 품을 나눠서 봅니당.. 물론,골이 우선하지만요.. 그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지금도 계급사회로 가고 있거든요..

  14.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용한 면도기는 투박한 도루코인가? 아니면 최근에 나온 질렛트인가? 상투를 틀지 않으면 미성년이고 상투를 틀면 성인이란 말은 들어 봤어도 사극에서 면도하면 미성년

  15. BlogIcon water storage containers arizona 2012.11.01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이종욱이.. 왜 이리 허점 많은 설을 유포하는지 모르겠어요..님이나 이종욱처럼

  16.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cats canada 2012.11.06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자 아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춘추가 왕이 되기전에 왕의 우선 순위는 알천이였다

  17. BlogIcon underground electric dog fence 2012.12.22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 기능을 갖춘 스크린 캡쳐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프로그램 없이도 웹페이지를 가장 빠르

  18. BlogIcon family food survival kits 2013.01.02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는 삼한일통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일환도 이와 다르지 않다.

  19. 지나가는 과객 2016.09.13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지나치기에는 이 글의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몇가지 이야기하자면...

    1. 성골-진골의 구분이 없다면서 든 예시가 "신라고기"인데,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8세기 경. 이 시대에는 이미 진골만 남은 상태이므로 이를 예시로 드는 것은 의미가 없음. 여기에 보이는 1골 2골 운운하는 것은 당시에 남은 골족들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함.

    6두품은 엄연히 골족과는 구분되는 두품이었으므로 제1골 제2골에 낄 수 없음.

    2. 용수와 용춘은 동일인물.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화랑세기 필사본 내용만 퍼와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박창화가 후대에 지은 위작에 불과. 황룡사 심초석에서 나온 찰주본기에서는 이간 용수가 구층탑의 건축을 감독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이간 용춘이 이를 감독했다고 함.

    화랑세기는 고려 중기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도 멀쩡히 남아있던 사료인데, 신라인들이 그 내용을 몰랐을리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을 남겼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용수와 용춘을 동일인물로 본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음.

  20. 지나가는 과객 2016.09.13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성골이 족강해서 진골이 만들어졌다는 논리는 통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다소 낡은 주장이고, 오히려 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고기에 이르러 성골이 기존의 골족 신분으로부터 생성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진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동륜태자계에 속한 진평왕과 그 아우 갈문왕들, 그리고 그 친족들을 중심으로 서로 석가모니의 친척 이름을 붙여주며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관념을 보이기 시작함. 성골 운운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됨.

    그러나 그 성골의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스스로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백정을 자처한 진평왕이 마찬가지로 석가모니의 아내인 마야부인을 자처한 왕비와의 사이에서 딸만 얻으면서 이런 성골화 프로젝트는 명분을 잃어 대실패하고 결국 성골의 대가 끊어짐. (이것이 바로 삼국유사 왕력에서 말하는 성골남진)

  21. 지나가는 과객 2016.09.13 14: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성골-진골을 나누었다는 "국인(國人)"들은 어디까지나 신라인들로 이해되어야 함. 사서에 보이는 "국인(國人)"의 용례를 찾아보십시오. 대체로 국인이란 그 사회의 유력층들로 이해되며, 성골-진골 구분 기록에서 보이는 국인도 신라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함.

    삼국사기 편자들이 괜히 국인 운운한 것이 아님. 만일 갓쉰동 님의 말씀대로 정말로 고려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지금 사람들은" 운운하는 것이 사리에 맞음.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거나 이설이 있음을 곧잘 지적하던 일연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는데 이의제기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의 무서움은 기존 사서의 빈틈을 칼처럼 파고 들고 있다. 그동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에 관한 기록에서도 화랑세기의 위력은 발휘된다.

그런데 뜸금없이 화랑세기는 무슨 소리, 덕만은 진평왕의 딸인것은 분명하고, 마야부인의 딸인것은 맞지만, 천명이 맏이고, 덕만은 천명의 동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이 천명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는 무엇을 근거로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언젠가는 화랑세기를 심층 분석할 때가 올것이다.


사실 덕만의 기록을 심층분석하고 있는 이유도 현존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 뛰어들려는 의도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그동안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지만, 천명은 마야의 소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나아가 덕만이 기존에 알고 있던 늙었을때 왕위에 오르지 않고, 극히 젊은 나이때 즉위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또하나, 덕만과 천명이 다른 출자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이전글에서 흘렸다.

덕만이 가지고 있는 남성스런 이름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신라 당시에도 여성은 여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덕만의 어미인, 마야, 진평의 어미인 만호(이것도 약간의 중성을 넘어 남성성이 보이긴한다.) 지소, 지조, 선혜왕후, 보희,문희 등 그 나름대로 여성성이 보이지만, 뜸금없이 덕만이라니, 덕만이 가지고, 있는 뜻은 결코 나쁜 뜻은 아니다. 덕을 널리 퍼트리고 길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글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덕만의 이름이 가지는 남성성

덕만이 천명의 나이어린 이복동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여자 아이의 이름에 남자의 이름을 붙혀 다음 출생자가 남자이길 소망하는 이름을 짓기고 한다. 또한, 여자이름 중에 끝순이, '말희', '끝네', '말자'라는 이름은 대부분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말자는 뜻도 있지만, 여자 아이는 그만 낳자란 뜻을 포함하고, 삼신할미에게 다음은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름에서도 덕만은 위로 많은 언니들을 두었음직하지 않는가? 덕이 있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태어나자 마자, 왕실에 아들들로 번창할 덕을 빌었음 직한 이름이니 말이다.

 
만약, 덕만이 천명보다 언니라면 진평왕의 첫번째 공주의 이름을 '덕만'이란 남성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여쁜 공주의 이름에 덕만이라니, 다음에 왕자를 생산을 염원하기 위해서 '덕만'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만만의 콩떡이 된다. 진평은 왕이다. 언제든지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진평왕 초년에 덕만의 이름을 지었다면 진평왕의 머리가 좀 이상스러운 것이다.

 
덕만의 이름은 진평왕과 왕실의 절실한 적통을 이을 왕자를 바라는 이름이다. 또한, 마야도 제일 왕후는 아닌 것이다.  

덕만과 천명이 이복자매라는 또 다른 증거 (세종과 그의 형 경녕군)

또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조선시대 세종에 관한 기록이다. 세종을 우리는 이방원의 3번째 아들로 알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하게된 배경도 너무나 잘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과연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일까? 아니라고 한다면 총맞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방원)의 3번째 아들이 아니다.


일단, 세종(이도)을 태종(이방원)의 3째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즉위 초년 세종이 세계를 기록한 내용을 살펴 보자.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 조선왕조 실록 세종


이기록만 있다면, 세종은 태종의 3째 아들 같지 않는가? 그리고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 전주이씨 대동종보 경녕군

드라마 대왕세종을 본 사람은 이방원의 또다른 아들 경녕군이란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종의 아들이고, 후비 효빈 김씨 소생이다. 그런데 경녕군은 1397년생 세종(이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경녕군은 세종보다 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머니는 효빈김씨로 세종과는 다른 후비 효빈 김씨라는 사실 뿐이다. 경녕군과 충녕군은 서로 출신성분 자체가 다르다.


그럼, 태종의 셋째아들은 누구일까? 세종일까? 아니면 경녕군일까? 경녕군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답은 둘째로 알고 있는 효령대군이다. 드라마 세종대왕에서는 경녕군을 효령대군보다 아우(?)로 했었던것 같다. 기억에 의존하는 관계로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상식으로는 경녕군이였다.

사실 경녕군은 태종(이방원)의 첫째인 양녕대군(1394년) 다음 1395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1396년 태어난 효령대군 보다도 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3번째 아들 세종(이도:충녕대군)은 잘못된 것일까?  답은 아니다,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이 맞다. 이유는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3번째라는 것이고, 적통을 이을 3번째 왕자가 세종(충녕군:이도)이란 뜻이 된다. 왕의 계승서열 3순위인 3번째 왕자라는 것이다. 사사로이는 경녕군이 충녕군(세종)의 형이 되지만, 왕통서열은 존재조차 미미한 후비의 소생이 된다. 물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후비가 되거나 폐출되어 폐서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왕가의 일은 적자/서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양반, 서얼을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서얼은 처주지도 않았다. 특별히 기록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또한, 정비의 소생이냐 후비의 소생이냐의 차이에 따라 신분은 하늘과 땅이 되는 것이다. 같은 왕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연구할때 적자, 서자, 적통를 구별할 줄 모르면 삼천포로 빠진다.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왕위를 잇는데 신라가 조선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이 있었지 않겠는가? 진골도 아니고, 성골임금인데 말이다. 사실 글쓴이는 성골.진골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살피고 살펴봐도 성골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왕족, 귀족의 구분만 읽었다. 

그럼 다시 신라의 선덕왕(덕만)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 삼국사기 신라 춘추왕 원년

이제 요즘과는 다른 적자/서자, 양반/서얼 등 왕가의 룰이나 양반가의 룰에 따라, 읽어보자.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딴지맨인 일연이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 기사에 딴지를 걸지 않는 이유는 일연도 마야부인의 맏딸로 덕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딴지맨 일연이 삼국사기에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의 늙으막에 얻은 승만왕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승만왕후에 아들이 없어 왕통을 이을수 없었기 때문에 덕만이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연은 삼국사기에는 없는 덕만이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짐작하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덕만의 결혼기사이다.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왕이 왕위에 있을때 결혼하고 있다니, 덕만이 왕위에 오를때 어렸다는 결정타가 아닌가? 물론, 남자왕처럼 비를 많이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구를 누구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첫결혼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한다.

현존하는 <화랑세기>를 의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제 예고한 대로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을때 덕만에 대한 평가를 보도록 하자.

위의 문장은 선덕(덕만)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하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뒤의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내용을 수식하기 위한 내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덕만과 관련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

성품이 너그럽고,어질다
  영묘사 화재사건을 일으킨 <지귀설화>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김유신의 춘추/문희불쇼>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총명하다.
<모란꽃,모란씨서되>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민첩하다

200
631년에 진평왕 말년 <칠숙의 난>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아직도 <성조황고>를 들어서 덕만은 나이가 많았을 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분이나 "그건 니생각이고"라고 하는 분들은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황고>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거를 제시했다. 귀찬으신 분을 위해서 요약하자면,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황제)의 성숙한 여식이란 뜻이다.

너무 어릴때 628년이전 문희와 김춘추를 얶어준 사건이 628년이라면 너무 덕만이 이른시기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르고, 632년 결혼하고, 연호를 바꾸는  것을 근거로 635년 18~20세 전후라면 <모란꽃>, <김유신불쇼> 사건들은 덕만으로서 너무 어릴때 사건이 아닌가 의심할 수 도 있다. 

632년 16세에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627년은 11살때 일이고, 628년이면 12살때 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좀 어려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모란꽃 사건은 늙은 왕이 아주 어린 공주에나 물어 봄직한 말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엔 깜짝 놀랄 추리 능력을 보인 덕만을 보고, 진평과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용봉의 자질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기록이  "
총명하다"는 기록으로 남았다면 어떨가? 또한, 12살이전에 있었던 김유신의 불쇼에서 살려준 문희와 그의 복중 아들 법민은 어떨까? 어리지만 너그러워움의 상징이 아닌가?  지귀심화에서 신분도 미천한 지귀를 위해서 행한 행동들은 "너그러움" 자체이다. 또한, 지귀심화로 소실된 영묘사와 잦은 화재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할때 처리하는데 부적같은 주문을 만들어 백성들을 안정화 시키는 것으로 너그러움과 총명함과 민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민첩하다" 라는 말은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때, 단순한 미사어구가 아닌 , 덕만은 <성조황고>이니 정통성에 하자도 없을 뿐만 아니고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PS. 사실 세종대왕의 기사는 천명과 덕만은 같은 어미의 자식이다.라고 주장하는 혹시 모를 딴지가 들어올 반박문을 위해서 남겨두었습니다만, 이제 노출합니다. 이외에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출자를 비교해 본다면, 왜 적통 적자/서자에 연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실 암투의 시작과 끝은 적자들간에도 있었지만, 서자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정비와 후비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후비가 정비가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생들인 왕자나 공주들은 인생의 역전 대박 로또가 되니 말입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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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enesmee 2009.07.30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로워 눈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읽고 갑니다 ^.^ 역사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저 겉핥기일뿐이라
    항상 부끄러운데..참 부럽습니다! 저도 다시 공부해보고 싶은 맘이 새록새록 드네요...자주 들리게 될 것
    같습니다. ^ ^

  3. 오호.. 2009.07.30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보고갑니다. 이복형제라.....

  4. 헤윰 2009.07.30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5. 재밌네욤 2009.07.31 0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보았네요~~ 그런데 저도 앞에 계신 '성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조선시대의 적장자 제도를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두 사회 모두 철저한 신분사회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골품제와 적장제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등장한 적장자의 개념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님께서 마지막 부분에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쓰신 부분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런지...

    각기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물론 그 만큼 강력한 신분 사회였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으셨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이러한 유교적인 관례가 뿌리 내린 것은 조선 성종 이후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된 때 부터 입니다..

    단적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의 후궁 중에 시집갔다 온 과부도 있었답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죠..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답니다. 하지만 중기이후에 대전체제가 완성되면서 부터 아들

    을 중심으로 족보가 쓰여지고 있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서는 비슷하고, 신라가 더 강경했지요..

      이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중기 이후다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남.여, 적서 차별 등 중기 조선 중기이후에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초기 기록을 내 놓은것 아닌가요? 그것도 살펴 보시길..

      왜 하필 조선의 초기기록을 들어서 조선과 신라를 비교했겠는지요..

      이글로 답변이 충분히 되었기를..
      님들은 저의 주장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보론 성격입니다.. 반론이 아니공..

  6. 흐음... 2009.07.31 0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이 되겠습니다만.....그냥 왠지 썩 잘 읽혀지는 글은 아니라서....뭔가 말이 맞지 않네요. 제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ㅡㅡ>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의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들(혹은 소생)이 될 순 없다. 물론, 그의 의붓 큰어미 이기는 하다." 라고 쓰셔야 말이 될듯 하네요.

    또 "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일연은 선덕 또한" 다음에 왜 진평왕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쓰신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_-;

  7. 딩가딩가딩 2009.07.31 0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

  8. BlogIcon Blah 2009.07.31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 기억이지만 그전 국사선생님 중 한 분이 조선에 유교사상이 들어오기 전까진
    남존여비사상이 조선같지 않았다...고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한 예로 여자가 재가를 하는 건 꿈도 못꾸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전까지만해도
    여자들의 혼인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고 하시면서요.

    암튼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요즘 재밌게 보는 선덕여왕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겠습니다.

  9. 가야진 2009.07.31 0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때는 사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게 사실 의미가 불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혼은 허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남녀 모두가 중혼적 성격을 가진 연인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자식도 모계사회인 신라의 골품제에 따라 진골까지는 신분을 부여 받았으니까요.

    여성의 힘에 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천추태후 등에서도 황제가 죽은 후 연인을 두는 모습이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다수의 역사서에서도 조선의 유고 사상 또한 중기 이후 정착한 것이고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권이 힘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보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남성사회로 이어져오긴 했지만,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남성의 권력이 사회의 기득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해요.(내조의 여왕처럼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한 실질적 정치가 아내와 어머니등의 여성이 상당했으니까요.)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가긴 했지만, 저는 천명이 마야의 자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잉첩들도 순수 혈통인 성골 출신으로만 이루어 져있기는 해도 이미 족강된 후이고, 천명이 후비의 자식이라면 정비의 자식인 덕만과 나이가 비슷한 상황에서 왕위계승자인 아들이 없다고해도 마야소생 이외의 인물이 권력을 가지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신라에서 초혼은 대부분 왕을 제외하고는 여성의 골품이 더 높거나 같은 진골이라 해도 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와 하는 것이 일반적이 잖아요.


    예전에 어디서 들은 말인지, 읽은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머리 속에는 성골에서 족강되면 진골의 가장 위 계층이 되고 최근에 족강된 사람이 더 오래전 족강된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기억이 있거든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천명이 마야 소생이 아니라면 용수와 천명의 결혼은 불가하지 않았을까요?
    천명의 어머니가 성골이었다해도 용수보다는 더 오래전에 족강되었을테니까요.

    아, 글을 쓰다보니.... 아닐 수도 있겠네요. 천명의 어머니가 용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저것도 가능하긴 할 것 같아요.

    휴, 요즘 선덕여왕 때문에 도서관에 선덕여왕 관련 책을 다 봐서 역사 공부는 되는데, 드라마 나이 설정이 뒤죽박죽이라 덕분에 제 머리도 뒤죽박죽이예요.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암튼, 저는 천명이 후비소생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글 덕분에 경녕군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됬어요. 브라보~!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비이거나 마야이전 정비라고 했던것 같은뎅..
      족강은 조선이 더 심했지요.. 신라보단

      오르기도 힘들고, 내려가기는 쉽고, 하지만, 조선의 전란이후는 다르지만.. 돈을 주면 언제든지.. 파고 사는게 족이였으니요..

  10. 오타발견!! 2009.07.31 0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께서 쓰신 글인가요? 잘 봤습니다.

    코를 찔찔 흘리며 다니던 어릴 시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관계로 우연히 지나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선덕여왕도 너무 좋아합니다.ㅎㅎ)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됐던 글인 것 같아 잘 보고 갑니다.

    근데, 서론에 나오는 일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지은 그를 말씀하시는게 맞겠죠?


    예를 들면, 진수의 삼국지를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서 했던 그런 부류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어쨌든, "의의를 제기" 라고 쓰셨는데, 의의라는 것은 '말이나 글의 속 뜻' 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의를 제기" 라고 쓰셔야 할 듯 하네요.ㅎㅎ

    문맥상 '다른 의견이나 주장' 이 들어가야 맞을 듯한 전개네요.ㅎ

    어찌됐든 잘 보고 갑니다.^^ㅎ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날려서 쓰는 버릇이 있어서요.. 자주 틀리는 것이였습니다.. 지적 ㄳ 합니다..

      제가 쓴것 맞습니다. 맞고요..

  11. 향수 2009.07.31 0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조목조목 잘 비교하시면서 쓰셨네요..
    그저 알려진 정도의 역사만 알뿐이었는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런글 열심히 써주세요..
    부지런히 읽어드릴께요..

  12. 제가 알기로는 2009.07.31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실과 천명 모두 오직 <화랑세기>에만 기록되어 있어 그 둘이 가상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또 이런 글을 보니 흥미롭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공히 있는뎅..

      3녀인 천화를 말씀하시는것 아니신지요?

      화랑세기에는 덕만이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시호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덕, 천명, 천화.. 조금 냄새가 나지요.. 선화의 다른 이름 같은 천화라..

      흥미로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__^

  13. 재주소녀 2009.07.31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렵지만...잼있네요~
    댓글 쓰는거 어려운거 아니네요
    ㅋ 부끄럽지만 처음 써봅니다.

  14. 캐스퍼 2009.07.31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잘 정리 되신다면... 후에...
    "계급사회 변천사"를 쓰세요....
    아직까지....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근대화 시대....
    변변한 "계급사회의 변천사"가 없었습니다...
    아주 좋은 책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어려운 말씀을 저는 그정도는 아닙니당.. 제 밥그릇도 있는뎅.. ㅠ.ㅠ.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당.. 고수는 널려 있는게 강호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칭찬은 ㄳ히 받겠습니당.. 염치불구하공..

      물론 추천도 때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댓글들을 다시는 분들이라면.. ㅋㅋ ^___^;;;

  15. -- 2009.07.31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역시 신라의 골품제와 조선의 적서개념을 뒤섞으면 안된다는 댓글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서개념은 부계를 따르는 것이고

    골품제는 부계와 모계에 모두 적용되는 겁니다..

    두 가지를 같은 원리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부계뿐 아니라 모계혈통도 중시되었기 대문에 지소부인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선덕,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너무 사료를 쉽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셨네요...

  16. BlogIcon 아르제크 2009.08.30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초기에 왕가의 적서 문제가 엄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성계가 자신의 이모형 이원계가 '서자'라고 몰아 아버지 이자춘의 다루가치 직을 대신 취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이원계의 자녀들은 이천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계로부터 이반합니다)
    2. 이방원이 '서모'인(그러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세자 방석을 '서자'라는 이유로 폐했기 때문
    3. 성리학의 부계일원적 구조를 이제 막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또 태종 스스로가 성리학자이기도 했고요)

    왕가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함께 사회변혁에 대한 솔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적서 구분에 목을 매단 것입니다.
    실제 여말선초 사회에서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매모호한 측면조차 보입니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적자만을 인정하는 형태로 변해간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재상인 하륜은 3대째에 적손의 대가 끊기게 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당시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륜의 서손을 적손으로 인정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논의 결과, 공신 집안 하나를 우대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나라의 법을 확실히 하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특별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만일 적서의 구분이 이미 당연하고 엄밀한 것이었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꼭 신라까지 갈 것도 없이 고려말만 보더라도, 이모형제(이원계-이성계-이화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이부형제(이성림-염흥방)와 같은 케이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직에 등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엄밀한 적서차별과 재가녀의 자식에 대한 천대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라시대에 성골 진골 구분의 실체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에는 저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좀 읽은 사람으로서 동의합니다만, 갓쉰동님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서도 독자들에게 성골진골을 구분하는 신라라면 적서구분이 있었음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30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골/진골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서가 붙은 거지요.. ^___^

      왕은 무치인데 적서의 차별이 있었겠습니까만은,, 공식적인 왕비의 후손이 왕통을 잇는것은 당연한거지요.. 1차 고려를 한다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후계의 선택은 왕에 있는 것이고,,적이던 서던 말이지요.. 그러니 적서의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요..

  17. 냠냠냠 2009.09.22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초혼이라고해서 나이가 어렸을껏이라고 생각하는건 말 그대로 '짐작'이겠지요.

  18. BlogIcon 천산 2009.10.14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국유사왕력보에 기록된 배필이 되는 飮갈문왕이 누구인지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수절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편이 죽은 후가 되는데, 갓쉰동님은 飮갈문왕이 선덕여왕 시절에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알고 계시네요! 왜 그렇습니까? 님의 주장대로라면, 서기634년에 飮갈문왕을 세웠는데, 언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10.15 0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절은 농담이였습니당.. ㅋㅋ
      그러니 음갈문왕이 언제 사망했는지, 아닌지는 제가 알길이 없지용..

  19. 레아 2009.10.22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젊었을때 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선 태클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평왕은 10대 중반의 나이에 등극을 해서 왕위 계승기간이 자그만치 50여년이 되는데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면 그건 진평왕이 임기 말년에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이야기 이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22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덕여왕은 젊었을때 즉위한 것 같아용..
      마야부인이 천명의 어미라는 기록은 없지용.. 반면에 덕만은 마야와 진평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든요. ㅋㅋ

  20. BlogIcon soup can storage rack 2012.11.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21.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dogs for sale 2012.11.05 1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거나 이설이 있음을 곧잘 지적하던 일연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는데 이의제기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의 무서움은 기존 사서의 빈틈을 칼처럼 파고 들고 있다. 그동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에 관한 기록에서도 화랑세기의 위력은 발휘된다.

그런데 뜸금없이 화랑세기는 무슨 소리, 덕만은 진평왕의 딸인것은 분명하고, 마야부인의 딸인것은 맞지만, 천명이 맏이고, 덕만은 천명의 동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이 천명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는 무엇을 근거로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언젠가는 화랑세기를 심층 분석할 때가 올것이다.


사실 덕만의 기록을 심층분석하고 있는 이유도 현존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 뛰어들려는 의도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그동안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지만, 천명은 마야의 소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나아가 덕만이 기존에 알고 있던 늙었을때 왕위에 오르지 않고, 극히 젊은 나이때 즉위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또하나, 덕만과 천명이 다른 출자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이전글에서 흘렸다.

덕만이 가지고 있는 남성스런 이름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신라 당시에도 여성은 여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덕만의 어미인, 마야, 진평의 어미인 만호(이것도 약간의 중성을 넘어 남성성이 보이긴한다.) 지소, 지조, 선혜왕후, 보희,문희 등 그 나름대로 여성성이 보이지만, 뜸금없이 덕만이라니, 덕만이 가지고, 있는 뜻은 결코 나쁜 뜻은 아니다. 덕을 널리 퍼트리고 길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글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덕만의 이름이 가지는 남성성

덕만이 천명의 나이어린 이복동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여자 아이의 이름에 남자의 이름을 붙혀 다음 출생자가 남자이길 소망하는 이름을 짓기고 한다. 또한, 여자이름 중에 끝순이, '말희', '끝네', '말자'라는 이름은 대부분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말자는 뜻도 있지만, 여자 아이는 그만 낳자란 뜻을 포함하고, 삼신할미에게 다음은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름에서도 덕만은 위로 많은 언니들을 두었음직하지 않는가? 덕이 있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태어나자 마자, 왕실에 아들들로 번창할 덕을 빌었음 직한 이름이니 말이다.

 
만약, 덕만이 천명보다 언니라면 진평왕의 첫번째 공주의 이름을 '덕만'이란 남성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여쁜 공주의 이름에 덕만이라니, 다음에 왕자를 생산을 염원하기 위해서 '덕만'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만만의 콩떡이 된다. 진평은 왕이다. 언제든지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진평왕 초년에 덕만의 이름을 지었다면 진평왕의 머리가 좀 이상스러운 것이다.

 
덕만의 이름은 진평왕과 왕실의 절실한 적통을 이을 왕자를 바라는 이름이다. 또한, 마야도 제일 왕후는 아닌 것이다.  

덕만과 천명이 이복자매라는 또 다른 증거 (세종과 그의 형 경녕군)

또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조선시대 세종에 관한 기록이다. 세종을 우리는 이방원의 3번째 아들로 알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하게된 배경도 너무나 잘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과연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일까? 아니라고 한다면 총맞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방원)의 3번째 아들이 아니다.


일단, 세종(이도)을 태종(이방원)의 3째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즉위 초년 세종이 세계를 기록한 내용을 살펴 보자.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 조선왕조 실록 세종


이기록만 있다면, 세종은 태종의 3째 아들 같지 않는가? 그리고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 전주이씨 대동종보 경녕군

드라마 대왕세종을 본 사람은 이방원의 또다른 아들 경녕군이란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종의 아들이고, 후비 효빈 김씨 소생이다. 그런데 경녕군은 1397년생 세종(이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경녕군은 세종보다 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머니는 효빈김씨로 세종과는 다른 후비 효빈 김씨라는 사실 뿐이다. 경녕군과 충녕군은 서로 출신성분 자체가 다르다.


그럼, 태종의 셋째아들은 누구일까? 세종일까? 아니면 경녕군일까? 경녕군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답은 둘째로 알고 있는 효령대군이다. 드라마 세종대왕에서는 경녕군을 효령대군보다 아우(?)로 했었던것 같다. 기억에 의존하는 관계로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상식으로는 경녕군이였다.

사실 경녕군은 태종(이방원)의 첫째인 양녕대군(1394년) 다음 1395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1396년 태어난 효령대군 보다도 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3번째 아들 세종(이도:충녕대군)은 잘못된 것일까?  답은 아니다,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이 맞다. 이유는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3번째라는 것이고, 적통을 이을 3번째 왕자가 세종(충녕군:이도)이란 뜻이 된다. 왕의 계승서열 3순위인 3번째 왕자라는 것이다. 사사로이는 경녕군이 충녕군(세종)의 형이 되지만, 왕통서열은 존재조차 미미한 후비의 소생이 된다. 물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후비가 되거나 폐출되어 폐서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왕가의 일은 적자/서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양반, 서얼을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서얼은 처주지도 않았다. 특별히 기록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또한, 정비의 소생이냐 후비의 소생이냐의 차이에 따라 신분은 하늘과 땅이 되는 것이다. 같은 왕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연구할때 적자, 서자, 적통를 구별할 줄 모르면 삼천포로 빠진다.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왕위를 잇는데 신라가 조선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이 있었지 않겠는가? 진골도 아니고, 성골임금인데 말이다. 사실 글쓴이는 성골.진골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살피고 살펴봐도 성골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왕족, 귀족의 구분만 읽었다. 

그럼 다시 신라의 선덕왕(덕만)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 삼국사기 신라 춘추왕 원년

이제 요즘과는 다른 적자/서자, 양반/서얼 등 왕가의 룰이나 양반가의 룰에 따라, 읽어보자.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딴지맨인 일연이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 기사에 딴지를 걸지 않는 이유는 일연도 마야부인의 맏딸로 덕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딴지맨 일연이 삼국사기에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의 늙으막에 얻은 승만왕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승만왕후에 아들이 없어 왕통을 이을수 없었기 때문에 덕만이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연은 삼국사기에는 없는 덕만이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짐작하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덕만의 결혼기사이다.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왕이 왕위에 있을때 결혼하고 있다니, 덕만이 왕위에 오를때 어렸다는 결정타가 아닌가? 물론, 남자왕처럼 비를 많이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구를 누구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첫결혼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한다.

현존하는 <화랑세기>를 의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제 예고한 대로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을때 덕만에 대한 평가를 보도록 하자.

위의 문장은 선덕(덕만)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하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뒤의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내용을 수식하기 위한 내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덕만과 관련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

성품이 너그럽고,어질다
  영묘사 화재사건을 일으킨 <지귀설화>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김유신의 춘추/문희불쇼>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총명하다.
<모란꽃,모란씨서되>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민첩하다

200
631년에 진평왕 말년 <칠숙의 난>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아직도 <성조황고>를 들어서 덕만은 나이가 많았을 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분이나 "그건 니생각이고"라고 하는 분들은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황고>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거를 제시했다. 귀찬으신 분을 위해서 요약하자면,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황제)의 성숙한 여식이란 뜻이다.

너무 어릴때 628년이전 문희와 김춘추를 얶어준 사건이 628년이라면 너무 덕만이 이른시기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르고, 632년 결혼하고, 연호를 바꾸는  것을 근거로 635년 18~20세 전후라면 <모란꽃>, <김유신불쇼> 사건들은 덕만으로서 너무 어릴때 사건이 아닌가 의심할 수 도 있다. 

632년 16세에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627년은 11살때 일이고, 628년이면 12살때 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좀 어려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모란꽃 사건은 늙은 왕이 아주 어린 공주에나 물어 봄직한 말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엔 깜짝 놀랄 추리 능력을 보인 덕만을 보고, 진평과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용봉의 자질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기록이  "
총명하다"는 기록으로 남았다면 어떨가? 또한, 12살이전에 있었던 김유신의 불쇼에서 살려준 문희와 그의 복중 아들 법민은 어떨까? 어리지만 너그러워움의 상징이 아닌가?  지귀심화에서 신분도 미천한 지귀를 위해서 행한 행동들은 "너그러움" 자체이다. 또한, 지귀심화로 소실된 영묘사와 잦은 화재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할때 처리하는데 부적같은 주문을 만들어 백성들을 안정화 시키는 것으로 너그러움과 총명함과 민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민첩하다" 라는 말은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때, 단순한 미사어구가 아닌 , 덕만은 <성조황고>이니 정통성에 하자도 없을 뿐만 아니고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PS. 사실 세종대왕의 기사는 천명과 덕만은 같은 어미의 자식이다.라고 주장하는 혹시 모를 딴지가 들어올 반박문을 위해서 남겨두었습니다만, 이제 노출합니다. 이외에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출자를 비교해 본다면, 왜 적통 적자/서자에 연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실 암투의 시작과 끝은 적자들간에도 있었지만, 서자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정비와 후비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후비가 정비가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생들인 왕자나 공주들은 인생의 역전 대박 로또가 되니 말입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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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호.. 2009.07.30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보고갑니다. 이복형제라.....

  3. 헤윰 2009.07.30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4. 재밌네욤 2009.07.31 0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보았네요~~ 그런데 저도 앞에 계신 '성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조선시대의 적장자 제도를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두 사회 모두 철저한 신분사회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골품제와 적장제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등장한 적장자의 개념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님께서 마지막 부분에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쓰신 부분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런지...

    각기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물론 그 만큼 강력한 신분 사회였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으셨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이러한 유교적인 관례가 뿌리 내린 것은 조선 성종 이후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된 때 부터 입니다..

    단적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의 후궁 중에 시집갔다 온 과부도 있었답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죠..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답니다. 하지만 중기이후에 대전체제가 완성되면서 부터 아들

    을 중심으로 족보가 쓰여지고 있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서는 비슷하고, 신라가 더 강경했지요..

      이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중기 이후다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남.여, 적서 차별 등 중기 조선 중기이후에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초기 기록을 내 놓은것 아닌가요? 그것도 살펴 보시길..

      왜 하필 조선의 초기기록을 들어서 조선과 신라를 비교했겠는지요..

      이글로 답변이 충분히 되었기를..
      님들은 저의 주장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보론 성격입니다.. 반론이 아니공..

  5. 흐음... 2009.07.31 0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이 되겠습니다만.....그냥 왠지 썩 잘 읽혀지는 글은 아니라서....뭔가 말이 맞지 않네요. 제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ㅡㅡ>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의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들(혹은 소생)이 될 순 없다. 물론, 그의 의붓 큰어미 이기는 하다." 라고 쓰셔야 말이 될듯 하네요.

    또 "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일연은 선덕 또한" 다음에 왜 진평왕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쓰신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_-;

  6. 딩가딩가딩 2009.07.31 0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

  7. BlogIcon Blah 2009.07.31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 기억이지만 그전 국사선생님 중 한 분이 조선에 유교사상이 들어오기 전까진
    남존여비사상이 조선같지 않았다...고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한 예로 여자가 재가를 하는 건 꿈도 못꾸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전까지만해도
    여자들의 혼인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고 하시면서요.

    암튼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요즘 재밌게 보는 선덕여왕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겠습니다.

  8. 가야진 2009.07.31 0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때는 사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게 사실 의미가 불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혼은 허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남녀 모두가 중혼적 성격을 가진 연인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자식도 모계사회인 신라의 골품제에 따라 진골까지는 신분을 부여 받았으니까요.

    여성의 힘에 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천추태후 등에서도 황제가 죽은 후 연인을 두는 모습이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다수의 역사서에서도 조선의 유고 사상 또한 중기 이후 정착한 것이고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권이 힘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보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남성사회로 이어져오긴 했지만,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남성의 권력이 사회의 기득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해요.(내조의 여왕처럼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한 실질적 정치가 아내와 어머니등의 여성이 상당했으니까요.)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가긴 했지만, 저는 천명이 마야의 자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잉첩들도 순수 혈통인 성골 출신으로만 이루어 져있기는 해도 이미 족강된 후이고, 천명이 후비의 자식이라면 정비의 자식인 덕만과 나이가 비슷한 상황에서 왕위계승자인 아들이 없다고해도 마야소생 이외의 인물이 권력을 가지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신라에서 초혼은 대부분 왕을 제외하고는 여성의 골품이 더 높거나 같은 진골이라 해도 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와 하는 것이 일반적이 잖아요.


    예전에 어디서 들은 말인지, 읽은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머리 속에는 성골에서 족강되면 진골의 가장 위 계층이 되고 최근에 족강된 사람이 더 오래전 족강된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기억이 있거든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천명이 마야 소생이 아니라면 용수와 천명의 결혼은 불가하지 않았을까요?
    천명의 어머니가 성골이었다해도 용수보다는 더 오래전에 족강되었을테니까요.

    아, 글을 쓰다보니.... 아닐 수도 있겠네요. 천명의 어머니가 용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저것도 가능하긴 할 것 같아요.

    휴, 요즘 선덕여왕 때문에 도서관에 선덕여왕 관련 책을 다 봐서 역사 공부는 되는데, 드라마 나이 설정이 뒤죽박죽이라 덕분에 제 머리도 뒤죽박죽이예요.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암튼, 저는 천명이 후비소생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글 덕분에 경녕군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됬어요. 브라보~!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비이거나 마야이전 정비라고 했던것 같은뎅..
      족강은 조선이 더 심했지요.. 신라보단

      오르기도 힘들고, 내려가기는 쉽고, 하지만, 조선의 전란이후는 다르지만.. 돈을 주면 언제든지.. 파고 사는게 족이였으니요..

  9. 오타발견!! 2009.07.31 0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께서 쓰신 글인가요? 잘 봤습니다.

    코를 찔찔 흘리며 다니던 어릴 시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관계로 우연히 지나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선덕여왕도 너무 좋아합니다.ㅎㅎ)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됐던 글인 것 같아 잘 보고 갑니다.

    근데, 서론에 나오는 일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지은 그를 말씀하시는게 맞겠죠?


    예를 들면, 진수의 삼국지를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서 했던 그런 부류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어쨌든, "의의를 제기" 라고 쓰셨는데, 의의라는 것은 '말이나 글의 속 뜻' 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의를 제기" 라고 쓰셔야 할 듯 하네요.ㅎㅎ

    문맥상 '다른 의견이나 주장' 이 들어가야 맞을 듯한 전개네요.ㅎ

    어찌됐든 잘 보고 갑니다.^^ㅎ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날려서 쓰는 버릇이 있어서요.. 자주 틀리는 것이였습니다.. 지적 ㄳ 합니다..

      제가 쓴것 맞습니다. 맞고요..

  10. 향수 2009.07.31 0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조목조목 잘 비교하시면서 쓰셨네요..
    그저 알려진 정도의 역사만 알뿐이었는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런글 열심히 써주세요..
    부지런히 읽어드릴께요..

  11. 제가 알기로는 2009.07.31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실과 천명 모두 오직 <화랑세기>에만 기록되어 있어 그 둘이 가상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또 이런 글을 보니 흥미롭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공히 있는뎅..

      3녀인 천화를 말씀하시는것 아니신지요?

      화랑세기에는 덕만이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시호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덕, 천명, 천화.. 조금 냄새가 나지요.. 선화의 다른 이름 같은 천화라..

      흥미로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__^

  12. 재주소녀 2009.07.31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렵지만...잼있네요~
    댓글 쓰는거 어려운거 아니네요
    ㅋ 부끄럽지만 처음 써봅니다.

  13. 캐스퍼 2009.07.31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잘 정리 되신다면... 후에...
    "계급사회 변천사"를 쓰세요....
    아직까지....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근대화 시대....
    변변한 "계급사회의 변천사"가 없었습니다...
    아주 좋은 책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어려운 말씀을 저는 그정도는 아닙니당.. 제 밥그릇도 있는뎅.. ㅠ.ㅠ.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당.. 고수는 널려 있는게 강호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칭찬은 ㄳ히 받겠습니당.. 염치불구하공..

      물론 추천도 때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댓글들을 다시는 분들이라면.. ㅋㅋ ^___^;;;

  14. -- 2009.07.31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역시 신라의 골품제와 조선의 적서개념을 뒤섞으면 안된다는 댓글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서개념은 부계를 따르는 것이고

    골품제는 부계와 모계에 모두 적용되는 겁니다..

    두 가지를 같은 원리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부계뿐 아니라 모계혈통도 중시되었기 대문에 지소부인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선덕,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너무 사료를 쉽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셨네요...

  15. BlogIcon 아르제크 2009.08.30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초기에 왕가의 적서 문제가 엄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성계가 자신의 이모형 이원계가 '서자'라고 몰아 아버지 이자춘의 다루가치 직을 대신 취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이원계의 자녀들은 이천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계로부터 이반합니다)
    2. 이방원이 '서모'인(그러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세자 방석을 '서자'라는 이유로 폐했기 때문
    3. 성리학의 부계일원적 구조를 이제 막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또 태종 스스로가 성리학자이기도 했고요)

    왕가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함께 사회변혁에 대한 솔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적서 구분에 목을 매단 것입니다.
    실제 여말선초 사회에서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매모호한 측면조차 보입니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적자만을 인정하는 형태로 변해간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재상인 하륜은 3대째에 적손의 대가 끊기게 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당시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륜의 서손을 적손으로 인정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논의 결과, 공신 집안 하나를 우대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나라의 법을 확실히 하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특별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만일 적서의 구분이 이미 당연하고 엄밀한 것이었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꼭 신라까지 갈 것도 없이 고려말만 보더라도, 이모형제(이원계-이성계-이화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이부형제(이성림-염흥방)와 같은 케이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직에 등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엄밀한 적서차별과 재가녀의 자식에 대한 천대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라시대에 성골 진골 구분의 실체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에는 저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좀 읽은 사람으로서 동의합니다만, 갓쉰동님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서도 독자들에게 성골진골을 구분하는 신라라면 적서구분이 있었음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30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골/진골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서가 붙은 거지요.. ^___^

      왕은 무치인데 적서의 차별이 있었겠습니까만은,, 공식적인 왕비의 후손이 왕통을 잇는것은 당연한거지요.. 1차 고려를 한다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후계의 선택은 왕에 있는 것이고,,적이던 서던 말이지요.. 그러니 적서의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요..

  16. 냠냠냠 2009.09.22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초혼이라고해서 나이가 어렸을껏이라고 생각하는건 말 그대로 '짐작'이겠지요.

  17. BlogIcon 천산 2009.10.14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국유사왕력보에 기록된 배필이 되는 飮갈문왕이 누구인지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수절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편이 죽은 후가 되는데, 갓쉰동님은 飮갈문왕이 선덕여왕 시절에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알고 계시네요! 왜 그렇습니까? 님의 주장대로라면, 서기634년에 飮갈문왕을 세웠는데, 언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10.15 0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절은 농담이였습니당.. ㅋㅋ
      그러니 음갈문왕이 언제 사망했는지, 아닌지는 제가 알길이 없지용..

  18. 레아 2009.10.22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젊었을때 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선 태클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평왕은 10대 중반의 나이에 등극을 해서 왕위 계승기간이 자그만치 50여년이 되는데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면 그건 진평왕이 임기 말년에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이야기 이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22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덕여왕은 젊었을때 즉위한 것 같아용..
      마야부인이 천명의 어미라는 기록은 없지용.. 반면에 덕만은 마야와 진평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든요. ㅋㅋ

  19. BlogIcon soup can storage rack 2012.11.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20.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dogs for sale 2012.11.05 1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21. BlogIcon binary options 2013.02.21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

선덕여왕 미실(고현정)과 덕만(이요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고대하고 기다리던, 모녀상봉인 마야왕후와 덕만이 만났다. 예고편에는 덕만이 공주의 신분을 알고도, <어출쌍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중악으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극이 흥미진진 접입가경으로 흐르고 있다.


그동안 글쓴이는 덕만과 천명이 어미가 다른 형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증명하였다.

그런데 덕만이 몇살때 왕위에 올랐는지는 확증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성조황고(聖祖皇姑)때문이였다. 그중에 <황고: 왕의 시어머니 뻘여자 자식이라니>

<성조황고>의 일반적인 해석은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의 시어머니(姑)라는 뜻이 된다. 설마, 덕만이 진평의 시어머니뻘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진평의 나이만큼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천명과 덕만이 어머니가 다른 자매라고 주장을 하고 증명했지만, 시어머니뻘을 어떻게 해석할까의 의문이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슬퍼하는 천명(박예진)


그래서 덕만이 현재의 30대~40미만 이라면 충분히 시어머니뻘 소리를 들을 수있겠다는 생각이였다. 또한, 당시 신라사회에 일반적으로 이뤄진 조혼의 풍습 때문이였다. 박혁거세도 13세에 왕위를 이였고, 그의 부인 알영도 혁거세와 같은 나이에 왕후가 되었다. 그러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면, 충분히 충분히 시어미(姑)를 쓰기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는 것은 선덕왕 즉위원년 인 632년 대신 을제의 국정관장, 634년 3년 기사를 보고, 30대초반 보다는 나이가 어리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들었다.

마야왕후(윤유선)

삼국사기에는 이해(634년) 진평왕이 584년 진평왕 6년 부터 사용한 <건복>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었다.그래서 진평왕이 나이 어린 13세 전후에 왕위를 이었을 것으로 다들 추측하고 있다. 연호를 바꾸는 행위는 진흥왕

진평왕(조민기)

이 7살에 왕위에 오른 후 법흥의 딸이며,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551년 진흥왕 12년,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고 있었다. 551년 이해가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 진흥(심맥종)이 18세가 되는 해이다.


그렇다면, 덕만도 즉위 3년차에 비로소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첫번째 의문이고, 결정적인 의문은 634년 이해에 <삼국유사>에 의하면 작은아버지 국반(진안)갈문왕과 결혼을 하였다는 기록이다. 

기존 통설로는 50세가 넘었을것으로 짐작하는 나이에 첫 결혼이라? 좀 의심스럽지 않는가? 덕만이 나이가 많았다면, 아무리 석녀인 덕만의 결혼한 남편도 있었을 것이고, 덕만보다는 사위왕을 선호한(?) 신라에서 남편을 냅두고,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50세를 넘어서 자신보다 10살이상 많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은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해서 무엇하게?


덕만에게는 즉위 3년인 634년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또다른 의문을 증폭시키는 사례는 즉위 초년에 행해진 처사 때문이다. 국정을 <대신> 을제에서 의지하고 있다. 진흥왕이 어미니인 지소태후에 의지하고, 진평왕이 모후인 만호태후에게 의지하고 있듯히 말이다.  그리고 독자적인 노선을 펼칠때 연호까지 바꾼다.

그렇다면 덕만은 634년에 몇살이 되는 것일가?

덕만(남지현), 천명(신세경)

아무리 늦춰 잡아도 20대초반 밖에 안되지 않는가? 그래도 걸리는 문제는 <황고>이다.  그래서 도대체 <姑:시어미고>를 당대에는 어떻게 사용하고, 현재 한자를 쓰는 중국에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어사전을 보고, 뒤통수를 크게 한방 먹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글쓴이가 추측한 덕만은 어릴때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역시 안될땐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성현의 말씀이 또다시 뒤덜미를 잡는 순간이다.  

중국어 사전에서 姑의 활용 예
 [gū]  

시어미-고 부수: 女   총획수: 8

[번체]  부수: 女   총획수: 8

1. [명] 〔~儿〕 고모.

我的大姑到新疆支边去了。 - 우리 고모는 신장의 변경 개발을 지원하러 가셨다.
뜻풀이 검색결과 (1-5 / 총 13개)

고모(姑母)

[名] 1.  [gū mǔ]

고모부(姑母夫)

[名] 1.  [gū fù]

고식(姑息)

[名] 1.  [gū xī]

고종 사촌(姑從四寸)

[名] 1.  [gū biǎo]

내종(內從)

[名] 表兄弟姐妹  [gū biǎo xiōng dì jiě mèi]

 

我的大姑到新疆支边去了。 - 우리 고모는 신장의 변경 개발을 지원하러 가셨다.

大姑를 고모라고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해석을 할때는 큰시어니뻘 나이많은 어머니뻘 츠자 정도이다.
고종 사촌(姑從四寸) : 아버지 자매의 자식들

乡里子乡里样
촌 처녀는 촌티가 난다. 고자는 나이가 작은 여자 즉 처녀

顺得来失嫂意
올케에게 잘 보이면, 형수의 미움을 산다.
  • 관용구, 속담
    守好邻,学好邻,守着尼会参神
    좋은 이웃을 가까이하면 따라 배우고, 비구니가 옆에 있으면 참선(參禪)하는 것을 배운다.
  • 관용구, 속담
    舍不得娘,逮不住和尚
    처녀를 아까워하면 중을 잡지 못한다.

  • 니고 = 비구니, 고랑 = 처녀,고자= 처녀

    위의 사례를 볼때 姑는 그냥 성인 여자 를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정을 일구고 살아갈 그정도 뜻이지 않는가?
     

    姑란 여자를 높여 부른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시어미고:姑>가 가지고 있는 의문도 풀렸다.
    大姑를 고모라고 하듯이 <황고>는 진평왕의 시어미뻘이 되는게 아니라.진평왕의 시어머니뻘이라고 한다면 클날이지 않는가? 진평왕과 마야의 장녀는 진평왕의 시어미뻘이라니, 그러니 왕의 다큰 여식 또는 왕의 여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조황고:聖祖皇姑>란 성스런 조상을 둔 황제의 딸 : 아들이 있어서 장가를 보낼 나이정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30세전후 라는 뜻이 되지만,진평왕의 뒤를 잇기에 핏줄에 하자가 없는 정통성 있는 진평왕의 다 큰(성숙한) 자식 정도이다.<황고>의 황과 대응하여 황제(진평)의 결혼해서 어른 노릇할 정도의 나이인 성인여식이란 뜻이다. 

    진평의 왕비와 후손들


    왜? 덕만이 왕위를 이을때 <성조황고>를 올리게 되었을까?
     

    칠숙(안길강), 소화(서영희)

    진평왕은 적통을 이을 만한 아들은 없었으나, 딸들은 넘치고 넘쳤다는 의미도 된다.또한, 진평왕 말년 631년 에 있었던 이찬 칠숙의 난으로 이를 무마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관련족보들을 살펴본다면, 최소한 진평에게는 천명,?, 선화,덕만,덕만과 같이 마야왕후을 어미로 둔 동복자매 아우들 , 600년 이전 선화가 3번째 딸이라고 했으니 천명과 선화 사이에 둔 딸, 김인평을 남편으로 둔딸, 조계룡을 남편으로 둔딸 등 최소 7명이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그 많은 딸들 중에 적통을 이을 딸은 마야왕후 사이의 장녀인 정통성이 있는 덕만이라는 뜻이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여자라고 놀리지 말아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훌륭한 전왕의 딸이예요." 유행가 가사 같지 않는가? 그러니 덕만에 이찬 칠숙처럼 딴지(631년 반란)를 거는 행위는 하지 말라는 대국민 선언문이고, 덕만에 대한 국인(왕족과 귀족들)의 <충성서약문>인것이다. 
     

    알천(이승효)


    천명은 이전 왕후의 여식이나 후비의 소생이란 뜻이고, 정통성이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전 시리즈글 부터 읽어온 사람은 중복된 말이지만, 천명과 덕만은 같은 돌림자 자체도 없다. 또한, 진평의 딸이며,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의 남편이지만, 덕만보다 왕위계승에는 후순위가 된다. 자신의 아들인 춘추가 왕위에 오를때도 알천보다도 왕위승계서열에서 밀려 있었다.



    기존의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덕만과 천명
     

    덕만이 진평왕의 맞이라 했으니 천명은 덕만보다 나이가 어렸을 것이다.

    용춘(도이성)

    천명의 과 용춘(용수)의 아들인  춘추(603년)을 기준으로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많이 먹었을 것이다.그래서 <황고>라고 쓴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씨 서되 사건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다,선덕여왕이 김춘추와 문희를 엮어준것도 여왕시절에 해주었다.

    50

    자연발화(shc)

    대의 늙은 왕인 덕만을 보고, 사랑에 빠질 인간은 없다. 그러니 영묘사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은 덕만과 혜공의 이적과 일체화 시키고, 지귀설화는 이전의 대지도론의 기사를 베낀것이다.분황사에서 발견된 바늘과 가위는 여자의 신물이기 때문에 넣어 놓은 것이다. 더 나아가 5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634년 결혼은 작은아버지의 뒤배를 이용하기 위한 정략적으로 나이 많을 때 한것이고, 연호도 그때 바꾼것이다.출산을 염두한 행위는 결코 아니다.

    이말을 그냥 따라야 하는 것인가? 이야기들이 서로 미심쩍고, 화장실에 가서 똥을 다 눟지 못하고, 중간에 뒤처리도 못하고, 나온 찜찜함이 뭍어 있지 않는가? 

     

    딱한가지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

    정확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정확히 해석한다면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천명과 덕만이 있다.실제로 천명과 덕만이 같은 모후의 소생이라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한줄이라도 언급한적이 없다.

    천명은 마야부인 이전의 왕후(후비) 소생이다. 그러니 천명은 덕만보다 충분히 나이가 많다. <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의 핏줄을 이어 받는 임금의 딸이며 여황을 말한다.

    덕만(이요원)

    성조황고는 우리시대에도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첫대목이다. 일종의 선언문이지 않는가? 우리들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긴했나? 그냥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정에서 태어난거지 거창하게 역사적 사명을 띠우고 태어 났겠는가? 남.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관계를 맺었겠는가? 하긴 요즘처럼 줄어드는 애들과 키우기 힘든 환경에서는 역사적인 사명을 감을 가지지 않으면, 애를 낳기가 힘든 시기에 도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죽하면 애를 낳는게 애국하는 지름길이라고 하겠는가?

    어찌되었던, <성조황고> 당시 충성서약을 뒤로 하고, 632년 원년 을제의 기사와 634년는 덕만 3년의 기사를 다시 읽어 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을제(신구)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어떻게 읽히는가? 덕만이 왕위를 잇고, 직접통치를 못하고, 을제에게 의지했구나, 634년 진흥왕이나 진평왕의 사례에 비추어 덕만은 634년에 비로서 연호를 바꾸는 것으로 낭낭18세에 접어 들어구나,덕만은 634년 작은 아버지 국반과 결혼하는 것으로 보았을때 많이 잡아도 18세는 넘지 않았을 것이다. 영묘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덕만이였기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젊은 덕만과 지귀심화도 영묘탑 화재사건과 관련이 있구나. 이게 합리적인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위의 다음 view로 송고된 시리즈 기사를 몇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덕만(남지현), 소화(서영희)

    첫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넷째, 천명은 정비인 마야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마야의 후손으로는 덕만 말고도 또다른 자매(들)이 있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일곱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80년생이며 한국나이 30살인 이요원보다도 어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의 아역역할을 한 남지현은 2009년 현재 15세이다.덕만은 실제로 632년에 15~18세 정도에 늦어도 20세 전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지막 걸림돌인 <황고>도 충분히 사례를 들어서 증명하고, 해결하였다. 덕만의 출생의 비밀과 덕만의 기록들을 시리즈로 엮은 것을 끝내려고 한다.그동안 덕만이 어린나이(당시에는 충분한 나이)에 즉위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본다. ( 드라마 선덕여왕관련 사진의 저작권은 mbc에 있음 )

    다음편에는 선덕왕 원년에 보이는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를 해석해 볼것이다. 단순한 미사어구인가? 아닌가?하는 글이다. 시리즈 글을 읽은 분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이미 충분히 글로써 표현했기 때문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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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역사맨 2009.07.28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기존 학설보다 훨씬 설득력있네여
      공감합니다
      근데 궁금한게 있어여
      즉위때가 10대 중반에서 20대라면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나여? 게다가 김춘추보다도
      어리게 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8 1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579년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13세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566년 생인거지요.
        632년에 죽을 때 나이는 77세입니다.. 한갑이 다되어서 얻은 귀한 자식이 되는 겁니다..

        김유신도 61세인 회갑맞이 신부 지조(춘추/문희)을 맞이 하여 많은 자식을 낳지요.. 원술등 원짜 돌림 아들들..

        김유신에 비하면 김진평은 약과 입니다..
        김진평은 60이 한참 넘은 나이에 승만 손씨를 후비로 들이기도 합니다.. 아들보기 프로젝트 일환으로..

        결국에는 손들고 말지요. 덕만으로..

    3. BlogIcon 초록누리 2009.07.28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요즘 마음 비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저 픽션일뿐이다 이러고 세뇌시켜가면서요...ㅎ 그러고 보니까 색다른 재미도 생기고...

      • BlogIcon 갓쉰동 2009.07.28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즐길줄 아시는 군요.. 저는 이미 포기 했어용.. 그저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재미는 있거든요.. ㅋㅋ

        원작이 부실해서 그렇징..

    4. 역사맨 2009.07.28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또 있습니다
      만약 즉위때가 10대중반에서 20세정도라면
      김춘추와 문희를 엮어주는 사건에서
      나이가 너무 어리게 되지 않나여?

    5. ㅎㅎㅎ 2009.07.29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윤유선 님이세요.. 마야왕후역 맡으신분 ㅎㅎ 오타 .ㅎㅎ

    6. 지옥천사 2009.07.31 0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으로, 덕만의 결혼과 관련된 것인데요,

      선덕여왕 이후의 왕이 진덕여왕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진덕여왕의 아비가 국반갈문왕으로 되어있는데,

      미리 선덕여왕이 진덕여왕을 차기 왕으로 점찍어두고 있고,

      이후 이에 대한 정당성 확보차원으로 국반갈문왕을 남편으로 둔 게 아닐까 하네요..

      물론 선덕여왕이 석녀라는 건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성적 욕구(?) 해결 차원에서는

      그 당시 아주 개방적인 성문화였을 거라는 전제하에, '궁녀' 급에 해당하는 남성이 없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위키디피아에서 선덕여왕에 대한 남편에 대한 언급으로,

      "신라의 규례에 따라 3명의 남편을 두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제가 고대사에 대한 끈은 짧아서 신라의 규례까지는 알지 못하고, 이것의 진위 또한 잘 알지 못하지만,

      법칙으로 인해 3명의 남편을 두어야 했다면, 어차피 후사를 두지 못했던 선덕여왕의 당시 사정 상,

      후계자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작은아버지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추측도 성립하지 않을까요?

    7. 지옥천사 2009.07.31 0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딴지 좀 걸어 볼까요..

      우선, 저 중국어 사전, '신장' 어쩌고 저쩌고 나오는 걸 보아하니 최신 중국어 사전 같은데요,

      무려 1000년보다도 전에 쓰인 단어를, 것도 여러 해석이 가능한 한자어를 현대적 기준으로 보신 건 좀 오류라 봅니다.

      한국어의 '영감'도 현재의 의미로 쓰이기에는 그리 오래된 역사도 아니고,

      섬나라의 '오마에'도 원래는 귀인을 지칭한 단어였지요..

      '고'자에 시어미가 붙어있는 건,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에는 '시어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지(地)'가 현재는 '땅'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 고어인 '땅>따' 에서 따와

      아직까지도 '따 지'라고 하는 것처럼요..

    8. 2009.08.13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8.13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봉황은 기존의 통설을 따른거지요.. 분석없이..

        덕만이 맏이로 나온건,, 재대로 읽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것도 통설..

        덕만이 천명의 동생으로 나온것은 화랑세기를 따른 것 같습니다..

    9. 좋은 시도입니다만 2009.08.17 0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인지 사실인지 신뢰하기 어려운 화랑세기를 제쳐두면, 덕만은 분명히 천명의 언니입니다. 김춘추가 602년생인데 천명이 아무리 어려도 585년 정도에는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632년에 등극한 덕만의 나이는? 성조황고가 전혀 어색하지 않죠. 아울러 고대 신라어의 '고'가 무엇인지 알려면 현대 중국어에서보다는 현대 한국어에서 '고'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면 될 일 아닌가요?

      그럴듯한 추측들이지만 결국 사상누각이 아닌가 합니다. 아울러 삼국사기, 유사의 원본을 보시고 쓰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왕의 자식이 여럿 있을 때에 굳이 구별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아니면 서로 동복인지 이복인지 언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랑세기는 기존의 기록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은데, 예를 들어 '성골남진'도 있습니다. 주인장께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추측을 하셨지만, 이 모든 것이 현대 중국어의 한자 뜻 = 고대 신라어의 한자 뜻, 그리고 화랑세기=진짜, 삼국유사=믿기 어려움 이라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화랑세기가 아직 '불명확하다'는 점을 확실히 전제해 두고 추론하면, 위의 일곱 까지 추론 중 어느 하나 남는 것이 없군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0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고 진행하고 있는뎅..

        황고는 황제의딸이란 말 밖에 안되요.. 아무리 찾아봐도,..

        왜 할머니라고 하지요.. 신라사회를 알면 님처럼 말은 전혀 하지 않을텐데.. 아쉽군요..

        다른글도 보는 센스를..

    10. 좋은 시도입니다만 2009.08.17 1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랑세기 자체는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몇몇 글들을 봐도 화랑세기를 칭찬하는 등 화랑세기는 이미 사실이라는 가정을 깔고 시작하고 있지요. 삼국사기, 삼국유사만 가지고는 쉰동님과 같은 주장을 할 여지가 도저히 없습니다. 다른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서 말씀하셨는데, 사실 썩 좋은 비교는 아닙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온 신라 기사들과 비교를 하셨어야 합니다. 화랑세기가 진실이라는 '가정'이 증명되기 이전에 갓쉰동님의 주장은 모두 '가정'에 불과합니다.(신라사회를 알면... 이라고 하셨지만 화랑세기에 나온 부분들이 사실이 아니고, 미실이라는 인물도 지어낸 사람이라면, 쉰동님께서 알고계신 신라사회는 모 역사소설가가 지어낸 상상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쥬신이 어쩌구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쥬신의 출처는 모 만화가의 책일 뿐, 어떠한 사료적인 고증도 없습니다.

      갓쉰동님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금 여기 나온 것들이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시는 것은 환단고기 신봉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지 약간 걱정이 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떤이는 화랑세기를 왜 인정하지 않느냐고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님은 왜 화랑세기를 인정하냐고 하는군요..
        저 굉장히 화랑세기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어떤의도로 썼길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그리도 절묘하게 사이를 오가는지..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해 본적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님은 번역본 말고 원전을 본적이라도 있나요?

        여태까지 미실을 실존인물이라고 확정해서 한마디도 한적이 없는데.. 오히려 화랑세기 너무 정교해서 의심스럽다는 말은 수없이 했습니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교해야 한다고 했는데 절대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님은 글을 님이 보고 싶은 것만 필터링 해서보는 습관이 있는것 같군요..

        아참, 그리고 삼국시대는 똑같은 시대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서로 다른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 상례예요..님이 저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 패턴을 보이고, 서로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비교하면 안된다? 삼국시대와 비교해라? 도대체 삼국시대랑 비교를 그렇게 했는데도 왜? 조선과 비교하냐?니 대략 난감하네요..

        제가 삼국시대 자료를 가지고 기존의 설을 비판했으니 님이 삼국시대의 자료를 근거로 아님을 증명해주시는게 먼저 아닐까요? 그래야 제가 반박을 하지요?
        논쟁이나 토론은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님처럼 뜬구름 잡는게 아니고..

    11.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고'가 현대에만 성인여인들에 쓰인 말이다 이말은 님이 증명하시면 되요.. 제가 할일이 아니고.. 뜸금없이 용례도 밝히지 않고 현대에만 성인여성에 쓰인말이고 과거에는 다르게 썼다니.. 님은 이미, '고'의 용법에 저의 주장에 동의를 하는 겁니다..

      또한, 삼국사기 어디를 살펴봐도 마야가 진평의 아내라는 기록은 있지만, 천명의 어머니라는 기록은 없어요.. 해당 기록을 가져와서 반박을 하시면 됩니다.

    12.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은 <성조황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님의 해석좀 알려주세요..

    13. 난독증 2009.08.17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대체 어디에 덕만이 둘째라고 나왔다는거야 ? ㅎㅎ 없는 기록 지어내기 쩌네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이 어디에 둘째라고 나오던가요?
        덕만은 진평왕의 맏이며, 마야의 딸이라는 말은 있는데.

        이게 어찌 천명의 어미가 마야가 된다는 뜻이되지요..

        신라시대가 무슨 1부1처제 인줄 아시나? 신라왕이 1부1처를 했다는 증거좀 내 놓아 보시길 바랍니다.

    14. 난독증 2009.08.17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도 않은 1부1처 지어내질 않나 ㅋ 삼국사기 다른 기록 뒤져봐요 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계보를 정리 했나 안했나

    15. 난독증 2009.08.17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2-01-24-02

      어이없는 중국어사전보다는 한자 옥편이 훨 나을듯. 어떻게든 어거지로 붙이려고 하지 마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어머니
        ㉡고모(姑母)
        ㉢계집, 여자(女子), 부녀(婦女)의 통칭(通稱)

        계집,여자, 부녀의 통칭.. 됐습니까?

        님이 인용한 자전에도 명백히 나와 있잖아요... 안봐서 그럴까봐 그러십니까?

        증거를 제시하라니까 그러시넹..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다를..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며 덕만보다 언니라고 언급한건 현존하는 화랑세기 밖에 없어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천명의 어머니를 언급조차 않하고있다구요..

    16. 난독증 2009.08.17 2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쉰동님은 어떻게 '고'에서 '어린 여자'를 찾아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라고 안나와 있다고 하는데 천명이 덕만보다 언니라는 말 역시 없군요^^

      皇姑(황고) ①'돌아간 시어머니'의 높임말 ②아버지의 고모(姑母).

      이걸 보면 김춘추의 후손들의 고모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일단 기존 국사학계가 선덕여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부터 보고 오셔야 할듯?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皇姑(황고) ①'돌아간 시어머니'의 높임말 ②아버지의 고모(姑母). 곧 할아버지의 누이
        님이 제시한 겁니다. 이것도 이미 봤어요.. 님처럼 안보고 한게 안니고..

        님의 해석이면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되요..

        그래서 본문에 이야기 놓았잖습니까?

        님처럼 말하는 분이 계실까봐.. 덕만이 진평의시어미뻘이냐고..

        그냥 성숙한 여인, 성인 여인,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고.. 황고는 그냥 여황..요말입니다. 다른 용법이 없어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즉위년에 존호를 성조황고를 올리면서 춘추의 고모라고 하는 있겠습니까?

        기존 다수설을 깨자고 글을 쓰는 거지.. 기존 학설을 따를 바에는 왜글을 쓰겠습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재의 기준으로 하면 어린여자이고, 당대의 기준으로 하면 성인여성이라고 했을텐데요.. 13세 시집가고, 유신의 처인 지조도 15~6세정도인뎅..

        여성인 경우.. 생리하면 성인식을 치르는 것은 아시지요..

        설마 현재의 기준으로 신라를 보고 있는겁니까?

    17. 나그네 2009.10.12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이 글 퍼가도 되나요?

    18. 레아 2009.12.07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은 공주시절에 세번이나 결혼했지만 천성적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었죠. 게다 남지현의 시절 등극한것은 덕만이 아닌 진평왕이죠.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제위를 했으니까요.

    19. 레아 2009.12.07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을제로 하여금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는 것은 선덕여왕의 나이가 젊지않다는 것을 의미하죠. 만약에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였다면 그건 진평왕이 늦게 마야왕후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진평왕이 늦은 나이에 결혼한 사람은 승만왕후이죠. 그리고 선덕여왕이 재우 십년에 죽었는데 그 젊은 나이에 별다른 이유없이 죽었다는게 말도 안되고요.

    20. BlogIcon koc/SALM 2010.01.13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 내용이 맞다면 황고 칭호를 젊어서 받은 여자는 "선덕왕"이 유일하다는 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의 측천무후가 "고" 칭호를 자신에 붙인 때가 40대 말이었죠. 자칭인데도 그랬는데, 타칭을 절은 사람에게 붙여준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21.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선덕여왕 미실(고현정)과 덕만(이요원)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고대하고 기다리던, 모녀상봉인 마야왕후와 덕만이 만났다. 예고편에는 덕만이 공주의 신분을 알고도, <어출쌍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중악으로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극이 흥미진진 접입가경으로 흐르고 있다.


    그동안 글쓴이는 덕만과 천명이 어미가 다른 형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증명하였다.

    그런데 덕만이 몇살때 왕위에 올랐는지는 확증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성조황고(聖祖皇姑)때문이였다. 그중에 <황고: 왕의 시어머니 뻘여자 자식이라니>

    <성조황고>의 일반적인 해석은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의 시어머니(姑)라는 뜻이 된다. 설마, 덕만이 진평의 시어머니뻘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진평의 나이만큼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천명과 덕만이 어머니가 다른 자매라고 주장을 하고 증명했지만, 시어머니뻘을 어떻게 해석할까의 의문이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슬퍼하는 천명(박예진)


    그래서 덕만이 현재의 30대~40미만 이라면 충분히 시어머니뻘 소리를 들을 수있겠다는 생각이였다. 또한, 당시 신라사회에 일반적으로 이뤄진 조혼의 풍습 때문이였다. 박혁거세도 13세에 왕위를 이였고, 그의 부인 알영도 혁거세와 같은 나이에 왕후가 되었다. 그러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면, 충분히 충분히 시어미(姑)를 쓰기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는 것은 선덕왕 즉위원년 인 632년 대신 을제의 국정관장, 634년 3년 기사를 보고, 30대초반 보다는 나이가 어리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들었다.

    마야왕후(윤유선)

    삼국사기에는 이해(634년) 진평왕이 584년 진평왕 6년 부터 사용한 <건복>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었다.그래서 진평왕이 나이 어린 13세 전후에 왕위를 이었을 것으로 다들 추측하고 있다. 연호를 바꾸는 행위는 진흥왕

    진평왕(조민기)

    이 7살에 왕위에 오른 후 법흥의 딸이며,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551년 진흥왕 12년,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고 있었다. 551년 이해가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 진흥(심맥종)이 18세가 되는 해이다.


    그렇다면, 덕만도 즉위 3년차에 비로소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첫번째 의문이고, 결정적인 의문은 634년 이해에 <삼국유사>에 의하면 작은아버지 국반(진안)갈문왕과 결혼을 하였다는 기록이다. 

    기존 통설로는 50세가 넘었을것으로 짐작하는 나이에 첫 결혼이라? 좀 의심스럽지 않는가? 덕만이 나이가 많았다면, 아무리 석녀인 덕만의 결혼한 남편도 있었을 것이고, 덕만보다는 사위왕을 선호한(?) 신라에서 남편을 냅두고,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50세를 넘어서 자신보다 10살이상 많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은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해서 무엇하게?


    덕만에게는 즉위 3년인 634년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또다른 의문을 증폭시키는 사례는 즉위 초년에 행해진 처사 때문이다. 국정을 <대신> 을제에서 의지하고 있다. 진흥왕이 어미니인 지소태후에 의지하고, 진평왕이 모후인 만호태후에게 의지하고 있듯히 말이다.  그리고 독자적인 노선을 펼칠때 연호까지 바꾼다.

    그렇다면 덕만은 634년에 몇살이 되는 것일가?

    덕만(남지현), 천명(신세경)

    아무리 늦춰 잡아도 20대초반 밖에 안되지 않는가? 그래도 걸리는 문제는 <황고>이다.  그래서 도대체 <姑:시어미고>를 당대에는 어떻게 사용하고, 현재 한자를 쓰는 중국에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어사전을 보고, 뒤통수를 크게 한방 먹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글쓴이가 추측한 덕만은 어릴때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역시 안될땐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성현의 말씀이 또다시 뒤덜미를 잡는 순간이다.  

    중국어 사전에서 姑의 활용 예
     [gū]  

    시어미-고 부수: 女   총획수: 8

    [번체]  부수: 女   총획수: 8

    1. [명] 〔~儿〕 고모.

    我的大姑到新疆支边去了。 - 우리 고모는 신장의 변경 개발을 지원하러 가셨다.
    뜻풀이 검색결과 (1-5 / 총 13개)

    고모(姑母)

    [名] 1.  [gū mǔ]

    고모부(姑母夫)

    [名] 1.  [gū fù]

    고식(姑息)

    [名] 1.  [gū xī]

    고종 사촌(姑從四寸)

    [名] 1.  [gū biǎo]

    내종(內從)

    [名] 表兄弟姐妹  [gū biǎo xiōng dì jiě mèi]

     

    我的大姑到新疆支边去了。 - 우리 고모는 신장의 변경 개발을 지원하러 가셨다.

    大姑를 고모라고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해석을 할때는 큰시어니뻘 나이많은 어머니뻘 츠자 정도이다.
    고종 사촌(姑從四寸) : 아버지 자매의 자식들

    乡里子乡里样
    촌 처녀는 촌티가 난다. 고자는 나이가 작은 여자 즉 처녀

    顺得来失嫂意
    올케에게 잘 보이면, 형수의 미움을 산다.
  • 관용구, 속담
    守好邻,学好邻,守着尼会参神
    좋은 이웃을 가까이하면 따라 배우고, 비구니가 옆에 있으면 참선(參禪)하는 것을 배운다.
  • 관용구, 속담
    舍不得娘,逮不住和尚
    처녀를 아까워하면 중을 잡지 못한다.

  • 니고 = 비구니, 고랑 = 처녀,고자= 처녀

    위의 사례를 볼때 姑는 그냥 성인 여자 를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정을 일구고 살아갈 그정도 뜻이지 않는가?
     

    姑란 여자를 높여 부른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시어미고:姑>가 가지고 있는 의문도 풀렸다.
    大姑를 고모라고 하듯이 <황고>는 진평왕의 시어미뻘이 되는게 아니라.진평왕의 시어머니뻘이라고 한다면 클날이지 않는가? 진평왕과 마야의 장녀는 진평왕의 시어미뻘이라니, 그러니 왕의 다큰 여식 또는 왕의 여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조황고:聖祖皇姑>란 성스런 조상을 둔 황제의 딸 : 아들이 있어서 장가를 보낼 나이정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30세전후 라는 뜻이 되지만,진평왕의 뒤를 잇기에 핏줄에 하자가 없는 정통성 있는 진평왕의 다 큰(성숙한) 자식 정도이다.<황고>의 황과 대응하여 황제(진평)의 결혼해서 어른 노릇할 정도의 나이인 성인여식이란 뜻이다. 

    진평의 왕비와 후손들


    왜? 덕만이 왕위를 이을때 <성조황고>를 올리게 되었을까?
     

    칠숙(안길강), 소화(서영희)

    진평왕은 적통을 이을 만한 아들은 없었으나, 딸들은 넘치고 넘쳤다는 의미도 된다.또한, 진평왕 말년 631년 에 있었던 이찬 칠숙의 난으로 이를 무마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관련족보들을 살펴본다면, 최소한 진평에게는 천명,?, 선화,덕만,덕만과 같이 마야왕후을 어미로 둔 동복자매 아우들 , 600년 이전 선화가 3번째 딸이라고 했으니 천명과 선화 사이에 둔 딸, 김인평을 남편으로 둔딸, 조계룡을 남편으로 둔딸 등 최소 7명이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그 많은 딸들 중에 적통을 이을 딸은 마야왕후 사이의 장녀인 정통성이 있는 덕만이라는 뜻이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여자라고 놀리지 말아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훌륭한 전왕의 딸이예요." 유행가 가사 같지 않는가? 그러니 덕만에 이찬 칠숙처럼 딴지(631년 반란)를 거는 행위는 하지 말라는 대국민 선언문이고, 덕만에 대한 국인(왕족과 귀족들)의 <충성서약문>인것이다. 
     

    알천(이승효)


    천명은 이전 왕후의 여식이나 후비의 소생이란 뜻이고, 정통성이 없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전 시리즈글 부터 읽어온 사람은 중복된 말이지만, 천명과 덕만은 같은 돌림자 자체도 없다. 또한, 진평의 딸이며,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의 남편이지만, 덕만보다 왕위계승에는 후순위가 된다. 자신의 아들인 춘추가 왕위에 오를때도 알천보다도 왕위승계서열에서 밀려 있었다.



    기존의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덕만과 천명
     

    덕만이 진평왕의 맞이라 했으니 천명은 덕만보다 나이가 어렸을 것이다.

    용춘(도이성)

    천명의 과 용춘(용수)의 아들인  춘추(603년)을 기준으로 덕만은 천명보다 나이가 많이 먹었을 것이다.그래서 <황고>라고 쓴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덕만이 공주시절 모란씨 서되 사건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다,선덕여왕이 김춘추와 문희를 엮어준것도 여왕시절에 해주었다.

    50

    자연발화(shc)

    대의 늙은 왕인 덕만을 보고, 사랑에 빠질 인간은 없다. 그러니 영묘사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은 덕만과 혜공의 이적과 일체화 시키고, 지귀설화는 이전의 대지도론의 기사를 베낀것이다.분황사에서 발견된 바늘과 가위는 여자의 신물이기 때문에 넣어 놓은 것이다. 더 나아가 5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634년 결혼은 작은아버지의 뒤배를 이용하기 위한 정략적으로 나이 많을 때 한것이고, 연호도 그때 바꾼것이다.출산을 염두한 행위는 결코 아니다.

    이말을 그냥 따라야 하는 것인가? 이야기들이 서로 미심쩍고, 화장실에 가서 똥을 다 눟지 못하고, 중간에 뒤처리도 못하고, 나온 찜찜함이 뭍어 있지 않는가? 

     

    딱한가지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

    정확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정확히 해석한다면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천명과 덕만이 있다.실제로 천명과 덕만이 같은 모후의 소생이라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한줄이라도 언급한적이 없다.

    천명은 마야부인 이전의 왕후(후비) 소생이다. 그러니 천명은 덕만보다 충분히 나이가 많다. <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의 핏줄을 이어 받는 임금의 딸이며 여황을 말한다.

    덕만(이요원)

    성조황고는 우리시대에도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첫대목이다. 일종의 선언문이지 않는가? 우리들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긴했나? 그냥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정에서 태어난거지 거창하게 역사적 사명을 띠우고 태어 났겠는가? 남.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관계를 맺었겠는가? 하긴 요즘처럼 줄어드는 애들과 키우기 힘든 환경에서는 역사적인 사명을 감을 가지지 않으면, 애를 낳기가 힘든 시기에 도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죽하면 애를 낳는게 애국하는 지름길이라고 하겠는가?

    어찌되었던, <성조황고> 당시 충성서약을 뒤로 하고, 632년 원년 을제의 기사와 634년는 덕만 3년의 기사를 다시 읽어 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을제(신구)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어떻게 읽히는가? 덕만이 왕위를 잇고, 직접통치를 못하고, 을제에게 의지했구나, 634년 진흥왕이나 진평왕의 사례에 비추어 덕만은 634년에 비로서 연호를 바꾸는 것으로 낭낭18세에 접어 들어구나,덕만은 634년 작은 아버지 국반과 결혼하는 것으로 보았을때 많이 잡아도 18세는 넘지 않았을 것이다. 영묘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덕만이였기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젊은 덕만과 지귀심화도 영묘탑 화재사건과 관련이 있구나. 이게 합리적인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위의 다음 view로 송고된 시리즈 기사를 몇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덕만(남지현), 소화(서영희)

    첫째, 덕만은 진평왕과 정비 마야의 장녀다.

    둘째, 천명이 나이는 많지만, 정비인 마야의 소생은 아니다.
    셋째, 천명과 덕만은 이복자매간이다.

    넷째, 천명은 정비인 마야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덕만보다 왕위승계에서 후순위다.
    다섯째, 마야의 후손으로는 덕만 말고도 또다른 자매(들)이 있다.  

    여섯째, 덕만은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했다.
    일곱째, 덕만은 왕위를 오를때, 현재 80년생이며 한국나이 30살인 이요원보다도 어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의 아역역할을 한 남지현은 2009년 현재 15세이다.덕만은 실제로 632년에 15~18세 정도에 늦어도 20세 전후에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지막 걸림돌인 <황고>도 충분히 사례를 들어서 증명하고, 해결하였다. 덕만의 출생의 비밀과 덕만의 기록들을 시리즈로 엮은 것을 끝내려고 한다.그동안 덕만이 어린나이(당시에는 충분한 나이)에 즉위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본다. ( 드라마 선덕여왕관련 사진의 저작권은 mbc에 있음 )

    다음편에는 선덕왕 원년에 보이는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를 해석해 볼것이다. 단순한 미사어구인가? 아닌가?하는 글이다. 시리즈 글을 읽은 분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이미 충분히 글로써 표현했기 때문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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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역사맨 2009.07.28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기존 학설보다 훨씬 설득력있네여
      공감합니다
      근데 궁금한게 있어여
      즉위때가 10대 중반에서 20대라면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나여? 게다가 김춘추보다도
      어리게 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8 1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579년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때는 13세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566년 생인거지요.
        632년에 죽을 때 나이는 77세입니다.. 한갑이 다되어서 얻은 귀한 자식이 되는 겁니다..

        김유신도 61세인 회갑맞이 신부 지조(춘추/문희)을 맞이 하여 많은 자식을 낳지요.. 원술등 원짜 돌림 아들들..

        김유신에 비하면 김진평은 약과 입니다..
        김진평은 60이 한참 넘은 나이에 승만 손씨를 후비로 들이기도 합니다.. 아들보기 프로젝트 일환으로..

        결국에는 손들고 말지요. 덕만으로..

    3. BlogIcon 초록누리 2009.07.28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요즘 마음 비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저 픽션일뿐이다 이러고 세뇌시켜가면서요...ㅎ 그러고 보니까 색다른 재미도 생기고...

      • BlogIcon 갓쉰동 2009.07.28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즐길줄 아시는 군요.. 저는 이미 포기 했어용.. 그저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재미는 있거든요.. ㅋㅋ

        원작이 부실해서 그렇징..

    4. 역사맨 2009.07.28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또 있습니다
      만약 즉위때가 10대중반에서 20세정도라면
      김춘추와 문희를 엮어주는 사건에서
      나이가 너무 어리게 되지 않나여?

    5. ㅎㅎㅎ 2009.07.29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윤유선 님이세요.. 마야왕후역 맡으신분 ㅎㅎ 오타 .ㅎㅎ

    6. 지옥천사 2009.07.31 0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으로, 덕만의 결혼과 관련된 것인데요,

      선덕여왕 이후의 왕이 진덕여왕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진덕여왕의 아비가 국반갈문왕으로 되어있는데,

      미리 선덕여왕이 진덕여왕을 차기 왕으로 점찍어두고 있고,

      이후 이에 대한 정당성 확보차원으로 국반갈문왕을 남편으로 둔 게 아닐까 하네요..

      물론 선덕여왕이 석녀라는 건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성적 욕구(?) 해결 차원에서는

      그 당시 아주 개방적인 성문화였을 거라는 전제하에, '궁녀' 급에 해당하는 남성이 없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위키디피아에서 선덕여왕에 대한 남편에 대한 언급으로,

      "신라의 규례에 따라 3명의 남편을 두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제가 고대사에 대한 끈은 짧아서 신라의 규례까지는 알지 못하고, 이것의 진위 또한 잘 알지 못하지만,

      법칙으로 인해 3명의 남편을 두어야 했다면, 어차피 후사를 두지 못했던 선덕여왕의 당시 사정 상,

      후계자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작은아버지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추측도 성립하지 않을까요?

    7. 지옥천사 2009.07.31 0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딴지 좀 걸어 볼까요..

      우선, 저 중국어 사전, '신장' 어쩌고 저쩌고 나오는 걸 보아하니 최신 중국어 사전 같은데요,

      무려 1000년보다도 전에 쓰인 단어를, 것도 여러 해석이 가능한 한자어를 현대적 기준으로 보신 건 좀 오류라 봅니다.

      한국어의 '영감'도 현재의 의미로 쓰이기에는 그리 오래된 역사도 아니고,

      섬나라의 '오마에'도 원래는 귀인을 지칭한 단어였지요..

      '고'자에 시어미가 붙어있는 건,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에는 '시어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지(地)'가 현재는 '땅'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 고어인 '땅>따' 에서 따와

      아직까지도 '따 지'라고 하는 것처럼요..

    8. 2009.08.13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8.13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봉황은 기존의 통설을 따른거지요.. 분석없이..

        덕만이 맏이로 나온건,, 재대로 읽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것도 통설..

        덕만이 천명의 동생으로 나온것은 화랑세기를 따른 것 같습니다..

    9. 좋은 시도입니다만 2009.08.17 0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설인지 사실인지 신뢰하기 어려운 화랑세기를 제쳐두면, 덕만은 분명히 천명의 언니입니다. 김춘추가 602년생인데 천명이 아무리 어려도 585년 정도에는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632년에 등극한 덕만의 나이는? 성조황고가 전혀 어색하지 않죠. 아울러 고대 신라어의 '고'가 무엇인지 알려면 현대 중국어에서보다는 현대 한국어에서 '고'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면 될 일 아닌가요?

      그럴듯한 추측들이지만 결국 사상누각이 아닌가 합니다. 아울러 삼국사기, 유사의 원본을 보시고 쓰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왕의 자식이 여럿 있을 때에 굳이 구별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아니면 서로 동복인지 이복인지 언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랑세기는 기존의 기록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은데, 예를 들어 '성골남진'도 있습니다. 주인장께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추측을 하셨지만, 이 모든 것이 현대 중국어의 한자 뜻 = 고대 신라어의 한자 뜻, 그리고 화랑세기=진짜, 삼국유사=믿기 어려움 이라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화랑세기가 아직 '불명확하다'는 점을 확실히 전제해 두고 추론하면, 위의 일곱 까지 추론 중 어느 하나 남는 것이 없군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0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세기를 인용하지 않고 진행하고 있는뎅..

        황고는 황제의딸이란 말 밖에 안되요.. 아무리 찾아봐도,..

        왜 할머니라고 하지요.. 신라사회를 알면 님처럼 말은 전혀 하지 않을텐데.. 아쉽군요..

        다른글도 보는 센스를..

    10. 좋은 시도입니다만 2009.08.17 1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랑세기 자체는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몇몇 글들을 봐도 화랑세기를 칭찬하는 등 화랑세기는 이미 사실이라는 가정을 깔고 시작하고 있지요. 삼국사기, 삼국유사만 가지고는 쉰동님과 같은 주장을 할 여지가 도저히 없습니다. 다른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서 말씀하셨는데, 사실 썩 좋은 비교는 아닙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온 신라 기사들과 비교를 하셨어야 합니다. 화랑세기가 진실이라는 '가정'이 증명되기 이전에 갓쉰동님의 주장은 모두 '가정'에 불과합니다.(신라사회를 알면... 이라고 하셨지만 화랑세기에 나온 부분들이 사실이 아니고, 미실이라는 인물도 지어낸 사람이라면, 쉰동님께서 알고계신 신라사회는 모 역사소설가가 지어낸 상상력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쥬신이 어쩌구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쥬신의 출처는 모 만화가의 책일 뿐, 어떠한 사료적인 고증도 없습니다.

      갓쉰동님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금 여기 나온 것들이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시는 것은 환단고기 신봉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지 약간 걱정이 됩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떤이는 화랑세기를 왜 인정하지 않느냐고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님은 왜 화랑세기를 인정하냐고 하는군요..
        저 굉장히 화랑세기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어떤의도로 썼길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그리도 절묘하게 사이를 오가는지..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해 본적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님은 번역본 말고 원전을 본적이라도 있나요?

        여태까지 미실을 실존인물이라고 확정해서 한마디도 한적이 없는데.. 오히려 화랑세기 너무 정교해서 의심스럽다는 말은 수없이 했습니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교해야 한다고 했는데 절대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님은 글을 님이 보고 싶은 것만 필터링 해서보는 습관이 있는것 같군요..

        아참, 그리고 삼국시대는 똑같은 시대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서로 다른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 상례예요..님이 저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 패턴을 보이고, 서로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비교하면 안된다? 삼국시대와 비교해라? 도대체 삼국시대랑 비교를 그렇게 했는데도 왜? 조선과 비교하냐?니 대략 난감하네요..

        제가 삼국시대 자료를 가지고 기존의 설을 비판했으니 님이 삼국시대의 자료를 근거로 아님을 증명해주시는게 먼저 아닐까요? 그래야 제가 반박을 하지요?
        논쟁이나 토론은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님처럼 뜬구름 잡는게 아니고..

    11.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고'가 현대에만 성인여인들에 쓰인 말이다 이말은 님이 증명하시면 되요.. 제가 할일이 아니고.. 뜸금없이 용례도 밝히지 않고 현대에만 성인여성에 쓰인말이고 과거에는 다르게 썼다니.. 님은 이미, '고'의 용법에 저의 주장에 동의를 하는 겁니다..

      또한, 삼국사기 어디를 살펴봐도 마야가 진평의 아내라는 기록은 있지만, 천명의 어머니라는 기록은 없어요.. 해당 기록을 가져와서 반박을 하시면 됩니다.

    12.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은 <성조황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님의 해석좀 알려주세요..

    13. 난독증 2009.08.17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대체 어디에 덕만이 둘째라고 나왔다는거야 ? ㅎㅎ 없는 기록 지어내기 쩌네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이 어디에 둘째라고 나오던가요?
        덕만은 진평왕의 맏이며, 마야의 딸이라는 말은 있는데.

        이게 어찌 천명의 어미가 마야가 된다는 뜻이되지요..

        신라시대가 무슨 1부1처제 인줄 아시나? 신라왕이 1부1처를 했다는 증거좀 내 놓아 보시길 바랍니다.

    14. 난독증 2009.08.17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도 않은 1부1처 지어내질 않나 ㅋ 삼국사기 다른 기록 뒤져봐요 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계보를 정리 했나 안했나

    15. 난독증 2009.08.17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handic.daum.net/dicha/view_detail.do?q=12-01-24-02

      어이없는 중국어사전보다는 한자 옥편이 훨 나을듯. 어떻게든 어거지로 붙이려고 하지 마세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어머니
        ㉡고모(姑母)
        ㉢계집, 여자(女子), 부녀(婦女)의 통칭(通稱)

        계집,여자, 부녀의 통칭.. 됐습니까?

        님이 인용한 자전에도 명백히 나와 있잖아요... 안봐서 그럴까봐 그러십니까?

        증거를 제시하라니까 그러시넹..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다를..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며 덕만보다 언니라고 언급한건 현존하는 화랑세기 밖에 없어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천명의 어머니를 언급조차 않하고있다구요..

    16. 난독증 2009.08.17 2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쉰동님은 어떻게 '고'에서 '어린 여자'를 찾아내셨는지 궁금하네요. 천명이 마야의 소생이라고 안나와 있다고 하는데 천명이 덕만보다 언니라는 말 역시 없군요^^

      皇姑(황고) ①'돌아간 시어머니'의 높임말 ②아버지의 고모(姑母).

      이걸 보면 김춘추의 후손들의 고모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일단 기존 국사학계가 선덕여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부터 보고 오셔야 할듯?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皇姑(황고) ①'돌아간 시어머니'의 높임말 ②아버지의 고모(姑母). 곧 할아버지의 누이
        님이 제시한 겁니다. 이것도 이미 봤어요.. 님처럼 안보고 한게 안니고..

        님의 해석이면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되요..

        그래서 본문에 이야기 놓았잖습니까?

        님처럼 말하는 분이 계실까봐.. 덕만이 진평의시어미뻘이냐고..

        그냥 성숙한 여인, 성인 여인,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고.. 황고는 그냥 여황..요말입니다. 다른 용법이 없어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즉위년에 존호를 성조황고를 올리면서 춘추의 고모라고 하는 있겠습니까?

        기존 다수설을 깨자고 글을 쓰는 거지.. 기존 학설을 따를 바에는 왜글을 쓰겠습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08.17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재의 기준으로 하면 어린여자이고, 당대의 기준으로 하면 성인여성이라고 했을텐데요.. 13세 시집가고, 유신의 처인 지조도 15~6세정도인뎅..

        여성인 경우.. 생리하면 성인식을 치르는 것은 아시지요..

        설마 현재의 기준으로 신라를 보고 있는겁니까?

    17. 나그네 2009.10.12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이 글 퍼가도 되나요?

    18. 레아 2009.12.07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은 공주시절에 세번이나 결혼했지만 천성적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었죠. 게다 남지현의 시절 등극한것은 덕만이 아닌 진평왕이죠.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제위를 했으니까요.

    19. 레아 2009.12.07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을제로 하여금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는 것은 선덕여왕의 나이가 젊지않다는 것을 의미하죠. 만약에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였다면 그건 진평왕이 늦게 마야왕후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진평왕이 늦은 나이에 결혼한 사람은 승만왕후이죠. 그리고 선덕여왕이 재우 십년에 죽었는데 그 젊은 나이에 별다른 이유없이 죽었다는게 말도 안되고요.

    20. BlogIcon koc/SALM 2010.01.13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 내용이 맞다면 황고 칭호를 젊어서 받은 여자는 "선덕왕"이 유일하다는 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의 측천무후가 "고" 칭호를 자신에 붙인 때가 40대 말이었죠. 자칭인데도 그랬는데, 타칭을 절은 사람에게 붙여준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21.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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