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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꿈꾸는 것은 산다는 의미

미실 척살령은 진흥왕이 사후에 미실이 진흥왕 자신처럼 불교에 귀의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를 한다면 척살하라고 설원에게 밀서형식의 척살령을 내린다.


비담의 척살령도 미실의 척살령과 같이 덕만과 결혼한 이후 덕만은 궁을 떠날 것을 생각하고, 만약, 비담이 정치에 관여를 한다면 비담을 척살하라고 춘추에게 밀서를 내린다.


어머니 미실의 척살령과 아들 비담의 척살령은 사후에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미실과 비담은 왕실에서 버린 받는 다는 설정이고, 이를 간파한 미실이 설원과 모의해서 진흥을 독살하려한다.


진흥은 왕위를 첫째인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진평)에게 물려주려 하는 것 처럼, 덕만도 비담과 국혼을 한 이후 왕위를 춘추에게 물려준다는 암시를 맹약서에 담아 두고 있다. 맹약서에 <이궁(離宮)>은 ‘궁을 떠난다’는 뜻이다. 왕이 궁을 떠난다는 뜻은 왕위를 선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위의 대상은 춘추가 될 것이다. 비담과 국혼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2009/12/0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은 언제 처음 결혼했을까? - 비담과의 결혼은 사실일까?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 기사들은 글 말미에 관련기사 목록를 별도로 만들었으니 글을 다 읽고 추천 후 일독을 권함 )


진흥왕은 말년에 영흥사에 들어가 법의를 입고 생활하기도 했고, 진흥왕의 비인 사도비 또한, 진흥왕 사후에 영흥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설원과 세종도 영흥사에 들어가 말년을 보냈다고 하였다.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구니처럼 살던 미실과 세종과 설원을 역모에 연루시켜 버렸다. 한마디로 이순신이 일본군과 함께 선조를 내몰고 역모를 한다는 설정만큼 어처구니없다.

 

어쨌든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의 척살령과 비담의 척살령 닮은꼴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차이점은 없을까? 진흥왕은 미실에게 맹약서를 받지 않고 말로 때웠지만, 덕만은 비담을 믿지 못하고, 맹약서를 요구한다. 비담은 덕만의 요구에 순순히 맹약서를 작성하고 정치적 욕망이 아닌 사랑을 택한다. 하지만, 덕만은 비담을 믿지 못하고, 춘추에게 자신의 사후 비담이 정치에 관여를 한다면 죽여 버리라고 요구한다.

 

비담의 척살령과 미실의 척살령에는 공통점만이 있는 건 아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척살령을 보면, 극중에서 오류를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일단, 미실의 척살령에는 공식 문서의 형식을 띄고 있고, 비담의 척살령은 사문서 형식을 띄고 있다. 만약, 비담이 맹약를 어기고 덕만이 죽고, 정치일선에 복귀할 때, 춘추가 덕만의 척살령을 근거로 비담을 옥죄일 때, 비담은 척살령을 인정하지 않고, 춘추가 조작했다는 혐의를 씌우면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미실의 척살령은 간지로 무신년을 사용하고 있다. 무신년은 공교롭게도 588년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죽었는데, 죽은 후 진흥왕이 설원에게 척살밀명을 줄 수가 없다. 또한, 공문서의 형식을 취한 진흥왕의 미실 척살령은 기본적인 드라마 설정 오류를 범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미실은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였다. 그러니 아무리 진흥왕이 왕이라고 하더라도 미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척살령에 옥새를 찍을 수 없다. 한마디로 미실 척살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조문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실은 위조문서를 비담에 넘겨주고, 자살을 해버린다. 비담은 어머니 미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위조 척살령을 덕만에 건네주지 않고, 마침내 자신이 미실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덕만이 비담을 배척하는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만큼 미실의 척살령은 비담이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원죄를 제공하는 것이다.  얼마나 미실의 자살이 어처구니 없는 설정인지 알고 싶다면 다음 기사들을 참조 하기바란다.

2009/11/0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49회, 진흥왕(이순재) 신라의적 미실(고현정)척살 - 만화보다 못한 미실 죽음 고현정 하차

2009/10/2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기유년 미실의 난과 죽음, 극중 리얼리티 ZERO

진흥왕의 정상적인 미실 척살령이 되려면 옥새는 찍지 않고, 진흥왕의 수결이 되어야 하고, 진흥왕이 죽는 시점인 576년 병신년 간지를 써야한다고 기사를 전송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정상적인 것 같은 문서형식인 것 같은 간지도 맞고, 수결도 있는 비담 척살령을 춘추에 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드라마 작가나 제작진의 오류이다.


미실 척살령은 당연히 미실이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이니 옥새가 없고 <수결>만 있는 게  정상적이다. 하지만, 덕만은 왕으로 옥새를 관장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위조문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척살령에 <수결>과 <옥새>가 찍혀 있어야 한다.


또한, 비담의 척살령 칙서에는 <병오년>간지를 사용했다. 병오년은 646년이다. 그러니 극중 시제는 비담이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임명된 646년 11월이 지난 상태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극중 흐름이지만, <년>다음에 <월>이 나와야 하지만 <경신일>로 건너 뛰어 버린다.


요즘으로 치면 2009년 <모월> 12일에 만든 문서라는 뜻이다. 12일은 1년에 12번은 있다. 당연히 언제 만든 문서인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여전히 공문서가 지켜야할 기본적인 형식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담이 춘추가 내민 문서를 근거로 비담을 척살하려한다면 명분이 서지 않고 오히려 춘추가 역풍을 맞는다는 뜻이다. 또한, 간지와 함께 필히 사용해야 하는 게 연호이다. 미실의 척살령에는 <태창>을 써야 하고 비담 척살령은 선덕여왕 연호인 <인평>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미실의 척살령과 비담의 척살령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 보았다.


문제는 642년 8월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가 대패를 하고 비화군, 이서군, 압량주(경산)까지 밀리는 과정에서 646년 11월까지 시간이 활시위를 떠난 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갔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대야성을 빼앗기고 만 4년 3개월 동안 신라 내에서 4년을 싸웠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극중 어디에서도 4년 동안 싸웠다는 걸 알 수 는 없다. 단지 대야성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서군(청도)까지 빼앗겼다는 건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손이 오그라드는 전투신만 있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극중 리얼리티가 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는 뜻이다. 대야성에서 이서군까지 전투가 얼마나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다음 기사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2009/12/04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의 부자감세 백제 침공을 자초했다.
2009/12/07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비담 척살령이 떡밥인 몇가지 이유
2009/12/08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낚시 비담 척살령과 덤앤더머 계백과 유신 그리고 황당한 당나라 사신

642년 7월 부터 646년까지는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신라가 쉽게 서쪽 40여개성을 빼앗긴 이유도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관계에 있어서 당항성을 친다는 전략에 말려들어 군대를 경기도 일원에 증파한 신라의 오판을 백제가 타고들어서 쟁취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당나라 사신이 와서 고구려 원정에 동원할 청병을 요구하는 것처럼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백제는 당에 전수물자인 금광개 갑옷을 공급하고 향도를 자청하는 척하지만. 실제는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당의 요구에 3만 대군으로 고구려 남쪽국경를 침략한다. 백제의 금광개 갑옷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2009/07/10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신라에서 백제 특산물 황칠을 찾는 수나라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신라가 남쪽변경을 치다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때 백제는 신라의 서쪽 7개성을 함락시켜 버린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일대 격전을 치를 때 후방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있었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당군을 무찌른 이유도 후방에서 백제가 신라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때 당나라 도와주려다 신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러니 당 사신이 함부로 신라를 얍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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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은 언제 처음 결혼했을까? - 비담과의 결혼은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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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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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체리블로거 2009.12.10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웃긴건 원래 비담을 죽여야하는 건 진덕여왕의 몫인데 말이죠.
    가장 실망했던 점이 진덕여왕을 빼놓은 점입니다.
    저도 원래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고자 하는 사람인데요...
    존재 자체도 불투명한 미실은 집어놓고 정작 선덕여왕 바로 뒤인 진덕여왕을 빼놓고 춘추가 왕이
    될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하고 있는 선덕여왕이 참.....
    진덕여왕 출연시키지도 않고 계백을 출연시키고 다른 떡밥을 던질때부터 50회이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모든 역사서에서 인정하는 진덕여왕응을 빼놓고 허구적이라는 인물은 완전 미화시켜놓으니... 이거 원

  2. BlogIcon 라이너스™ 2009.12.10 0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비교해주셨네요^^
    잘보고갑니다. 좋은하루되세요~

  3. BlogIcon 좋은사람들 2009.12.10 0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십니다. 저 문서를 해독하시다니. ~ !!

  4. 임현철 2009.12.10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단하시네요.

  5. BlogIcon 초록누리 2009.12.10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덕만이 비담에게 맹약서를 요구했나요?
    저는 비담이 자발적으로 써왔다고 생각했거든요.;;
    글과 관련 없는 말이지만 왜 죽이라는 명을 밀서로 남기는지 진흥제나 덕만이나 이햐가 안간다는 것지지용^^*

  6. BlogIcon labyrint 2009.12.10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류가 많네요...
    음... 조금만 신경써도 저 정도는 아닐텐데요.
    트랙백 걸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7. BlogIcon 뽀글 2009.12.10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이야기는 조금어려워요..ㅠ

  8. BlogIcon 892 2009.12.10 1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어려서 그런거는 잘 모르겟는데 ... 한 두번해봣 나 ???
    또 하구 싶은데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가버렷네요 ㅠㅠ. 만.남 원합니다..
    haha10.com
    nunawa.com

  9. Maximin 2009.12.10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따위 막말 설정이라면 사실 승만이 덕만과 비담의 딸이라고 해도 납득될기세.
    그다음 비담은 딸과 덕만을 지키기 위해 일부로 반란을 일으킨다음 일부로 유신한테 만땅깨진다음
    간지나게 사망 한다는 같잖은 스토리가 나와도 시청률 올라갈 기세

    이건 뭐, 누구잘못인가.

  10. 2009.12.10 1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BlogIcon 초하(初夏) 2009.12.10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예 관련 글이 점차 더 전문화되고 있네요... ^&^
    이런 글을 어디서 다 찾아 쓰시는지... 대단하십니다!
    미실만한 연기 보기가 어려워 많이 아쉬운 시청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날씨는 꿀꿀하지만, 즐겁고 신나는 오후 보내시길 바랍니다~~ ^&^

  12. 묘운 2009.12.10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비담에게 맹약서를 요구한게 아니라 비담 자신이 스스로 써온것이구요.
    비담을 믿지 못해서 춘추에게 비담척살령을 내린것이 아니라 비담을 믿지못하고 둘의 결합에
    불안해하는 춘추를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후에 만약 비담의 세력이 커져 야망이 보인대도
    비담에 향한 연모때문에 강하게 나가지 못할까봐 지금 미리, 진도(?) 덜나갔을때 손쓴거죠.

  13. BlogIcon JiNi。 2009.12.16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오늘의 글도 예리하십니다.

  14. BlogIcon concessionaria kia 2012.09.10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문서에서 시간에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있지만 내가 그들의 마음 중심을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몇몇 유효 기간은하지만 더 이상 조사 때까지 기다 의견이 소요됩니다. 좋은 기사 감사하고 더 싶어요! 피드 버너뿐만 아니라에 추가

미실 척살령은 진흥왕이 사후에 미실이 진흥왕 자신처럼 불교에 귀의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를 한다면 척살하라고 설원에게 밀서형식의 척살령을 내린다.


비담의 척살령도 미실의 척살령과 같이 덕만과 결혼한 이후 덕만은 궁을 떠날 것을 생각하고, 만약, 비담이 정치에 관여를 한다면 비담을 척살하라고 춘추에게 밀서를 내린다.


어머니 미실의 척살령과 아들 비담의 척살령은 사후에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미실과 비담은 왕실에서 버린 받는 다는 설정이고, 이를 간파한 미실이 설원과 모의해서 진흥을 독살하려한다.


진흥은 왕위를 첫째인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진평)에게 물려주려 하는 것 처럼, 덕만도 비담과 국혼을 한 이후 왕위를 춘추에게 물려준다는 암시를 맹약서에 담아 두고 있다. 맹약서에 <이궁(離宮)>은 ‘궁을 떠난다’는 뜻이다. 왕이 궁을 떠난다는 뜻은 왕위를 선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위의 대상은 춘추가 될 것이다. 비담과 국혼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2009/12/09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덕만은 언제 처음 결혼했을까? - 비담과의 결혼은 사실일까?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 기사들은 글 말미에 관련기사 목록를 별도로 만들었으니 글을 다 읽고 추천 후 일독을 권함 )


진흥왕은 말년에 영흥사에 들어가 법의를 입고 생활하기도 했고, 진흥왕의 비인 사도비 또한, 진흥왕 사후에 영흥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화랑세기에는 미실과 설원과 세종도 영흥사에 들어가 말년을 보냈다고 하였다.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구니처럼 살던 미실과 세종과 설원을 역모에 연루시켜 버렸다. 한마디로 이순신이 일본군과 함께 선조를 내몰고 역모를 한다는 설정만큼 어처구니없다.

 

어쨌든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의 척살령과 비담의 척살령 닮은꼴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차이점은 없을까? 진흥왕은 미실에게 맹약서를 받지 않고 말로 때웠지만, 덕만은 비담을 믿지 못하고, 맹약서를 요구한다. 비담은 덕만의 요구에 순순히 맹약서를 작성하고 정치적 욕망이 아닌 사랑을 택한다. 하지만, 덕만은 비담을 믿지 못하고, 춘추에게 자신의 사후 비담이 정치에 관여를 한다면 죽여 버리라고 요구한다.

 

비담의 척살령과 미실의 척살령에는 공통점만이 있는 건 아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척살령을 보면, 극중에서 오류를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일단, 미실의 척살령에는 공식 문서의 형식을 띄고 있고, 비담의 척살령은 사문서 형식을 띄고 있다. 만약, 비담이 맹약를 어기고 덕만이 죽고, 정치일선에 복귀할 때, 춘추가 덕만의 척살령을 근거로 비담을 옥죄일 때, 비담은 척살령을 인정하지 않고, 춘추가 조작했다는 혐의를 씌우면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미실의 척살령은 간지로 무신년을 사용하고 있다. 무신년은 공교롭게도 588년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죽었는데, 죽은 후 진흥왕이 설원에게 척살밀명을 줄 수가 없다. 또한, 공문서의 형식을 취한 진흥왕의 미실 척살령은 기본적인 드라마 설정 오류를 범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미실은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였다. 그러니 아무리 진흥왕이 왕이라고 하더라도 미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척살령에 옥새를 찍을 수 없다. 한마디로 미실 척살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조문서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실은 위조문서를 비담에 넘겨주고, 자살을 해버린다. 비담은 어머니 미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위조 척살령을 덕만에 건네주지 않고, 마침내 자신이 미실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덕만이 비담을 배척하는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만큼 미실의 척살령은 비담이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원죄를 제공하는 것이다.  얼마나 미실의 자살이 어처구니 없는 설정인지 알고 싶다면 다음 기사들을 참조 하기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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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의 정상적인 미실 척살령이 되려면 옥새는 찍지 않고, 진흥왕의 수결이 되어야 하고, 진흥왕이 죽는 시점인 576년 병신년 간지를 써야한다고 기사를 전송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정상적인 것 같은 문서형식인 것 같은 간지도 맞고, 수결도 있는 비담 척살령을 춘추에 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드라마 작가나 제작진의 오류이다.


미실 척살령은 당연히 미실이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이니 옥새가 없고 <수결>만 있는 게  정상적이다. 하지만, 덕만은 왕으로 옥새를 관장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위조문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척살령에 <수결>과 <옥새>가 찍혀 있어야 한다.


또한, 비담의 척살령 칙서에는 <병오년>간지를 사용했다. 병오년은 646년이다. 그러니 극중 시제는 비담이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임명된 646년 11월이 지난 상태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극중 흐름이지만, <년>다음에 <월>이 나와야 하지만 <경신일>로 건너 뛰어 버린다.


요즘으로 치면 2009년 <모월> 12일에 만든 문서라는 뜻이다. 12일은 1년에 12번은 있다. 당연히 언제 만든 문서인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여전히 공문서가 지켜야할 기본적인 형식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담이 춘추가 내민 문서를 근거로 비담을 척살하려한다면 명분이 서지 않고 오히려 춘추가 역풍을 맞는다는 뜻이다. 또한, 간지와 함께 필히 사용해야 하는 게 연호이다. 미실의 척살령에는 <태창>을 써야 하고 비담 척살령은 선덕여왕 연호인 <인평>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미실의 척살령과 비담의 척살령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 보았다.


문제는 642년 8월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가 대패를 하고 비화군, 이서군, 압량주(경산)까지 밀리는 과정에서 646년 11월까지 시간이 활시위를 떠난 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갔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대야성을 빼앗기고 만 4년 3개월 동안 신라 내에서 4년을 싸웠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극중 어디에서도 4년 동안 싸웠다는 걸 알 수 는 없다. 단지 대야성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서군(청도)까지 빼앗겼다는 건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손이 오그라드는 전투신만 있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극중 리얼리티가 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는 뜻이다. 대야성에서 이서군까지 전투가 얼마나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다음 기사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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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7월 부터 646년까지는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신라가 쉽게 서쪽 40여개성을 빼앗긴 이유도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관계에 있어서 당항성을 친다는 전략에 말려들어 군대를 경기도 일원에 증파한 신라의 오판을 백제가 타고들어서 쟁취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당나라 사신이 와서 고구려 원정에 동원할 청병을 요구하는 것처럼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백제는 당에 전수물자인 금광개 갑옷을 공급하고 향도를 자청하는 척하지만. 실제는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당의 요구에 3만 대군으로 고구려 남쪽국경를 침략한다. 백제의 금광개 갑옷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2009/07/10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신라에서 백제 특산물 황칠을 찾는 수나라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신라가 남쪽변경을 치다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때 백제는 신라의 서쪽 7개성을 함락시켜 버린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일대 격전을 치를 때 후방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있었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당군을 무찌른 이유도 후방에서 백제가 신라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때 당나라 도와주려다 신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러니 당 사신이 함부로 신라를 얍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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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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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체리블로거 2009.12.10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웃긴건 원래 비담을 죽여야하는 건 진덕여왕의 몫인데 말이죠.
    가장 실망했던 점이 진덕여왕을 빼놓은 점입니다.
    저도 원래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고자 하는 사람인데요...
    존재 자체도 불투명한 미실은 집어놓고 정작 선덕여왕 바로 뒤인 진덕여왕을 빼놓고 춘추가 왕이
    될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하고 있는 선덕여왕이 참.....
    진덕여왕 출연시키지도 않고 계백을 출연시키고 다른 떡밥을 던질때부터 50회이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모든 역사서에서 인정하는 진덕여왕응을 빼놓고 허구적이라는 인물은 완전 미화시켜놓으니... 이거 원

  2. BlogIcon 라이너스™ 2009.12.10 0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비교해주셨네요^^
    잘보고갑니다. 좋은하루되세요~

  3. BlogIcon 좋은사람들 2009.12.10 0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십니다. 저 문서를 해독하시다니. ~ !!

  4. 임현철 2009.12.10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단하시네요.

  5. BlogIcon 초록누리 2009.12.10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한가지 의문은 덕만이 비담에게 맹약서를 요구했나요?
    저는 비담이 자발적으로 써왔다고 생각했거든요.;;
    글과 관련 없는 말이지만 왜 죽이라는 명을 밀서로 남기는지 진흥제나 덕만이나 이햐가 안간다는 것지지용^^*

  6. BlogIcon labyrint 2009.12.10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류가 많네요...
    음... 조금만 신경써도 저 정도는 아닐텐데요.
    트랙백 걸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7. BlogIcon 뽀글 2009.12.10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이야기는 조금어려워요..ㅠ

  8. BlogIcon 892 2009.12.10 1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어려서 그런거는 잘 모르겟는데 ... 한 두번해봣 나 ???
    또 하구 싶은데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가버렷네요 ㅠㅠ. 만.남 원합니다..
    haha10.com
    nunawa.com

  9. Maximin 2009.12.10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따위 막말 설정이라면 사실 승만이 덕만과 비담의 딸이라고 해도 납득될기세.
    그다음 비담은 딸과 덕만을 지키기 위해 일부로 반란을 일으킨다음 일부로 유신한테 만땅깨진다음
    간지나게 사망 한다는 같잖은 스토리가 나와도 시청률 올라갈 기세

    이건 뭐, 누구잘못인가.

  10. 2009.12.10 1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BlogIcon 초하(初夏) 2009.12.10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예 관련 글이 점차 더 전문화되고 있네요... ^&^
    이런 글을 어디서 다 찾아 쓰시는지... 대단하십니다!
    미실만한 연기 보기가 어려워 많이 아쉬운 시청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날씨는 꿀꿀하지만, 즐겁고 신나는 오후 보내시길 바랍니다~~ ^&^

  12. 묘운 2009.12.10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비담에게 맹약서를 요구한게 아니라 비담 자신이 스스로 써온것이구요.
    비담을 믿지 못해서 춘추에게 비담척살령을 내린것이 아니라 비담을 믿지못하고 둘의 결합에
    불안해하는 춘추를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후에 만약 비담의 세력이 커져 야망이 보인대도
    비담에 향한 연모때문에 강하게 나가지 못할까봐 지금 미리, 진도(?) 덜나갔을때 손쓴거죠.

  13. BlogIcon JiNi。 2009.12.16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오늘의 글도 예리하십니다.

  14. BlogIcon concessionaria kia 2012.09.10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문서에서 시간에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있지만 내가 그들의 마음 중심을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몇몇 유효 기간은하지만 더 이상 조사 때까지 기다 의견이 소요됩니다. 좋은 기사 감사하고 더 싶어요! 피드 버너뿐만 아니라에 추가

비담 박지빈

드라마 선덕여왕 33회는 15세 풍월주의 비재가 아닌
비담(김남길) 출생의 비밀과 비담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서 미실(고현정)을 만나는데 있다. 또한, 문노(정호빈)가 비담을 덕만(이요원)과 혼인 시켜 신라를 말아먹을 생각을 왜 포기했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하지만, 비담으로서는 자신의 어릴적 한때의 철없는 짓으로 인해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 비담은 끝없이 어릴적일로 인해서 2가지의 얼굴을 가지게 된것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멍청하고, 실없이 굴지만 마음속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들끓고 있다. 이를 자신의 외적으로 보여주는 실없음으로 커버를 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한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고독한 사람이다.

비담은 문노가 감춰둔 비기를 찾아 자신이 출신을 알아보고저 한다.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다. 

덕만을 찾아간 비담의 특유의 허허실실 전법으로 덕만에 꽃을 선물하고, 어릿광대짓을 하면서 자신이 얻고자하는 황실서고에 들어간다. 아마도 자신의 아내가 될지몰랐던 덕만을 상상하고, 꼭 덕만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비담은 비상한 감각을 지니고 건복1년의 7월 칠석 기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건복1년의 기록에서 비담 자신이 진지왕과 미실사이에 태어난 비운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또한, 설원랑(전노민)도 비담이 만진 책을 한눈에 파악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보종(백도빈)이 설원랑을 닮아서 첫번째 비재를 통과한 것인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칠부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거칠부는 579년전후에 죽었다. 죽은 자가 584년 건복1년 진평왕 6년에 나올수가 없다. 사실 606년에 죽은 문노가 612년 풍월주 비재에 나온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는 않는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찾은 기록이 진지왕편임을 정확히 인식하여야 한다. 진평왕의 기록은 당대에 만들어 둘 수 없으니 당연히 진지왕의 기록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건복 1년에 형종(비담)이 미실사이에 태어났다는 기록을 찾는다.


황실서고를 나오는 비담은 미실과 마주친다. 비담은 어머니인 미실을 끊임없이 자극을 한다. 자신을 알아달라는 표현이지 않을까?

그리고 미실은 자신과 닮은 비담을 보고서 상념에 잡힌다. 적대적이긴 하지만, 어머니에게 어릿광같은 투정을 부리듯하는 비담이 낯설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복 1년에 태어났다는 비담의 이야기는 어떨까? 건복 1년은 584년 진평왕 6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년(584) 봄 2월에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

진평왕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사도법주(진흥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인 만호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이와 중에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지왕(임호)의 비이며 용수. 용춘의 어머니인 지도태후였다. 지도태후는 사도와 만호와 미실의 사이를 오가면서 삶을 모색하게 된다.

584년 진평왕은 18세가 되어 직접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고, 만호 모후와 사도 할머니와 진지(금륜)전왕의 지도태후사이에서 서서히 자신의 주체적인 일을 하는 시점이 된다. 현존 화랑세기에 의하면 지도태후는 사도태후(진흥비)의 명에 의해서 조카인 진평을 모시기도 한다.

소화, 덕만, 비담, 문노

비담은 584년 이해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어린시절 2~3살 경에 갓태어난 핏덩이 덕만을 보게 된것이다. 그러니 덕만이 태어난 시점은 586~587년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통설에 의한 천명의 출생년에 근접하는 시기이다. 천명은 603년에 춘추를 낳았다. 그러니 15~16세에 용수를 통해서 춘추를 낳았다고 하는데 별탈이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는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은 참으로 역사의 기록에 충실한 사극이 된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진지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579년 7월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삼국유사는 이에 반해서 579년에 죽었지만, 귀신으로 화에서 비형의 어미와 사통을 한후 비형을 낳았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지는 579년에 죽지 않고, 유폐된 2년후 남도의 궁녀와 관계를 하여 비형을 낳았다. 하지만 유폐된 진지는 비형을 보지 못하고 죽은 듯 하다.

579년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 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으로 다시 신왕(진평왕)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인 비형랑(鼻荊郞)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러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596~603

여기서 드라마 선덕여왕은 화랑세기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을 믹스한다. 비담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다. 비형과 비슷하지 않는가? 어찌보면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담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고, 자라서 이름이 비형이고, 컸을 때 이름이 비담이라고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또한, 남도의 여인이 미실이라고 알려주는 듯 하다. 그렇다면 미실의 남편 세종은 진지왕이 폐위된 2년후인 581년에 죽은 것일까? 세종이 죽으면 미실도 죽고 설원랑도 죽는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들 3인은 같은 해에 미실이 먼저 죽고 따라 죽는다. 아무튼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담이 비형과 같이 신묘하고 기이한 귀신같이 뛰어난 사람으로 창조하고 싶은 것 같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마야는 천명이 죽을때 미실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게 하겠다고 저주를 하였다. 그러니 미실의 이름 대신에 남도의 궁녀로 미실을 대치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비담이 647년 1월 8일 덕만이 죽고 난후 반란을 일으킨후 구족이 멸하였지만, 비형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인물을 창조한 듯 하다.

용춘(도이성)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이 모본으로 삼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비형은 동부이모의 형인 용춘을 풍월주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비형이 15세부터 진평왕에 의해서 길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비형과 비담과 형종을 엮어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데 문제점을 들어낸것이다.


사실 삼국유사의 비형랑의 기록이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용춘의 일로 변형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비형을 단순히 서제 비형으로만 기록하고 용춘이 어릴때 부터 진평으로 부터 길러졌다고 대치한 느낌을 받는다.

어찌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비담의 캐릭터 창조의 불행한 사태는 비담(형종)이 건복1년에 태어났다고 한 기록이다. 이때 드라마 상에는 진지는 왕위에 있었다. 그리고 미실의 계략으로 시아버지인 이사부와 문노의 장인인 대신 거칠부, 외삼촌인 노리부, 남편 세종과 문노의 협력으로 진지를 폐위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가 드라마 상으로 579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담은 자신의 어미인 미실로 부터 버려지게 그려졌다.

그런데 이제와서 비담이 584년생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의 기록을 비교검토해도 건복1년은 584년 진평왕 6년에 해당하고, 진평왕이 왕으로써 성년인 18세가 되는 때이다.

선덕여왕내에서도 비담의 출생이 왔다리 갔다리 한다. 579년 7월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태어난 비담이 어느 순간에 비형량 처럼 진지가 폐위되고, 2년후 사량부의 너무나 어여뼈서 도화녀로 불리던 여인과 관계하여 비담을 낳았다. 그후 진평왕 6년 584년에 다시 진지가 복위를 하여 비담을 낳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진지는 579년에 폐위되지 않고, 584년에 폐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진평왕이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를 오른 것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봐서 원작자가 단순히, 기록을 살피지 않고, 기억만으로 타자를 치면서 소설을 썼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끊임없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천명과 덕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출쌍생>,<성골남진>이다. 그리고 덕만과 천명은 <임술년>에 태어난다. 33회에서도 비담은 문노가 덕일사에 보관하고 있던, 삼한지지와 여러 자료들과 함께, 덕만의 출생일과 비담의 출생일을 신주단지를 보관하듯이 고히 감추고 있다.

또한, 덕만의 아명이 <인명>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 덕만은 소화가 지어준 이름이고, 실제 진평이 지은이름은 <인명>이란 뜻이다. 그런데 좀 웃기지 않는가? 진평도 마야도 소화도 쌍둥이 인줄 모른 상태에서 천명과 덕만이 아닌 <인명>이라고 이름이 부여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진평이 소화가 이름은 어떻게 부를까요?라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진평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소화가 알아서 부르라고 한것 같다. 어찌되었던 덕만의 초명이 <인명>이라는 것이다. 돌림자 천명과 인명에서 <명>자 돌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종은 누가 지어준 이름일까? <형종>이 진지와 미실사이에 태어났으니 진지가 만들어준 이름이다. 왜 하필이면 <형종>일까? 당연히 비<형>랑을 엄두해둔 이름이다. 작가는 비형랑이 형종이고 비담이라고 이야기를 한것이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비형랑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마야의 저주로 미실의 기록이 망실되어 도화녀로 된것이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이야기를 한것이다.

더 잼있는 이야기는 비담보다 나이가 2세살 어린 덕만이 임술년생이라는 사실이다.

비담 건복1년생, 덕만 임술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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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드라마상 건복 1년생인 비담과  임술년생 덕만를 비교해보자. 일단 <임술년>은 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이전에 송고한
2009/07/21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임술년생 덕만과 천명의 나이는 몇살?을 참조하기 바란다.

요약하자면, 임술년은 542년과 602년이다. 542년은 진흥왕2년으로 9살이 되는 해이니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도 태어나기 전이고, 진평왕도 태어나기 전이다. 그러니 당연히 602년에 되어야 한다. 또한, 천명은 태어나자 마자 임신을 하고, 603년에 춘추가 태어난 것이다. 또한, 1살때 덕만은 아막성 전투에 참여를 하고, 유신은 8살에 아막성 전투에 참여를 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덕만과 천명이 유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것으로 나온다. 말은 덕만.천명이 유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는데 다른쪽에서는 덕만이 유신보다 7살이 적다고 강조를 한다.

이렇게 되면 또다시 드라마상 기년이 흔들려 버린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꾸준히 추리를 하면서 성장하는 <성장드라마>다. 이는 원작자들인 <대장금>, <서동요>의 김영현과 <jsa>의 박상현이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즐겨쓰던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핵심은 추리과정이 디테일하고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선시 하는게 <알리바이>다. 하지만, 소설 <선덕여왕>자체가 전혀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고, 부실하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움이 되었다면 추천을 하시고, 비담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기사들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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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임현철 2009.09.15 0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배우고 가는군요.

  3. BlogIcon 핑구야 날자 2009.09.15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ㄷ조금 길지만 리뷰 잘 일고 갑니다.

  4. 2009.09.15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BlogIcon 영웅전쟁 2009.09.15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좀 길군요...
    뭐 문맥상 자를 부분이 없기는 하군요.
    여튼 시험 칠 준비가 끝나 있습니다.
    오늘도 요약 정리 잘해
    멋지게 공부했습니다. ㅎㅎㅎ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좀 길긴 하네요.. 짧게 쓰는 노력을 해야 겠습니당.. 그리고 몇개로 나눠서 포스팅을 할까 합니당. .ㅋㅋ

  6. 2009.09.15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것 같지는 않는데요.. 저도 님이 지적한 글에 추천한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ㅋㅋ

      물론, 님의 글에도 추천을 했지만.. 각자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면 추천합니당.. ㅋㅋ


      어찌되었던 다음 운영자가 미운털이 박힌것 같아요.. 공평성때문인지.. 대응이 미숙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저의 글이 뒤늦게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셈..

      사실 이글은 다음의 문화/연예 카테고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속적으로 베스트에 올려주고 있는 것을 보면, 다음 관리자도 대단합니당..

  7. 21야영장 2009.09.15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대해서 함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고
    기다려짐니다...근데 어제 드라마 시청하는데
    재미가 반감된다는....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지만...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가요? 재미가 반감이 된다.. 그럴수 있겠네요..저는 드라마를 보는데 도움이 되라고 한건뎅.. ㅋㅋ

      그래서 글을 봐도 추천이 없군요.. ㅠ.ㅠ. 환상을 깨버리니.. ㅋㅋ

  8. 지나가던역술인 2009.09.15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붙여, 임술년에는 신묘월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천명의 출생일을 임술년 신묘월 정축일이라고 합니다.

    임o년이나 정o년 의 묘월은 계묘월인데 말이죠.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너무 쉽게 소설을 쓰는것같다는 생각입니다. 고민도 없고, 생각나는데로 글을 쓴 흔적이 너무 많이 보임..

      인물관계도 정도는 만들어 놓고 글을 써야 하는데..

      설계도 없는 건축물을 보는 것 같아요.. 소설 선덕여왕

  9. 아이레스 2009.09.16 0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쏙쏙 들어오네요~ 쉽게 풀어주셔서~
    선덕여왕은 그냥..소설같아요;;; 비담과 비형을 어떻게 동일인물로 엮을수 있는건지..
    도화녀가 어떻게 미실이 될수 있는거죠??
    미실은 화랑세기 전반에 걸쳐 나오는 인물인데..그걸 굳이 도화녀로 표현할 이유도 없고..
    게다가 미실쪽세력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이 폐위후에 미실한테 반하고 할리가....
    없잖아요........;;

    • BlogIcon 갓쉰동 2009.09.16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작자는 그렇게 해서 비담과 비형과 형종을 연결하려는 거지요.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마야가 저주한 대로 미실은 기록에서 망실되었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역사서로 인용하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미실의 존재가 너무나 크게 나온다눈..
      원작자가 전혀 나오지 말아야 할 덕만의 시대에 미실과 대치하는 덕만으로 내세울만큼말이지요..

      한마디로 개념을 물말아 먹었다고 할수 밖에요.. 아마도 역대 사극중 최악의 사극 1위일것 같아요.. 재미는 별도로 하고..

  10. 골든레몬 2009.09.16 0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원랑이 비담이 봤던 책을 한눈에 파악한 것은 놓여져 있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책 옆부분 글자가 다른 책들과 다르게 거꾸로 올려져 있었거든요.

    • BlogIcon 갓쉰동 2009.09.16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설원랑이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원작자을 비판하는 거지만요.. 개연성이 없잖아요.. 먼가 달라졌는지 살피는 흉내라도 내야지 않겠어요? 또한, 비담 처럼 치밀한 성격인 사람은 자신이 만진 책을 쉽게 놓지 않겠지요.. 갑짜기 헐렁이 비담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외유내강형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한 비담인데요..

  11. BlogIcon koon 2009.09.24 0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유익했어여알아보고싶었는더ㅔ....

  12. 잘읽고 2009.11.10 0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가요 ^^

  13.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4. BlogIcon Granny Pussy 2012.07.21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

  15. BlogIcon Granny Pussy 2012.07.21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

  16. BlogIcon Trisha 2012.08.06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 김수현 작가는 양병태의 입을 빌려서 “김연아는

  17. BlogIcon go bet 1x2 2012.09.03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18. BlogIcon water preserver concentrate review 2012.11.01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진짜로 무언가일 이 화제를 나가 나를 생각하는 결코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당신 발표

  19. BlogIcon portable dog fences yard 2012.11.08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탕 많이 먹은거 아빠한테 걸릴까봐 언능 숨기는 모습도

  20. BlogIcon container storage yards 2012.12.10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 반박할려면 위처럼 일본의 수입조건과 한국의 수입조건이 다르다는 가장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또한, 확율론적으로도 반론을 제기한것도 극히 위함한 발상이고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다.

  21. BlogIcon wireless fence for dogs 2012.12.25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다.

비담 박지빈

드라마 선덕여왕 33회는 15세 풍월주의 비재가 아닌
비담(김남길) 출생의 비밀과 비담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서 미실(고현정)을 만나는데 있다. 또한, 문노(정호빈)가 비담을 덕만(이요원)과 혼인 시켜 신라를 말아먹을 생각을 왜 포기했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하지만, 비담으로서는 자신의 어릴적 한때의 철없는 짓으로 인해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 비담은 끝없이 어릴적일로 인해서 2가지의 얼굴을 가지게 된것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멍청하고, 실없이 굴지만 마음속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들끓고 있다. 이를 자신의 외적으로 보여주는 실없음으로 커버를 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한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고독한 사람이다.

비담은 문노가 감춰둔 비기를 찾아 자신이 출신을 알아보고저 한다.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다. 

덕만을 찾아간 비담의 특유의 허허실실 전법으로 덕만에 꽃을 선물하고, 어릿광대짓을 하면서 자신이 얻고자하는 황실서고에 들어간다. 아마도 자신의 아내가 될지몰랐던 덕만을 상상하고, 꼭 덕만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비담은 비상한 감각을 지니고 건복1년의 7월 칠석 기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건복1년의 기록에서 비담 자신이 진지왕과 미실사이에 태어난 비운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또한, 설원랑(전노민)도 비담이 만진 책을 한눈에 파악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보종(백도빈)이 설원랑을 닮아서 첫번째 비재를 통과한 것인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칠부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거칠부는 579년전후에 죽었다. 죽은 자가 584년 건복1년 진평왕 6년에 나올수가 없다. 사실 606년에 죽은 문노가 612년 풍월주 비재에 나온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는 않는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찾은 기록이 진지왕편임을 정확히 인식하여야 한다. 진평왕의 기록은 당대에 만들어 둘 수 없으니 당연히 진지왕의 기록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건복 1년에 형종(비담)이 미실사이에 태어났다는 기록을 찾는다.


황실서고를 나오는 비담은 미실과 마주친다. 비담은 어머니인 미실을 끊임없이 자극을 한다. 자신을 알아달라는 표현이지 않을까?

그리고 미실은 자신과 닮은 비담을 보고서 상념에 잡힌다. 적대적이긴 하지만, 어머니에게 어릿광같은 투정을 부리듯하는 비담이 낯설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복 1년에 태어났다는 비담의 이야기는 어떨까? 건복 1년은 584년 진평왕 6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년(584) 봄 2월에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

진평왕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사도법주(진흥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인 만호태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이와 중에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지왕(임호)의 비이며 용수. 용춘의 어머니인 지도태후였다. 지도태후는 사도와 만호와 미실의 사이를 오가면서 삶을 모색하게 된다.

584년 진평왕은 18세가 되어 직접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고, 만호 모후와 사도 할머니와 진지(금륜)전왕의 지도태후사이에서 서서히 자신의 주체적인 일을 하는 시점이 된다. 현존 화랑세기에 의하면 지도태후는 사도태후(진흥비)의 명에 의해서 조카인 진평을 모시기도 한다.

소화, 덕만, 비담, 문노

비담은 584년 이해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어린시절 2~3살 경에 갓태어난 핏덩이 덕만을 보게 된것이다. 그러니 덕만이 태어난 시점은 586~587년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통설에 의한 천명의 출생년에 근접하는 시기이다. 천명은 603년에 춘추를 낳았다. 그러니 15~16세에 용수를 통해서 춘추를 낳았다고 하는데 별탈이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는다면 드라마 선덕여왕은 참으로 역사의 기록에 충실한 사극이 된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진지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579년 7월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삼국유사는 이에 반해서 579년에 죽었지만, 귀신으로 화에서 비형의 어미와 사통을 한후 비형을 낳았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진지는 579년에 죽지 않고, 유폐된 2년후 남도의 궁녀와 관계를 하여 비형을 낳았다. 하지만 유폐된 진지는 비형을 보지 못하고 죽은 듯 하다.

579년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 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으로 다시 신왕(진평왕)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인 비형랑(鼻荊郞)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러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 596~603

여기서 드라마 선덕여왕은 화랑세기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을 믹스한다. 비담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다. 비형과 비슷하지 않는가? 어찌보면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담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고, 자라서 이름이 비형이고, 컸을 때 이름이 비담이라고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또한, 남도의 여인이 미실이라고 알려주는 듯 하다. 그렇다면 미실의 남편 세종은 진지왕이 폐위된 2년후인 581년에 죽은 것일까? 세종이 죽으면 미실도 죽고 설원랑도 죽는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이들 3인은 같은 해에 미실이 먼저 죽고 따라 죽는다. 아무튼 드라마 선덕여왕은 비담이 비형과 같이 신묘하고 기이한 귀신같이 뛰어난 사람으로 창조하고 싶은 것 같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마야는 천명이 죽을때 미실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게 하겠다고 저주를 하였다. 그러니 미실의 이름 대신에 남도의 궁녀로 미실을 대치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비담이 647년 1월 8일 덕만이 죽고 난후 반란을 일으킨후 구족이 멸하였지만, 비형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인물을 창조한 듯 하다.

용춘(도이성)

하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이 모본으로 삼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비형은 동부이모의 형인 용춘을 풍월주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비형이 15세부터 진평왕에 의해서 길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비형과 비담과 형종을 엮어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데 문제점을 들어낸것이다.


사실 삼국유사의 비형랑의 기록이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용춘의 일로 변형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비형을 단순히 서제 비형으로만 기록하고 용춘이 어릴때 부터 진평으로 부터 길러졌다고 대치한 느낌을 받는다.

어찌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비담의 캐릭터 창조의 불행한 사태는 비담(형종)이 건복1년에 태어났다고 한 기록이다. 이때 드라마 상에는 진지는 왕위에 있었다. 그리고 미실의 계략으로 시아버지인 이사부와 문노의 장인인 대신 거칠부, 외삼촌인 노리부, 남편 세종과 문노의 협력으로 진지를 폐위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가 드라마 상으로 579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담은 자신의 어미인 미실로 부터 버려지게 그려졌다.

그런데 이제와서 비담이 584년생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의 기록을 비교검토해도 건복1년은 584년 진평왕 6년에 해당하고, 진평왕이 왕으로써 성년인 18세가 되는 때이다.

선덕여왕내에서도 비담의 출생이 왔다리 갔다리 한다. 579년 7월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에 태어난 비담이 어느 순간에 비형량 처럼 진지가 폐위되고, 2년후 사량부의 너무나 어여뼈서 도화녀로 불리던 여인과 관계하여 비담을 낳았다. 그후 진평왕 6년 584년에 다시 진지가 복위를 하여 비담을 낳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진지는 579년에 폐위되지 않고, 584년에 폐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진평왕이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를 오른 것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봐서 원작자가 단순히, 기록을 살피지 않고, 기억만으로 타자를 치면서 소설을 썼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끊임없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나오는 천명과 덕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출쌍생>,<성골남진>이다. 그리고 덕만과 천명은 <임술년>에 태어난다. 33회에서도 비담은 문노가 덕일사에 보관하고 있던, 삼한지지와 여러 자료들과 함께, 덕만의 출생일과 비담의 출생일을 신주단지를 보관하듯이 고히 감추고 있다.

또한, 덕만의 아명이 <인명>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 덕만은 소화가 지어준 이름이고, 실제 진평이 지은이름은 <인명>이란 뜻이다. 그런데 좀 웃기지 않는가? 진평도 마야도 소화도 쌍둥이 인줄 모른 상태에서 천명과 덕만이 아닌 <인명>이라고 이름이 부여되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진평이 소화가 이름은 어떻게 부를까요?라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진평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소화가 알아서 부르라고 한것 같다. 어찌되었던 덕만의 초명이 <인명>이라는 것이다. 돌림자 천명과 인명에서 <명>자 돌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종은 누가 지어준 이름일까? <형종>이 진지와 미실사이에 태어났으니 진지가 만들어준 이름이다. 왜 하필이면 <형종>일까? 당연히 비<형>랑을 엄두해둔 이름이다. 작가는 비형랑이 형종이고 비담이라고 이야기를 한것이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비형랑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마야의 저주로 미실의 기록이 망실되어 도화녀로 된것이니 알아서 생각하라고 이야기를 한것이다.

더 잼있는 이야기는 비담보다 나이가 2세살 어린 덕만이 임술년생이라는 사실이다.

비담 건복1년생, 덕만 임술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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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드라마상 건복 1년생인 비담과  임술년생 덕만를 비교해보자. 일단 <임술년>은 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이전에 송고한
2009/07/21 -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임술년생 덕만과 천명의 나이는 몇살?을 참조하기 바란다.

요약하자면, 임술년은 542년과 602년이다. 542년은 진흥왕2년으로 9살이 되는 해이니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도 태어나기 전이고, 진평왕도 태어나기 전이다. 그러니 당연히 602년에 되어야 한다. 또한, 천명은 태어나자 마자 임신을 하고, 603년에 춘추가 태어난 것이다. 또한, 1살때 덕만은 아막성 전투에 참여를 하고, 유신은 8살에 아막성 전투에 참여를 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덕만과 천명이 유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것으로 나온다. 말은 덕만.천명이 유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는데 다른쪽에서는 덕만이 유신보다 7살이 적다고 강조를 한다.

이렇게 되면 또다시 드라마상 기년이 흔들려 버린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꾸준히 추리를 하면서 성장하는 <성장드라마>다. 이는 원작자들인 <대장금>, <서동요>의 김영현과 <jsa>의 박상현이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즐겨쓰던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핵심은 추리과정이 디테일하고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선시 하는게 <알리바이>다. 하지만, 소설 <선덕여왕>자체가 전혀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고, 부실하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움이 되었다면 추천을 하시고, 비담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기사들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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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임현철 2009.09.15 0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배우고 가는군요.

  3. BlogIcon 핑구야 날자 2009.09.15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ㄷ조금 길지만 리뷰 잘 일고 갑니다.

  4. 2009.09.15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BlogIcon 영웅전쟁 2009.09.15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좀 길군요...
    뭐 문맥상 자를 부분이 없기는 하군요.
    여튼 시험 칠 준비가 끝나 있습니다.
    오늘도 요약 정리 잘해
    멋지게 공부했습니다. ㅎㅎㅎ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좀 길긴 하네요.. 짧게 쓰는 노력을 해야 겠습니당.. 그리고 몇개로 나눠서 포스팅을 할까 합니당. .ㅋㅋ

  6. 2009.09.15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것 같지는 않는데요.. 저도 님이 지적한 글에 추천한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ㅋㅋ

      물론, 님의 글에도 추천을 했지만.. 각자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면 추천합니당.. ㅋㅋ


      어찌되었던 다음 운영자가 미운털이 박힌것 같아요.. 공평성때문인지.. 대응이 미숙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저의 글이 뒤늦게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셈..

      사실 이글은 다음의 문화/연예 카테고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속적으로 베스트에 올려주고 있는 것을 보면, 다음 관리자도 대단합니당..

  7. 21야영장 2009.09.15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대해서 함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고
    기다려짐니다...근데 어제 드라마 시청하는데
    재미가 반감된다는....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지만...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가요? 재미가 반감이 된다.. 그럴수 있겠네요..저는 드라마를 보는데 도움이 되라고 한건뎅.. ㅋㅋ

      그래서 글을 봐도 추천이 없군요.. ㅠ.ㅠ. 환상을 깨버리니.. ㅋㅋ

  8. 지나가던역술인 2009.09.15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붙여, 임술년에는 신묘월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천명의 출생일을 임술년 신묘월 정축일이라고 합니다.

    임o년이나 정o년 의 묘월은 계묘월인데 말이죠.

    • BlogIcon 갓쉰동 2009.09.15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너무 쉽게 소설을 쓰는것같다는 생각입니다. 고민도 없고, 생각나는데로 글을 쓴 흔적이 너무 많이 보임..

      인물관계도 정도는 만들어 놓고 글을 써야 하는데..

      설계도 없는 건축물을 보는 것 같아요.. 소설 선덕여왕

  9. 아이레스 2009.09.16 0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이 쏙쏙 들어오네요~ 쉽게 풀어주셔서~
    선덕여왕은 그냥..소설같아요;;; 비담과 비형을 어떻게 동일인물로 엮을수 있는건지..
    도화녀가 어떻게 미실이 될수 있는거죠??
    미실은 화랑세기 전반에 걸쳐 나오는 인물인데..그걸 굳이 도화녀로 표현할 이유도 없고..
    게다가 미실쪽세력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이 폐위후에 미실한테 반하고 할리가....
    없잖아요........;;

    • BlogIcon 갓쉰동 2009.09.16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작자는 그렇게 해서 비담과 비형과 형종을 연결하려는 거지요.

      글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마야가 저주한 대로 미실은 기록에서 망실되었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역사서로 인용하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미실의 존재가 너무나 크게 나온다눈..
      원작자가 전혀 나오지 말아야 할 덕만의 시대에 미실과 대치하는 덕만으로 내세울만큼말이지요..

      한마디로 개념을 물말아 먹었다고 할수 밖에요.. 아마도 역대 사극중 최악의 사극 1위일것 같아요.. 재미는 별도로 하고..

  10. 골든레몬 2009.09.16 0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원랑이 비담이 봤던 책을 한눈에 파악한 것은 놓여져 있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책 옆부분 글자가 다른 책들과 다르게 거꾸로 올려져 있었거든요.

    • BlogIcon 갓쉰동 2009.09.16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설원랑이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원작자을 비판하는 거지만요.. 개연성이 없잖아요.. 먼가 달라졌는지 살피는 흉내라도 내야지 않겠어요? 또한, 비담 처럼 치밀한 성격인 사람은 자신이 만진 책을 쉽게 놓지 않겠지요.. 갑짜기 헐렁이 비담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외유내강형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한 비담인데요..

  11. BlogIcon koon 2009.09.24 0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넘유익했어여알아보고싶었는더ㅔ....

  12. 잘읽고 2009.11.10 0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가요 ^^

  13.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4. BlogIcon Granny Pussy 2012.07.21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

  15. BlogIcon Granny Pussy 2012.07.21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

  16. BlogIcon Trisha 2012.08.06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 김수현 작가는 양병태의 입을 빌려서 “김연아는

  17. BlogIcon go bet 1x2 2012.09.03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18. BlogIcon water preserver concentrate review 2012.11.01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진짜로 무언가일 이 화제를 나가 나를 생각하는 결코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당신 발표

  19. BlogIcon portable dog fences yard 2012.11.08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탕 많이 먹은거 아빠한테 걸릴까봐 언능 숨기는 모습도

  20. BlogIcon container storage yards 2012.12.10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 반박할려면 위처럼 일본의 수입조건과 한국의 수입조건이 다르다는 가장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또한, 확율론적으로도 반론을 제기한것도 극히 위함한 발상이고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다.

  21. BlogIcon wireless fence for dogs 2012.12.25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의 출생을 비밀을 추적하던 비담은 자신의 어릴적 이름이 형종이란 사실과 인명(덕만)과 결혼하게 될 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거나 이설이 있음을 곧잘 지적하던 일연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는데 이의제기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의 무서움은 기존 사서의 빈틈을 칼처럼 파고 들고 있다. 그동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에 관한 기록에서도 화랑세기의 위력은 발휘된다.

그런데 뜸금없이 화랑세기는 무슨 소리, 덕만은 진평왕의 딸인것은 분명하고, 마야부인의 딸인것은 맞지만, 천명이 맏이고, 덕만은 천명의 동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이 천명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는 무엇을 근거로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언젠가는 화랑세기를 심층 분석할 때가 올것이다.


사실 덕만의 기록을 심층분석하고 있는 이유도 현존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 뛰어들려는 의도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그동안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지만, 천명은 마야의 소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나아가 덕만이 기존에 알고 있던 늙었을때 왕위에 오르지 않고, 극히 젊은 나이때 즉위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또하나, 덕만과 천명이 다른 출자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이전글에서 흘렸다.

덕만이 가지고 있는 남성스런 이름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신라 당시에도 여성은 여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덕만의 어미인, 마야, 진평의 어미인 만호(이것도 약간의 중성을 넘어 남성성이 보이긴한다.) 지소, 지조, 선혜왕후, 보희,문희 등 그 나름대로 여성성이 보이지만, 뜸금없이 덕만이라니, 덕만이 가지고, 있는 뜻은 결코 나쁜 뜻은 아니다. 덕을 널리 퍼트리고 길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글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덕만의 이름이 가지는 남성성

덕만이 천명의 나이어린 이복동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여자 아이의 이름에 남자의 이름을 붙혀 다음 출생자가 남자이길 소망하는 이름을 짓기고 한다. 또한, 여자이름 중에 끝순이, '말희', '끝네', '말자'라는 이름은 대부분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말자는 뜻도 있지만, 여자 아이는 그만 낳자란 뜻을 포함하고, 삼신할미에게 다음은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름에서도 덕만은 위로 많은 언니들을 두었음직하지 않는가? 덕이 있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태어나자 마자, 왕실에 아들들로 번창할 덕을 빌었음 직한 이름이니 말이다.

 
만약, 덕만이 천명보다 언니라면 진평왕의 첫번째 공주의 이름을 '덕만'이란 남성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여쁜 공주의 이름에 덕만이라니, 다음에 왕자를 생산을 염원하기 위해서 '덕만'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만만의 콩떡이 된다. 진평은 왕이다. 언제든지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진평왕 초년에 덕만의 이름을 지었다면 진평왕의 머리가 좀 이상스러운 것이다.

 
덕만의 이름은 진평왕과 왕실의 절실한 적통을 이을 왕자를 바라는 이름이다. 또한, 마야도 제일 왕후는 아닌 것이다.  

덕만과 천명이 이복자매라는 또 다른 증거 (세종과 그의 형 경녕군)

또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조선시대 세종에 관한 기록이다. 세종을 우리는 이방원의 3번째 아들로 알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하게된 배경도 너무나 잘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과연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일까? 아니라고 한다면 총맞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방원)의 3번째 아들이 아니다.


일단, 세종(이도)을 태종(이방원)의 3째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즉위 초년 세종이 세계를 기록한 내용을 살펴 보자.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 조선왕조 실록 세종


이기록만 있다면, 세종은 태종의 3째 아들 같지 않는가? 그리고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 전주이씨 대동종보 경녕군

드라마 대왕세종을 본 사람은 이방원의 또다른 아들 경녕군이란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종의 아들이고, 후비 효빈 김씨 소생이다. 그런데 경녕군은 1397년생 세종(이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경녕군은 세종보다 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머니는 효빈김씨로 세종과는 다른 후비 효빈 김씨라는 사실 뿐이다. 경녕군과 충녕군은 서로 출신성분 자체가 다르다.


그럼, 태종의 셋째아들은 누구일까? 세종일까? 아니면 경녕군일까? 경녕군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답은 둘째로 알고 있는 효령대군이다. 드라마 세종대왕에서는 경녕군을 효령대군보다 아우(?)로 했었던것 같다. 기억에 의존하는 관계로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상식으로는 경녕군이였다.

사실 경녕군은 태종(이방원)의 첫째인 양녕대군(1394년) 다음 1395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1396년 태어난 효령대군 보다도 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3번째 아들 세종(이도:충녕대군)은 잘못된 것일까?  답은 아니다,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이 맞다. 이유는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3번째라는 것이고, 적통을 이을 3번째 왕자가 세종(충녕군:이도)이란 뜻이 된다. 왕의 계승서열 3순위인 3번째 왕자라는 것이다. 사사로이는 경녕군이 충녕군(세종)의 형이 되지만, 왕통서열은 존재조차 미미한 후비의 소생이 된다. 물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후비가 되거나 폐출되어 폐서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왕가의 일은 적자/서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양반, 서얼을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서얼은 처주지도 않았다. 특별히 기록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또한, 정비의 소생이냐 후비의 소생이냐의 차이에 따라 신분은 하늘과 땅이 되는 것이다. 같은 왕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연구할때 적자, 서자, 적통를 구별할 줄 모르면 삼천포로 빠진다.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왕위를 잇는데 신라가 조선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이 있었지 않겠는가? 진골도 아니고, 성골임금인데 말이다. 사실 글쓴이는 성골.진골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살피고 살펴봐도 성골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왕족, 귀족의 구분만 읽었다. 

그럼 다시 신라의 선덕왕(덕만)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 삼국사기 신라 춘추왕 원년

이제 요즘과는 다른 적자/서자, 양반/서얼 등 왕가의 룰이나 양반가의 룰에 따라, 읽어보자.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딴지맨인 일연이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 기사에 딴지를 걸지 않는 이유는 일연도 마야부인의 맏딸로 덕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딴지맨 일연이 삼국사기에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의 늙으막에 얻은 승만왕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승만왕후에 아들이 없어 왕통을 이을수 없었기 때문에 덕만이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연은 삼국사기에는 없는 덕만이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짐작하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덕만의 결혼기사이다.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왕이 왕위에 있을때 결혼하고 있다니, 덕만이 왕위에 오를때 어렸다는 결정타가 아닌가? 물론, 남자왕처럼 비를 많이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구를 누구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첫결혼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한다.

현존하는 <화랑세기>를 의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제 예고한 대로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을때 덕만에 대한 평가를 보도록 하자.

위의 문장은 선덕(덕만)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하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뒤의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내용을 수식하기 위한 내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덕만과 관련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

성품이 너그럽고,어질다
  영묘사 화재사건을 일으킨 <지귀설화>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김유신의 춘추/문희불쇼>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총명하다.
<모란꽃,모란씨서되>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민첩하다

200
631년에 진평왕 말년 <칠숙의 난>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아직도 <성조황고>를 들어서 덕만은 나이가 많았을 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분이나 "그건 니생각이고"라고 하는 분들은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황고>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거를 제시했다. 귀찬으신 분을 위해서 요약하자면,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황제)의 성숙한 여식이란 뜻이다.

너무 어릴때 628년이전 문희와 김춘추를 얶어준 사건이 628년이라면 너무 덕만이 이른시기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르고, 632년 결혼하고, 연호를 바꾸는  것을 근거로 635년 18~20세 전후라면 <모란꽃>, <김유신불쇼> 사건들은 덕만으로서 너무 어릴때 사건이 아닌가 의심할 수 도 있다. 

632년 16세에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627년은 11살때 일이고, 628년이면 12살때 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좀 어려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모란꽃 사건은 늙은 왕이 아주 어린 공주에나 물어 봄직한 말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엔 깜짝 놀랄 추리 능력을 보인 덕만을 보고, 진평과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용봉의 자질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기록이  "
총명하다"는 기록으로 남았다면 어떨가? 또한, 12살이전에 있었던 김유신의 불쇼에서 살려준 문희와 그의 복중 아들 법민은 어떨까? 어리지만 너그러워움의 상징이 아닌가?  지귀심화에서 신분도 미천한 지귀를 위해서 행한 행동들은 "너그러움" 자체이다. 또한, 지귀심화로 소실된 영묘사와 잦은 화재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할때 처리하는데 부적같은 주문을 만들어 백성들을 안정화 시키는 것으로 너그러움과 총명함과 민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민첩하다" 라는 말은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때, 단순한 미사어구가 아닌 , 덕만은 <성조황고>이니 정통성에 하자도 없을 뿐만 아니고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PS. 사실 세종대왕의 기사는 천명과 덕만은 같은 어미의 자식이다.라고 주장하는 혹시 모를 딴지가 들어올 반박문을 위해서 남겨두었습니다만, 이제 노출합니다. 이외에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출자를 비교해 본다면, 왜 적통 적자/서자에 연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실 암투의 시작과 끝은 적자들간에도 있었지만, 서자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정비와 후비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후비가 정비가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생들인 왕자나 공주들은 인생의 역전 대박 로또가 되니 말입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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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enesmee 2009.07.30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로워 눈을 떼지 못하고 끝까지 읽고 갑니다 ^.^ 역사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저 겉핥기일뿐이라
    항상 부끄러운데..참 부럽습니다! 저도 다시 공부해보고 싶은 맘이 새록새록 드네요...자주 들리게 될 것
    같습니다. ^ ^

  3. 오호.. 2009.07.30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보고갑니다. 이복형제라.....

  4. 헤윰 2009.07.30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5. 재밌네욤 2009.07.31 0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보았네요~~ 그런데 저도 앞에 계신 '성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조선시대의 적장자 제도를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두 사회 모두 철저한 신분사회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골품제와 적장제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등장한 적장자의 개념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님께서 마지막 부분에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쓰신 부분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런지...

    각기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물론 그 만큼 강력한 신분 사회였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으셨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이러한 유교적인 관례가 뿌리 내린 것은 조선 성종 이후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된 때 부터 입니다..

    단적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의 후궁 중에 시집갔다 온 과부도 있었답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죠..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답니다. 하지만 중기이후에 대전체제가 완성되면서 부터 아들

    을 중심으로 족보가 쓰여지고 있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서는 비슷하고, 신라가 더 강경했지요..

      이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중기 이후다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남.여, 적서 차별 등 중기 조선 중기이후에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초기 기록을 내 놓은것 아닌가요? 그것도 살펴 보시길..

      왜 하필 조선의 초기기록을 들어서 조선과 신라를 비교했겠는지요..

      이글로 답변이 충분히 되었기를..
      님들은 저의 주장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보론 성격입니다.. 반론이 아니공..

  6. 흐음... 2009.07.31 0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이 되겠습니다만.....그냥 왠지 썩 잘 읽혀지는 글은 아니라서....뭔가 말이 맞지 않네요. 제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ㅡㅡ>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의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들(혹은 소생)이 될 순 없다. 물론, 그의 의붓 큰어미 이기는 하다." 라고 쓰셔야 말이 될듯 하네요.

    또 "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일연은 선덕 또한" 다음에 왜 진평왕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쓰신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_-;

  7. 딩가딩가딩 2009.07.31 0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

  8. BlogIcon Blah 2009.07.31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 기억이지만 그전 국사선생님 중 한 분이 조선에 유교사상이 들어오기 전까진
    남존여비사상이 조선같지 않았다...고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한 예로 여자가 재가를 하는 건 꿈도 못꾸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전까지만해도
    여자들의 혼인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고 하시면서요.

    암튼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요즘 재밌게 보는 선덕여왕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겠습니다.

  9. 가야진 2009.07.31 0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때는 사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게 사실 의미가 불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혼은 허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남녀 모두가 중혼적 성격을 가진 연인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자식도 모계사회인 신라의 골품제에 따라 진골까지는 신분을 부여 받았으니까요.

    여성의 힘에 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천추태후 등에서도 황제가 죽은 후 연인을 두는 모습이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다수의 역사서에서도 조선의 유고 사상 또한 중기 이후 정착한 것이고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권이 힘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보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남성사회로 이어져오긴 했지만,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남성의 권력이 사회의 기득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해요.(내조의 여왕처럼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한 실질적 정치가 아내와 어머니등의 여성이 상당했으니까요.)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가긴 했지만, 저는 천명이 마야의 자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잉첩들도 순수 혈통인 성골 출신으로만 이루어 져있기는 해도 이미 족강된 후이고, 천명이 후비의 자식이라면 정비의 자식인 덕만과 나이가 비슷한 상황에서 왕위계승자인 아들이 없다고해도 마야소생 이외의 인물이 권력을 가지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신라에서 초혼은 대부분 왕을 제외하고는 여성의 골품이 더 높거나 같은 진골이라 해도 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와 하는 것이 일반적이 잖아요.


    예전에 어디서 들은 말인지, 읽은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머리 속에는 성골에서 족강되면 진골의 가장 위 계층이 되고 최근에 족강된 사람이 더 오래전 족강된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기억이 있거든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천명이 마야 소생이 아니라면 용수와 천명의 결혼은 불가하지 않았을까요?
    천명의 어머니가 성골이었다해도 용수보다는 더 오래전에 족강되었을테니까요.

    아, 글을 쓰다보니.... 아닐 수도 있겠네요. 천명의 어머니가 용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저것도 가능하긴 할 것 같아요.

    휴, 요즘 선덕여왕 때문에 도서관에 선덕여왕 관련 책을 다 봐서 역사 공부는 되는데, 드라마 나이 설정이 뒤죽박죽이라 덕분에 제 머리도 뒤죽박죽이예요.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암튼, 저는 천명이 후비소생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글 덕분에 경녕군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됬어요. 브라보~!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비이거나 마야이전 정비라고 했던것 같은뎅..
      족강은 조선이 더 심했지요.. 신라보단

      오르기도 힘들고, 내려가기는 쉽고, 하지만, 조선의 전란이후는 다르지만.. 돈을 주면 언제든지.. 파고 사는게 족이였으니요..

  10. 오타발견!! 2009.07.31 0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께서 쓰신 글인가요? 잘 봤습니다.

    코를 찔찔 흘리며 다니던 어릴 시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관계로 우연히 지나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선덕여왕도 너무 좋아합니다.ㅎㅎ)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됐던 글인 것 같아 잘 보고 갑니다.

    근데, 서론에 나오는 일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지은 그를 말씀하시는게 맞겠죠?


    예를 들면, 진수의 삼국지를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서 했던 그런 부류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어쨌든, "의의를 제기" 라고 쓰셨는데, 의의라는 것은 '말이나 글의 속 뜻' 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의를 제기" 라고 쓰셔야 할 듯 하네요.ㅎㅎ

    문맥상 '다른 의견이나 주장' 이 들어가야 맞을 듯한 전개네요.ㅎ

    어찌됐든 잘 보고 갑니다.^^ㅎ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날려서 쓰는 버릇이 있어서요.. 자주 틀리는 것이였습니다.. 지적 ㄳ 합니다..

      제가 쓴것 맞습니다. 맞고요..

  11. 향수 2009.07.31 0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조목조목 잘 비교하시면서 쓰셨네요..
    그저 알려진 정도의 역사만 알뿐이었는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런글 열심히 써주세요..
    부지런히 읽어드릴께요..

  12. 제가 알기로는 2009.07.31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실과 천명 모두 오직 <화랑세기>에만 기록되어 있어 그 둘이 가상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또 이런 글을 보니 흥미롭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공히 있는뎅..

      3녀인 천화를 말씀하시는것 아니신지요?

      화랑세기에는 덕만이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시호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덕, 천명, 천화.. 조금 냄새가 나지요.. 선화의 다른 이름 같은 천화라..

      흥미로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__^

  13. 재주소녀 2009.07.31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렵지만...잼있네요~
    댓글 쓰는거 어려운거 아니네요
    ㅋ 부끄럽지만 처음 써봅니다.

  14. 캐스퍼 2009.07.31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잘 정리 되신다면... 후에...
    "계급사회 변천사"를 쓰세요....
    아직까지....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근대화 시대....
    변변한 "계급사회의 변천사"가 없었습니다...
    아주 좋은 책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어려운 말씀을 저는 그정도는 아닙니당.. 제 밥그릇도 있는뎅.. ㅠ.ㅠ.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당.. 고수는 널려 있는게 강호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칭찬은 ㄳ히 받겠습니당.. 염치불구하공..

      물론 추천도 때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댓글들을 다시는 분들이라면.. ㅋㅋ ^___^;;;

  15. -- 2009.07.31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역시 신라의 골품제와 조선의 적서개념을 뒤섞으면 안된다는 댓글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서개념은 부계를 따르는 것이고

    골품제는 부계와 모계에 모두 적용되는 겁니다..

    두 가지를 같은 원리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부계뿐 아니라 모계혈통도 중시되었기 대문에 지소부인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선덕,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너무 사료를 쉽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셨네요...

  16. BlogIcon 아르제크 2009.08.30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초기에 왕가의 적서 문제가 엄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성계가 자신의 이모형 이원계가 '서자'라고 몰아 아버지 이자춘의 다루가치 직을 대신 취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이원계의 자녀들은 이천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계로부터 이반합니다)
    2. 이방원이 '서모'인(그러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세자 방석을 '서자'라는 이유로 폐했기 때문
    3. 성리학의 부계일원적 구조를 이제 막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또 태종 스스로가 성리학자이기도 했고요)

    왕가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함께 사회변혁에 대한 솔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적서 구분에 목을 매단 것입니다.
    실제 여말선초 사회에서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매모호한 측면조차 보입니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적자만을 인정하는 형태로 변해간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재상인 하륜은 3대째에 적손의 대가 끊기게 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당시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륜의 서손을 적손으로 인정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논의 결과, 공신 집안 하나를 우대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나라의 법을 확실히 하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특별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만일 적서의 구분이 이미 당연하고 엄밀한 것이었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꼭 신라까지 갈 것도 없이 고려말만 보더라도, 이모형제(이원계-이성계-이화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이부형제(이성림-염흥방)와 같은 케이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직에 등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엄밀한 적서차별과 재가녀의 자식에 대한 천대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라시대에 성골 진골 구분의 실체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에는 저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좀 읽은 사람으로서 동의합니다만, 갓쉰동님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서도 독자들에게 성골진골을 구분하는 신라라면 적서구분이 있었음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30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골/진골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서가 붙은 거지요.. ^___^

      왕은 무치인데 적서의 차별이 있었겠습니까만은,, 공식적인 왕비의 후손이 왕통을 잇는것은 당연한거지요.. 1차 고려를 한다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후계의 선택은 왕에 있는 것이고,,적이던 서던 말이지요.. 그러니 적서의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요..

  17. 냠냠냠 2009.09.22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초혼이라고해서 나이가 어렸을껏이라고 생각하는건 말 그대로 '짐작'이겠지요.

  18. BlogIcon 천산 2009.10.14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국유사왕력보에 기록된 배필이 되는 飮갈문왕이 누구인지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수절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편이 죽은 후가 되는데, 갓쉰동님은 飮갈문왕이 선덕여왕 시절에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알고 계시네요! 왜 그렇습니까? 님의 주장대로라면, 서기634년에 飮갈문왕을 세웠는데, 언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10.15 0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절은 농담이였습니당.. ㅋㅋ
      그러니 음갈문왕이 언제 사망했는지, 아닌지는 제가 알길이 없지용..

  19. 레아 2009.10.22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젊었을때 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선 태클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평왕은 10대 중반의 나이에 등극을 해서 왕위 계승기간이 자그만치 50여년이 되는데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면 그건 진평왕이 임기 말년에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이야기 이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22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덕여왕은 젊었을때 즉위한 것 같아용..
      마야부인이 천명의 어미라는 기록은 없지용.. 반면에 덕만은 마야와 진평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든요. ㅋㅋ

  20. BlogIcon soup can storage rack 2012.11.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21.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dogs for sale 2012.11.05 1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거나 이설이 있음을 곧잘 지적하던 일연은 진평왕의 장녀이며, 마야부인의 딸이라는데 이의제기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의 무서움은 기존 사서의 빈틈을 칼처럼 파고 들고 있다. 그동안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선덕여왕이 덕만에 관한 기록에서도 화랑세기의 위력은 발휘된다.

그런데 뜸금없이 화랑세기는 무슨 소리, 덕만은 진평왕의 딸인것은 분명하고, 마야부인의 딸인것은 맞지만, 천명이 맏이고, 덕만은 천명의 동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도 덕만이 천명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는 무엇을 근거로 덕만이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언젠가는 화랑세기를 심층 분석할 때가 올것이다.


사실 덕만의 기록을 심층분석하고 있는 이유도 현존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 뛰어들려는 의도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글쓴이는 그동안 덕만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지만, 천명은 마야의 소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나아가 덕만이 기존에 알고 있던 늙었을때 왕위에 오르지 않고, 극히 젊은 나이때 즉위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또하나, 덕만과 천명이 다른 출자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이전글에서 흘렸다.

덕만이 가지고 있는 남성스런 이름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신라 당시에도 여성은 여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덕만의 어미인, 마야, 진평의 어미인 만호(이것도 약간의 중성을 넘어 남성성이 보이긴한다.) 지소, 지조, 선혜왕후, 보희,문희 등 그 나름대로 여성성이 보이지만, 뜸금없이 덕만이라니, 덕만이 가지고, 있는 뜻은 결코 나쁜 뜻은 아니다. 덕을 널리 퍼트리고 길게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전 글 [역사이야기] - 천명이 말한 덕만의 촌(?)스런 이름의 이유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덕만의 이름이 가지는 남성성

덕만이 천명의 나이어린 이복동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여자 아이의 이름에 남자의 이름을 붙혀 다음 출생자가 남자이길 소망하는 이름을 짓기고 한다. 또한, 여자이름 중에 끝순이, '말희', '끝네', '말자'라는 이름은 대부분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말자는 뜻도 있지만, 여자 아이는 그만 낳자란 뜻을 포함하고, 삼신할미에게 다음은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하다.

이름에서도 덕만은 위로 많은 언니들을 두었음직하지 않는가? 덕이 있으라는 뜻도 되겠지만, 태어나자 마자, 왕실에 아들들로 번창할 덕을 빌었음 직한 이름이니 말이다.

 
만약, 덕만이 천명보다 언니라면 진평왕의 첫번째 공주의 이름을 '덕만'이란 남성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여쁜 공주의 이름에 덕만이라니, 다음에 왕자를 생산을 염원하기 위해서 '덕만'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만만의 콩떡이 된다. 진평은 왕이다. 언제든지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진평왕 초년에 덕만의 이름을 지었다면 진평왕의 머리가 좀 이상스러운 것이다.

 
덕만의 이름은 진평왕과 왕실의 절실한 적통을 이을 왕자를 바라는 이름이다. 또한, 마야도 제일 왕후는 아닌 것이다.  

덕만과 천명이 이복자매라는 또 다른 증거 (세종과 그의 형 경녕군)

또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조선시대 세종에 관한 기록이다. 세종을 우리는 이방원의 3번째 아들로 알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하게된 배경도 너무나 잘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과연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일까? 아니라고 한다면 총맞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태종(이방원)의 3번째 아들이 아니다.


일단, 세종(이도)을 태종(이방원)의 3째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즉위 초년 세종이 세계를 기록한 내용을 살펴 보자.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다. - 조선왕조 실록 세종


이기록만 있다면, 세종은 태종의 3째 아들 같지 않는가? 그리고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녕군의 휘는 비(裶)이고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1395년(태조 4) 12월 13일 개성의 정안군(후의 태종)의 사저에서 효빈 김씨의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관후하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 전주이씨 대동종보 경녕군

드라마 대왕세종을 본 사람은 이방원의 또다른 아들 경녕군이란 이름을 들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종의 아들이고, 후비 효빈 김씨 소생이다. 그런데 경녕군은 1397년생 세종(이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경녕군은 세종보다 형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머니는 효빈김씨로 세종과는 다른 후비 효빈 김씨라는 사실 뿐이다. 경녕군과 충녕군은 서로 출신성분 자체가 다르다.


그럼, 태종의 셋째아들은 누구일까? 세종일까? 아니면 경녕군일까? 경녕군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답은 둘째로 알고 있는 효령대군이다. 드라마 세종대왕에서는 경녕군을 효령대군보다 아우(?)로 했었던것 같다. 기억에 의존하는 관계로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상식으로는 경녕군이였다.

사실 경녕군은 태종(이방원)의 첫째인 양녕대군(1394년) 다음 1395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1396년 태어난 효령대군 보다도 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3번째 아들 세종(이도:충녕대군)은 잘못된 것일까?  답은 아니다, 세종은 태종의 3번째 아들이 맞다. 이유는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의 3번째라는 것이고, 적통을 이을 3번째 왕자가 세종(충녕군:이도)이란 뜻이 된다. 왕의 계승서열 3순위인 3번째 왕자라는 것이다. 사사로이는 경녕군이 충녕군(세종)의 형이 되지만, 왕통서열은 존재조차 미미한 후비의 소생이 된다. 물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후비가 되거나 폐출되어 폐서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왕가의 일은 적자/서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양반, 서얼을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서얼은 처주지도 않았다. 특별히 기록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또한, 정비의 소생이냐 후비의 소생이냐의 차이에 따라 신분은 하늘과 땅이 되는 것이다. 같은 왕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마디로 역사를 연구할때 적자, 서자, 적통를 구별할 줄 모르면 삼천포로 빠진다.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왕위를 잇는데 신라가 조선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이 있었지 않겠는가? 진골도 아니고, 성골임금인데 말이다. 사실 글쓴이는 성골.진골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살피고 살펴봐도 성골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왕족, 귀족의 구분만 읽었다. 

그럼 다시 신라의 선덕왕(덕만)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 - 삼국사기 선덕왕 원년(632년)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의 끝누이였다.  - 삼국사기 신라 춘추왕 원년

이제 요즘과는 다른 적자/서자, 양반/서얼 등 왕가의 룰이나 양반가의 룰에 따라, 읽어보자.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김춘추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의 딴지맨인 일연이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 기사에 딴지를 걸지 않는 이유는 일연도 마야부인의 맏딸로 덕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딴지맨 일연이 삼국사기에 딴지를 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의 늙으막에 얻은 승만왕후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승만왕후에 아들이 없어 왕통을 이을수 없었기 때문에 덕만이 마야부인의 소생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연은 삼국사기에는 없는 덕만이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짐작하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덕만의 결혼기사이다.

王之匹飮葛文王 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여왕이 왕위에 있을때 결혼하고 있다니, 덕만이 왕위에 오를때 어렸다는 결정타가 아닌가? 물론, 남자왕처럼 비를 많이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누구를 누구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첫결혼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한다.

현존하는 <화랑세기>를 의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제 예고한 대로 선덕왕이 왕위에 올랐을때 덕만에 대한 평가를 보도록 하자.

위의 문장은 선덕(덕만)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하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뒤의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내용을 수식하기 위한 내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덕만과 관련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사로 넘기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

성품이 너그럽고,어질다
  영묘사 화재사건을 일으킨 <지귀설화>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지귀와 덕만 공주시절(?) 영묘사에서 만나다. 

<김유신의 춘추/문희불쇼>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 공주시절 덕만이 엮어준 김춘추와 문희 
어찌 되었던, 현존하는 화랑세기가 진짜던 가짜던 상관없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김유신 감독, 각본, 주연, "김춘추를 내사람으로 " 드라마에서 등장한 덕만이 신라 여왕(632년~647년) 시기에 있었던 일이 아닌 진평왕의 공주시절(628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증명하였다. 


총명하다.
<모란꽃,모란씨서되>
 [역사이야기] - 덕만의 자격지심, 627년 11월에 들어온 모란씨 서되

민첩하다

200
631년에 진평왕 말년 <칠숙의 난>
[역사이야기] - 미실의 충복 칠숙, 사실은 왕위 계승 일순위자

아직도 <성조황고>를 들어서 덕만은 나이가 많았을 거야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분이나 "그건 니생각이고"라고 하는 분들은 [역사이야기] - 이요원보다 남지현 나이때 왕위에 오른 덕만 <황고>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거를 제시했다. 귀찬으신 분을 위해서 요약하자면, <성조황고>는 성스런 조상을 둔 임금(황제)의 성숙한 여식이란 뜻이다.

너무 어릴때 628년이전 문희와 김춘추를 얶어준 사건이 628년이라면 너무 덕만이 이른시기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만이 632년 왕위에 오르고, 632년 결혼하고, 연호를 바꾸는  것을 근거로 635년 18~20세 전후라면 <모란꽃>, <김유신불쇼> 사건들은 덕만으로서 너무 어릴때 사건이 아닌가 의심할 수 도 있다. 

632년 16세에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면, 627년은 11살때 일이고, 628년이면 12살때 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좀 어려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모란꽃 사건은 늙은 왕이 아주 어린 공주에나 물어 봄직한 말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엔 깜짝 놀랄 추리 능력을 보인 덕만을 보고, 진평과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용봉의 자질이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기록이  "
총명하다"는 기록으로 남았다면 어떨가? 또한, 12살이전에 있었던 김유신의 불쇼에서 살려준 문희와 그의 복중 아들 법민은 어떨까? 어리지만 너그러워움의 상징이 아닌가?  지귀심화에서 신분도 미천한 지귀를 위해서 행한 행동들은 "너그러움" 자체이다. 또한, 지귀심화로 소실된 영묘사와 잦은 화재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할때 처리하는데 부적같은 주문을 만들어 백성들을 안정화 시키는 것으로 너그러움과 총명함과 민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민첩하다" 라는 말은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때, 단순한 미사어구가 아닌 , 덕만은 <성조황고>이니 정통성에 하자도 없을 뿐만 아니고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PS. 사실 세종대왕의 기사는 천명과 덕만은 같은 어미의 자식이다.라고 주장하는 혹시 모를 딴지가 들어올 반박문을 위해서 남겨두었습니다만, 이제 노출합니다. 이외에도 연산군과, 광해군의 출자를 비교해 본다면, 왜 적통 적자/서자에 연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실 암투의 시작과 끝은 적자들간에도 있었지만, 서자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정비와 후비들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후비가 정비가 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소생들인 왕자나 공주들은 인생의 역전 대박 로또가 되니 말입니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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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호.. 2009.07.30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보고갑니다. 이복형제라.....

  3. 헤윰 2009.07.30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4. 재밌네욤 2009.07.31 0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보았네요~~ 그런데 저도 앞에 계신 '성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신라시대의 골품제와 조선시대의 적장자 제도를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두 사회 모두 철저한 신분사회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골품제와 적장제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등장한 적장자의 개념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님께서 마지막 부분에 "설마 성골.진골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신라가 조선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쓰신 부분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런지...

    각기 다른 시대의 신분제도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물론 그 만큼 강력한 신분 사회였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으셨다는 느낌은 듭니다만...

    이러한 유교적인 관례가 뿌리 내린 것은 조선 성종 이후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된 때 부터 입니다..

    단적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의 후궁 중에 시집갔다 온 과부도 있었답니다..

    조선시대에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죠..

    조선 초기의 족보에는 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답니다. 하지만 중기이후에 대전체제가 완성되면서 부터 아들

    을 중심으로 족보가 쓰여지고 있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서는 비슷하고, 신라가 더 강경했지요..

      이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중기 이후다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남.여, 적서 차별 등 중기 조선 중기이후에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초기 기록을 내 놓은것 아닌가요? 그것도 살펴 보시길..

      왜 하필 조선의 초기기록을 들어서 조선과 신라를 비교했겠는지요..

      이글로 답변이 충분히 되었기를..
      님들은 저의 주장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보론 성격입니다.. 반론이 아니공..

  5. 흐음... 2009.07.31 0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이 되겠습니다만.....그냥 왠지 썩 잘 읽혀지는 글은 아니라서....뭔가 말이 맞지 않네요. 제 이해력이 딸리는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이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는 될 수 없다. 물론, 의붓 큰어미이기는 하다."

    ㅡㅡ> "그렇다고 해서 경녕군이 세종의 어미인 원경왕후 민씨의 아들(혹은 소생)이 될 순 없다. 물론, 그의 의붓 큰어미 이기는 하다." 라고 쓰셔야 말이 될듯 하네요.

    또 " 그러니 일연은 선덕 또한, 진평왕의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일연은 선덕 또한" 다음에 왜 진평왕 말년에 정비는 승만왕후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쓰신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_-;

  6. 딩가딩가딩 2009.07.31 0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

  7. BlogIcon Blah 2009.07.31 0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 기억이지만 그전 국사선생님 중 한 분이 조선에 유교사상이 들어오기 전까진
    남존여비사상이 조선같지 않았다...고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한 예로 여자가 재가를 하는 건 꿈도 못꾸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전까지만해도
    여자들의 혼인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고 하시면서요.

    암튼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요즘 재밌게 보는 선덕여왕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겠습니다.

  8. 가야진 2009.07.31 0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때는 사실 한 어머니,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게 사실 의미가 불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혼은 허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남녀 모두가 중혼적 성격을 가진 연인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자식도 모계사회인 신라의 골품제에 따라 진골까지는 신분을 부여 받았으니까요.

    여성의 힘에 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천추태후 등에서도 황제가 죽은 후 연인을 두는 모습이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다수의 역사서에서도 조선의 유고 사상 또한 중기 이후 정착한 것이고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권이 힘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보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남성사회로 이어져오긴 했지만,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남성의 권력이 사회의 기득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해요.(내조의 여왕처럼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한 실질적 정치가 아내와 어머니등의 여성이 상당했으니까요.)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가긴 했지만, 저는 천명이 마야의 자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잉첩들도 순수 혈통인 성골 출신으로만 이루어 져있기는 해도 이미 족강된 후이고, 천명이 후비의 자식이라면 정비의 자식인 덕만과 나이가 비슷한 상황에서 왕위계승자인 아들이 없다고해도 마야소생 이외의 인물이 권력을 가지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신라에서 초혼은 대부분 왕을 제외하고는 여성의 골품이 더 높거나 같은 진골이라 해도 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이와 하는 것이 일반적이 잖아요.


    예전에 어디서 들은 말인지, 읽은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머리 속에는 성골에서 족강되면 진골의 가장 위 계층이 되고 최근에 족강된 사람이 더 오래전 족강된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기억이 있거든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천명이 마야 소생이 아니라면 용수와 천명의 결혼은 불가하지 않았을까요?
    천명의 어머니가 성골이었다해도 용수보다는 더 오래전에 족강되었을테니까요.

    아, 글을 쓰다보니.... 아닐 수도 있겠네요. 천명의 어머니가 용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저것도 가능하긴 할 것 같아요.

    휴, 요즘 선덕여왕 때문에 도서관에 선덕여왕 관련 책을 다 봐서 역사 공부는 되는데, 드라마 나이 설정이 뒤죽박죽이라 덕분에 제 머리도 뒤죽박죽이예요.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암튼, 저는 천명이 후비소생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글 덕분에 경녕군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됬어요. 브라보~!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비이거나 마야이전 정비라고 했던것 같은뎅..
      족강은 조선이 더 심했지요.. 신라보단

      오르기도 힘들고, 내려가기는 쉽고, 하지만, 조선의 전란이후는 다르지만.. 돈을 주면 언제든지.. 파고 사는게 족이였으니요..

  9. 오타발견!! 2009.07.31 0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께서 쓰신 글인가요? 잘 봤습니다.

    코를 찔찔 흘리며 다니던 어릴 시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관계로 우연히 지나치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라마 선덕여왕도 너무 좋아합니다.ㅎㅎ)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됐던 글인 것 같아 잘 보고 갑니다.

    근데, 서론에 나오는 일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지은 그를 말씀하시는게 맞겠죠?


    예를 들면, 진수의 삼국지를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서 했던 그런 부류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어쨌든, "의의를 제기" 라고 쓰셨는데, 의의라는 것은 '말이나 글의 속 뜻' 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의를 제기" 라고 쓰셔야 할 듯 하네요.ㅎㅎ

    문맥상 '다른 의견이나 주장' 이 들어가야 맞을 듯한 전개네요.ㅎ

    어찌됐든 잘 보고 갑니다.^^ㅎㅎㅎ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날려서 쓰는 버릇이 있어서요.. 자주 틀리는 것이였습니다.. 지적 ㄳ 합니다..

      제가 쓴것 맞습니다. 맞고요..

  10. 향수 2009.07.31 0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조목조목 잘 비교하시면서 쓰셨네요..
    그저 알려진 정도의 역사만 알뿐이었는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앞으로도 이런글 열심히 써주세요..
    부지런히 읽어드릴께요..

  11. 제가 알기로는 2009.07.31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실과 천명 모두 오직 <화랑세기>에만 기록되어 있어 그 둘이 가상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그런데 또 이런 글을 보니 흥미롭네요.^^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공히 있는뎅..

      3녀인 천화를 말씀하시는것 아니신지요?

      화랑세기에는 덕만이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시호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덕, 천명, 천화.. 조금 냄새가 나지요.. 선화의 다른 이름 같은 천화라..

      흥미로웠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__^

  12. 재주소녀 2009.07.31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렵지만...잼있네요~
    댓글 쓰는거 어려운거 아니네요
    ㅋ 부끄럽지만 처음 써봅니다.

  13. 캐스퍼 2009.07.31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글이 잘 정리 되신다면... 후에...
    "계급사회 변천사"를 쓰세요....
    아직까지....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근대화 시대....
    변변한 "계급사회의 변천사"가 없었습니다...
    아주 좋은 책이 될것으로 보입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31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어려운 말씀을 저는 그정도는 아닙니당.. 제 밥그릇도 있는뎅.. ㅠ.ㅠ.

      즐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당.. 고수는 널려 있는게 강호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칭찬은 ㄳ히 받겠습니당.. 염치불구하공..

      물론 추천도 때려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댓글들을 다시는 분들이라면.. ㅋㅋ ^___^;;;

  14. -- 2009.07.31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역시 신라의 골품제와 조선의 적서개념을 뒤섞으면 안된다는 댓글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서개념은 부계를 따르는 것이고

    골품제는 부계와 모계에 모두 적용되는 겁니다..

    두 가지를 같은 원리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부계뿐 아니라 모계혈통도 중시되었기 대문에 지소부인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선덕,진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너무 사료를 쉽게 자의적으로 해석하셨네요...

  15. BlogIcon 아르제크 2009.08.30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초기에 왕가의 적서 문제가 엄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성계가 자신의 이모형 이원계가 '서자'라고 몰아 아버지 이자춘의 다루가치 직을 대신 취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이원계의 자녀들은 이천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계로부터 이반합니다)
    2. 이방원이 '서모'인(그러나 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세자 방석을 '서자'라는 이유로 폐했기 때문
    3. 성리학의 부계일원적 구조를 이제 막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또 태종 스스로가 성리학자이기도 했고요)

    왕가는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함께 사회변혁에 대한 솔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적서 구분에 목을 매단 것입니다.
    실제 여말선초 사회에서 적서의 구분은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매모호한 측면조차 보입니다.
    그것이 조선에 들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적자만을 인정하는 형태로 변해간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재상인 하륜은 3대째에 적손의 대가 끊기게 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당시에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륜의 서손을 적손으로 인정해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논의 결과, 공신 집안 하나를 우대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나라의 법을 확실히 하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특별 대우는 해줄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만일 적서의 구분이 이미 당연하고 엄밀한 것이었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꼭 신라까지 갈 것도 없이 고려말만 보더라도, 이모형제(이원계-이성계-이화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이부형제(이성림-염흥방)와 같은 케이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직에 등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엄밀한 적서차별과 재가녀의 자식에 대한 천대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라시대에 성골 진골 구분의 실체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에는 저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좀 읽은 사람으로서 동의합니다만, 갓쉰동님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서도 독자들에게 성골진골을 구분하는 신라라면 적서구분이 있었음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요.

    • BlogIcon 갓쉰동 2009.08.30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골/진골을 믿는 사람이라면 단서가 붙은 거지요.. ^___^

      왕은 무치인데 적서의 차별이 있었겠습니까만은,, 공식적인 왕비의 후손이 왕통을 잇는것은 당연한거지요.. 1차 고려를 한다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후계의 선택은 왕에 있는 것이고,,적이던 서던 말이지요.. 그러니 적서의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요..

  16. 냠냠냠 2009.09.22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초혼이라고해서 나이가 어렸을껏이라고 생각하는건 말 그대로 '짐작'이겠지요.

  17. BlogIcon 천산 2009.10.14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국유사왕력보에 기록된 배필이 되는 飮갈문왕이 누구인지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수절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편이 죽은 후가 되는데, 갓쉰동님은 飮갈문왕이 선덕여왕 시절에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알고 계시네요! 왜 그렇습니까? 님의 주장대로라면, 서기634년에 飮갈문왕을 세웠는데, 언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까?

    • BlogIcon 갓쉰동 2009.10.15 0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절은 농담이였습니당.. ㅋㅋ
      그러니 음갈문왕이 언제 사망했는지, 아닌지는 제가 알길이 없지용..

  18. 레아 2009.10.22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이 젊었을때 즉위를 했다는 것에 대해선 태클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평왕은 10대 중반의 나이에 등극을 해서 왕위 계승기간이 자그만치 50여년이 되는데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선덕여왕이 젊은 나이에 등극을 했다면 그건 진평왕이 임기 말년에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이야기 이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22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덕여왕은 젊었을때 즉위한 것 같아용..
      마야부인이 천명의 어미라는 기록은 없지용.. 반면에 덕만은 마야와 진평의 딸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거든요. ㅋㅋ

  19. BlogIcon soup can storage rack 2012.11.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 터이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20. BlogIcon invisible fence for dogs for sale 2012.11.05 1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명의 동생이라고 했을까? 그건 화랑세기에 맡기도록 하자.

  21. BlogIcon binary options 2013.02.21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욱이 마야부인도 진평왕과 나이차

예고한데로 오늘은 덕만의 남편인 <음갈문왕>을 통해서 덕만이 왕이 될수 밖에 없는 이유와 덕만이 젊어서 왕위를 이었고, 진평왕이 죽는 과정에서 벌어진 칠숙과 석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까 한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으로 삼을 생각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덕만이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 글쓴이는 이 결정적인 증거를 놓아두고,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덕만과 천명은 진평왕의 친자매이긴 하지만, 덕만은 마야왕후의 소생이고, 진평은 정비 마야의 후생이 아닌 마야 이전의 왕후의 소생이거나 또다른 후비의 소생일 것이다. 그러니 왕위계승우선권에 정비후생인 덕만이 우선권이 있었고,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사기>에 기록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일단, 인평 갑오년은 언제 해당할까? 인평 갑오년은 선덕왕 3년 634년에 해당한다.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삼국사기와 덕만과 관련될 사건들을 아무 생각 없이 삼국사기를 읽는 다면 이때의 선덕왕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최소 48살이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된 덕만이 왕으로 있고 난 3년차에 자신의 남편을 선택함을 알 수 있다.  

(c) mbc, 선덕여왕중 덕만과 천명

여왕벌이 배필을 맞이한 때가 여자로 치면 갱년기 다지난 48세이상에 남편을 얻어서 무엇에 쓰겠는가? 물론, 이때도 덕만의 후사를 잇고, 왕통을 계승할 후손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구통계 조사중 하나인 여성가임인구당 조사를 할때, 나 가임여성 1인당 총출산율을 산출할때 연령대는 15세에서 45세로  설정한다. 요즘도 45세 이상 여성이 가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덕만이 이때 남편이 결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첫 공식적인 남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삼국의 시대에는 극히 나이가 어린 여자나이 13세 정도에는 첫 대다수 월경이 지나고, 이때 부터 성인 대접을 하며, 결혼을 한다. 멀리 갈것도 없이, 요즘 동남아나 아프리가에 원시 부족을 가보자 이들은 월경이 지나면 결혼을 시켜버린다. 하물며 덕만이 나이가 50에 가까운 나이에 첫 남편을 맞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을 깨는 행위이다. 신라의 박혁거세나 알영은 공히 13세에 왕이 되고, 왕비가 되었다.

634년에 들어서 진평왕때 사용하던 연호를 왜 바꾸었을까?  대부분 나이어린 왕이 등극하고,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청을 끝내고 성인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통치할 경우 연호를 바꾼다. 또는 나라의 구습을 혁신하고, 일신우일신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에 의해서 도 바꾸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연호를 바꾼다는 행위는 기본적인 시간감각을 새로 셋팅하는 작업에 해당하는 것 만치 어려운 일이다.


진평왕의 계보도

덕만의 경우는 특별하게 진평왕때 사용한 연호를 자신의 임기3년차에 바꾸고, 공식적인 남편도 생겼다.


덕만이 선택한 '음'갈문왕은 덕만이 충분히 임신이 가능한 나이때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후사를 보고 후손을 통해서 왕위를 물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음갈문왕은 나이가 덕만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때 덕만의 나이는 몇살 정도가 되어야 할까? 30대 중후반을 넘기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왕후의 소생만을 중심으로 카운트를 한다면 덕만은 충분히 공식적인 <장녀> 된다.


그렇다면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은 누구일까? 글쓴이는 덕만의 작은아버지이고 진덕왕의 아버지인 국반갈문왕으로  본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음(飮)자와 반(飯)자는 식각의 오탈자일 가능성이 높기때문이고, 결정적으로 덕만의 말년(647년) 반란이 있고,그 여파로 덕만이 죽은 뒤 국반갈문왕의 딸인 승만(진덕)이 별탈없이 왕위를 승계하었기 때문이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덕만의 뒤를 이은 승만은 덕만의 의붓 딸이자, 고종사촌간이다. 이는 신라왕실에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니 덕만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고, 덕만이 백반을 남편으로 삼은 이유도 후사를 볼려하는 심사도 있었지만, 왕실의 가장 큰어른인 국반갈문왕인 작은아버지의 뒷배경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않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계승서열상 승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두어 왕위를 계승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하나의 증거로 천명과 다르게 승만과 덕만의 공통점은 <만>자 돌림을 쓰고 있다. 그러니 천명과 덕만은 같은 왕후의 소생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또한, 덕만은 죽은후 선덕이고, 승만은 즉은후 진덕이다. 이처럼 <덕>자 돌림의 시호를 받는다. 그러하니 덕만이 634년에 결혼한 남편은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국반(진안)갈문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백반을 공식 남편으로 부른 이유는 창녕조씨의 족보에 처음 "이씨였던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경주김씨 중에 "김인평이 덕만의 남편이였다"는 기록을 염두해 둔것이다.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하기 전에 최소한 1번 이상은 결혼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김인평의 이름을 살펴볼짝시면 <인평>이다. 인평은 덕만이 연호로 사용된 <인평:仁平>과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왕의 이름자를 피하는게 상례이다. 그런데 연호와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의심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평이란 이름을 사용하다. 연호를 사용하는 즈음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덕만, 선덕여왕의 결혼관계도

어찌 되었던 백반과 결혼전에 남편이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덕만 3년 634년에 연호와 남편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덕만이 왕위를 이은 때 나이는 10대중반이일 수 밖에 없어진다. 어찌 되었던 덕만이 연호를 바꾼 시기에 독자노선을 걷는 낭낭18세가 되었던 20세가 되었던, 덕만과 관련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살펴볼때 덕만은 왕위에 오를때 아주 많이 봐주어서 30을 갖넘었거나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결론이다. 그래야 삼국사기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들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미스 캐스팅같은 유신과 덕만의 비정상적인 나이를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나이를 배재한 역할로 따진다면, 역사와 부합할 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덕만은 유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춘추보다도 어렸을 지도 모른다.


634년 덕만의 결혼상대자가 백반(진정)갈문왕과 국반(진안)갈문왕 작은아버지들 중에서 국반(진안)갈문왕 일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증거를 앞선 기사와 이번 기사에서 언급했지만 보다 확실한 증거를 또하나 제시할 예정이다. 

기존 잘못된 정설을 깨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글이 늘어져 버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복으로 나오고, 뒤늦게 소화에게서 사랑을 느끼면 미실에서 벗어나려는 터미네이터 칠숙과 석품의 난을 통해서 이를 증명할 것이다. 또한,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에 대한 기사를 송고할 예정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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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영웅전쟁 2009.07.25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유신 아니 김춘추보다 더 어렸을 지도 모르는군요...
    매일 기다려야 하는군요 ㅎㅎㅎ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에
    대해서를 계속 포스팅 해주니 ㅎㅎㅎ
    고맙습니다.
    오늘도 많이 배우고 깨우치고 갑니다.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5 2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계속 칠숙과 석품의 난을 쓸려고 하는데..

      진도가 안나가네요.. 덕만이 하도 미스테리한 존재라서리.. ㅋㅋ

  2. 2009.07.25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애독자 2009.07.26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번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잘 이해가 안가서 질문드립니다.
    선덕여왕 - 덕만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근거가 잘 이해가 안갑니다.
    글에보면 근거가 분명히 나와있지 않고 단순히 가임나이로 추정하신듯 해서요..
    선덕여왕이 즉위때 몇살이었는지...
    학계의 통설과 갓쉰동님의 견해를 다시한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딴지?를 거는 듯한 댓글을 날려서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4. BlogIcon 최낙길 2009.07.26 1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딸로 진지왕때 출생한 것으로 사료된다 진평왕의 부는 진흥왕 첫째 왕자 동륜태자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음갈문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진평왕이 왕이되기전에 이미 그녀는 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면 음갈문왕 즉 남편이 있었다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 또한 모구로 표시하엿는데 모구란 무엇인가 50이상의 늙은 나이을 말한다 / 진평 무려 53년을 통치하다 모반의 충격으로 인하여 진평왕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선뎍여왕이 왕위를 계승 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것이다 선덕여왕의 출생년도를 579년으로 본다면 왕위에 오른춘추는 53세가 된다

  5. 재밌네요 2009.07.2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위에 댓글단 애독자분 말처럼요...저도 이해가 안되네요
    덕만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진평왕의 재위기간만 놓고 보더라도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평왕이 대략 52년정도 재위했고, 드라마에서도 그무렵에 덕만을 낳은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대략 덕만이 재위한 나이가 50대 초반이라는 설정이
    맞는게 아닐까요?
    물론 진평왕이 재위 후 2~30년이 지난후 덕만을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정실 부인인 마야 부인과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덕만이 어린나이에 재위했다는 것은 다소 억측이 아닌가 싶네요..^^;;

  6. 잘봤습니다 2009.07.26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역사다큐를 보니까 거기서도 여러가지 주변사실을 통해 선덕여왕은 50초반 정도에 즉위했을거라고 말을하더군요..

  7. 그랑께 2009.07.30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계룡의 원래 성씨를 차치하고서 다시 살펴본다면, "曺"는 우리말로 즉 당시 신라말로 "마실"이다. 마실은 마을이나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曺"는 마실 조, 음갈문왕의 "飮"은 마실 음! 여기서 너무나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실 조, 마실 음! 단지 발음의 억양이 다를 뿐이다. 음갈문왕이 "曺"갈문왕이란 말인가?

    조계룡의 후손은 엄연히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바로 창녕 조씨이다. 화왕산에는 용지가 있다. 창녕조씨 시조 탄생지라고 전해 온다.

    족보상에는 조계룡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평왕의 딸인 천명과 선화는 그 남편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고 실제 인물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덕만공주의 남편 즉 선덕여왕의 남편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음갈문왕.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인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기록은 창녕조씨 족보, 경주이씨족보, 경주김씨 족보상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8. BlogIcon hera 2009.08.07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서 덕만은 유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춘추보다도 어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닌거 가튼데 ^^

    김춘추가 29대 왕이고 덕만이 27대 왕이구요, 유신이 춘추의 딸(지소부인) 과 혼인했는데 어찌 덕만이 김유신, 김춘추 보다 나이가 어린지 ^^;;

    제 생각엔 덕만 > 유신 > 춘추 이 순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9. BlogIcon 카타리나^^ 2009.08.21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혼했다는것도 처음 알았네요 ㅡㅡ;;
    그렇군요...

  10. 레아 2009.10.18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게 아니며 덕만이 진평왕을 대신해 섭정을 한것을 왕위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19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평왕은 죽었는데 무슨 섭정을 합니깡..유흔통치라면 모를깡.. 그렇다고 해도.. 죽음 다음대 임금이 되는거지용.. ㅋㅋ

  11.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2. BlogIcon food storage supplies denver 2012.11.01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이종욱이.. 왜 이리 허점 많은 설을 유포하는지 모르겠어요..님이나 이종욱처럼

  13. BlogIcon cost of owning a dog vs cat 2012.11.05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비후생인 덕만이 우선권이 있었고,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사기>에 기록

  14. BlogIcon cheap helmets 2012.12.10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5. BlogIcon 72 hour kits for kids 2012.12.10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아무리 미국이 광우병내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유전적 결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광우병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축되기전에 소멸되었거나 도축과정에 은폐되거나 검역과정에 통과되어 전세계 식탁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6. BlogIcon great web site designs 2010 2012.12.22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꾸 침대위로 올라가서 먹으려고 하는 바람에.. 내 앞발을 빌려주었다. 흠.. 근데 다른 강아지들은 등뼈 주면 살살 갈아

  17. BlogIcon emergency preparedness kits victoria bc 2012.12.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18. BlogIcon emergency preparedness kits victoria bc 2012.12.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예고한데로 오늘은 덕만의 남편인 <음갈문왕>을 통해서 덕만이 왕이 될수 밖에 없는 이유와 덕만이 젊어서 왕위를 이었고, 진평왕이 죽는 과정에서 벌어진 칠숙과 석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까 한다.


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갑오년에 세웠다. -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으로 삼을 생각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덕만이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 글쓴이는 이 결정적인 증거를 놓아두고,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덕만과 천명은 진평왕의 친자매이긴 하지만, 덕만은 마야왕후의 소생이고, 진평은 정비 마야의 후생이 아닌 마야 이전의 왕후의 소생이거나 또다른 후비의 소생일 것이다. 그러니 왕위계승우선권에 정비후생인 덕만이 우선권이 있었고,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사기>에 기록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일단, 인평 갑오년은 언제 해당할까? 인평 갑오년은 선덕왕 3년 634년에 해당한다.

3년(634) 봄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었다. 분황사(芬皇寺)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 선덕왕 3년


삼국사기와 덕만과 관련될 사건들을 아무 생각 없이 삼국사기를 읽는 다면 이때의 선덕왕의 나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최소 48살이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된 덕만이 왕으로 있고 난 3년차에 자신의 남편을 선택함을 알 수 있다.  

(c) mbc, 선덕여왕중 덕만과 천명

여왕벌이 배필을 맞이한 때가 여자로 치면 갱년기 다지난 48세이상에 남편을 얻어서 무엇에 쓰겠는가? 물론, 이때도 덕만의 후사를 잇고, 왕통을 계승할 후손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구통계 조사중 하나인 여성가임인구당 조사를 할때, 나 가임여성 1인당 총출산율을 산출할때 연령대는 15세에서 45세로  설정한다. 요즘도 45세 이상 여성이 가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신라시대 덕만이 이때 남편이 결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첫 공식적인 남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삼국의 시대에는 극히 나이가 어린 여자나이 13세 정도에는 첫 대다수 월경이 지나고, 이때 부터 성인 대접을 하며, 결혼을 한다. 멀리 갈것도 없이, 요즘 동남아나 아프리가에 원시 부족을 가보자 이들은 월경이 지나면 결혼을 시켜버린다. 하물며 덕만이 나이가 50에 가까운 나이에 첫 남편을 맞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을 깨는 행위이다. 신라의 박혁거세나 알영은 공히 13세에 왕이 되고, 왕비가 되었다.

634년에 들어서 진평왕때 사용하던 연호를 왜 바꾸었을까?  대부분 나이어린 왕이 등극하고,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청을 끝내고 성인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통치할 경우 연호를 바꾼다. 또는 나라의 구습을 혁신하고, 일신우일신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에 의해서 도 바꾸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연호를 바꾼다는 행위는 기본적인 시간감각을 새로 셋팅하는 작업에 해당하는 것 만치 어려운 일이다.


진평왕의 계보도

덕만의 경우는 특별하게 진평왕때 사용한 연호를 자신의 임기3년차에 바꾸고, 공식적인 남편도 생겼다.


덕만이 선택한 '음'갈문왕은 덕만이 충분히 임신이 가능한 나이때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후사를 보고 후손을 통해서 왕위를 물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음갈문왕은 나이가 덕만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때 덕만의 나이는 몇살 정도가 되어야 할까? 30대 중후반을 넘기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된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왕후의 소생만을 중심으로 카운트를 한다면 덕만은 충분히 공식적인 <장녀> 된다.


그렇다면 덕만의 남편 <음갈문왕>은 누구일까? 글쓴이는 덕만의 작은아버지이고 진덕왕의 아버지인 국반갈문왕으로  본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음(飮)자와 반(飯)자는 식각의 오탈자일 가능성이 높기때문이고, 결정적으로 덕만의 말년(647년) 반란이 있고,그 여파로 덕만이 죽은 뒤 국반갈문왕의 딸인 승만(진덕)이 별탈없이 왕위를 승계하었기 때문이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 원년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 원년

덕만의 뒤를 이은 승만은 덕만의 의붓 딸이자, 고종사촌간이다. 이는 신라왕실에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니 덕만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고, 덕만이 백반을 남편으로 삼은 이유도 후사를 볼려하는 심사도 있었지만, 왕실의 가장 큰어른인 국반갈문왕인 작은아버지의 뒷배경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않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계승서열상 승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두어 왕위를 계승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하나의 증거로 천명과 다르게 승만과 덕만의 공통점은 <만>자 돌림을 쓰고 있다. 그러니 천명과 덕만은 같은 왕후의 소생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겠다. 또한, 덕만은 죽은후 선덕이고, 승만은 즉은후 진덕이다. 이처럼 <덕>자 돌림의 시호를 받는다. 그러하니 덕만이 634년에 결혼한 남편은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국반(진안)갈문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백반을 공식 남편으로 부른 이유는 창녕조씨의 족보에 처음 "이씨였던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경주김씨 중에 "김인평이 덕만의 남편이였다"는 기록을 염두해 둔것이다. 작은 아버지 국반갈문왕과 결혼하기 전에 최소한 1번 이상은 결혼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김인평의 이름을 살펴볼짝시면 <인평>이다. 인평은 덕만이 연호로 사용된 <인평:仁平>과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왕의 이름자를 피하는게 상례이다. 그런데 연호와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의심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평이란 이름을 사용하다. 연호를 사용하는 즈음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덕만, 선덕여왕의 결혼관계도

어찌 되었던 백반과 결혼전에 남편이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덕만 3년 634년에 연호와 남편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덕만이 왕위를 이은 때 나이는 10대중반이일 수 밖에 없어진다. 어찌 되었던 덕만이 연호를 바꾼 시기에 독자노선을 걷는 낭낭18세가 되었던 20세가 되었던, 덕만과 관련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살펴볼때 덕만은 왕위에 오를때 아주 많이 봐주어서 30을 갖넘었거나 10대후반에서 20대 초반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결론이다. 그래야 삼국사기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들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미스 캐스팅같은 유신과 덕만의 비정상적인 나이를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나이를 배재한 역할로 따진다면, 역사와 부합할 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덕만은 유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춘추보다도 어렸을 지도 모른다.


634년 덕만의 결혼상대자가 백반(진정)갈문왕과 국반(진안)갈문왕 작은아버지들 중에서 국반(진안)갈문왕 일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증거를 앞선 기사와 이번 기사에서 언급했지만 보다 확실한 증거를 또하나 제시할 예정이다. 

기존 잘못된 정설을 깨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글이 늘어져 버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충복으로 나오고, 뒤늦게 소화에게서 사랑을 느끼면 미실에서 벗어나려는 터미네이터 칠숙과 석품의 난을 통해서 이를 증명할 것이다. 또한,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에 대한 기사를 송고할 예정이다.

Posted by 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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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영웅전쟁 2009.07.25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이 유신 아니 김춘추보다 더 어렸을 지도 모르는군요...
    매일 기다려야 하는군요 ㅎㅎㅎ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에
    대해서를 계속 포스팅 해주니 ㅎㅎㅎ
    고맙습니다.
    오늘도 많이 배우고 깨우치고 갑니다.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 BlogIcon 갓쉰동 2009.07.25 2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계속 칠숙과 석품의 난을 쓸려고 하는데..

      진도가 안나가네요.. 덕만이 하도 미스테리한 존재라서리.. ㅋㅋ

  2. 2009.07.25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애독자 2009.07.26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쉰동님의 글을 재밌게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번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잘 이해가 안가서 질문드립니다.
    선덕여왕 - 덕만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근거가 잘 이해가 안갑니다.
    글에보면 근거가 분명히 나와있지 않고 단순히 가임나이로 추정하신듯 해서요..
    선덕여왕이 즉위때 몇살이었는지...
    학계의 통설과 갓쉰동님의 견해를 다시한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딴지?를 거는 듯한 댓글을 날려서 죄송하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4. BlogIcon 최낙길 2009.07.26 1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딸로 진지왕때 출생한 것으로 사료된다 진평왕의 부는 진흥왕 첫째 왕자 동륜태자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음갈문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진평왕이 왕이되기전에 이미 그녀는 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면 음갈문왕 즉 남편이 있었다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 또한 모구로 표시하엿는데 모구란 무엇인가 50이상의 늙은 나이을 말한다 / 진평 무려 53년을 통치하다 모반의 충격으로 인하여 진평왕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선뎍여왕이 왕위를 계승 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것이다 선덕여왕의 출생년도를 579년으로 본다면 왕위에 오른춘추는 53세가 된다

  5. 재밌네요 2009.07.2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위에 댓글단 애독자분 말처럼요...저도 이해가 안되네요
    덕만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진평왕의 재위기간만 놓고 보더라도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평왕이 대략 52년정도 재위했고, 드라마에서도 그무렵에 덕만을 낳은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렇게 따지면 대략 덕만이 재위한 나이가 50대 초반이라는 설정이
    맞는게 아닐까요?
    물론 진평왕이 재위 후 2~30년이 지난후 덕만을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정실 부인인 마야 부인과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덕만이 어린나이에 재위했다는 것은 다소 억측이 아닌가 싶네요..^^;;

  6. 잘봤습니다 2009.07.26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역사다큐를 보니까 거기서도 여러가지 주변사실을 통해 선덕여왕은 50초반 정도에 즉위했을거라고 말을하더군요..

  7. 그랑께 2009.07.30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계룡의 원래 성씨를 차치하고서 다시 살펴본다면, "曺"는 우리말로 즉 당시 신라말로 "마실"이다. 마실은 마을이나 관청을 가리키는 말이다. "曺"는 마실 조, 음갈문왕의 "飮"은 마실 음! 여기서 너무나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실 조, 마실 음! 단지 발음의 억양이 다를 뿐이다. 음갈문왕이 "曺"갈문왕이란 말인가?

    조계룡의 후손은 엄연히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바로 창녕 조씨이다. 화왕산에는 용지가 있다. 창녕조씨 시조 탄생지라고 전해 온다.

    족보상에는 조계룡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평왕의 딸인 천명과 선화는 그 남편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고 실제 인물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덕만공주의 남편 즉 선덕여왕의 남편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음갈문왕.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인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기록은 창녕조씨 족보, 경주이씨족보, 경주김씨 족보상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8. BlogIcon hera 2009.08.07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서 덕만은 유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고, 춘추보다도 어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닌거 가튼데 ^^

    김춘추가 29대 왕이고 덕만이 27대 왕이구요, 유신이 춘추의 딸(지소부인) 과 혼인했는데 어찌 덕만이 김유신, 김춘추 보다 나이가 어린지 ^^;;

    제 생각엔 덕만 > 유신 > 춘추 이 순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9. BlogIcon 카타리나^^ 2009.08.21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혼했다는것도 처음 알았네요 ㅡㅡ;;
    그렇군요...

  10. 레아 2009.10.18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만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게 아니며 덕만이 진평왕을 대신해 섭정을 한것을 왕위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BlogIcon 갓쉰동 2009.10.19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평왕은 죽었는데 무슨 섭정을 합니깡..유흔통치라면 모를깡.. 그렇다고 해도.. 죽음 다음대 임금이 되는거지용.. ㅋㅋ

  11. BlogIcon cheap vibram five fingers 2012.06.07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2. BlogIcon food storage supplies denver 2012.11.01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이종욱이.. 왜 이리 허점 많은 설을 유포하는지 모르겠어요..님이나 이종욱처럼

  13. BlogIcon cost of owning a dog vs cat 2012.11.05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비후생인 덕만이 우선권이 있었고, 덕만이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사기>에 기록

  14. BlogIcon cheap helmets 2012.12.10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든님 말씀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는 거지요.. 저의 질문은.. 그래서 제가 보종은 설원랑을 닮아서 너무나 눈설미가 있는건가라고 반문을 하잖아요.. 글의 행간은..

  15. BlogIcon 72 hour kits for kids 2012.12.10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아무리 미국이 광우병내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유전적 결함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광우병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축되기전에 소멸되었거나 도축과정에 은폐되거나 검역과정에 통과되어 전세계 식탁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6. BlogIcon great web site designs 2010 2012.12.22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꾸 침대위로 올라가서 먹으려고 하는 바람에.. 내 앞발을 빌려주었다. 흠.. 근데 다른 강아지들은 등뼈 주면 살살 갈아

  17. BlogIcon emergency preparedness kits victoria bc 2012.12.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18. BlogIcon emergency preparedness kits victoria bc 2012.12.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부러 아래와 같은 시리즈 기사들을 송고했던 것이다.

  19. BlogIcon nike air max baratas 2013.04.14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이 세상에 펼친다면 따스한 봄햇살만큼이나 이땅위에 가득할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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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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