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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선덕여왕, 정말 월야의 복야운동은 사실일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복야의 수장 월야(주상욱)을 대가야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이뇌왕의 아들인 월광태자(도설지왕)의 적자이자, 장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월야의 아버지인 월광태자는 누구의 자식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을 우선 따라가 보자. 9년(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 삼국사기 신라 법흥왕 9년 522년 이 당시 대가야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비조부의 누이랑 결혼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 비조부의 이름이 심상치가 않다. 비조부는 화랑세기에 문노(비조부/문화)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정확히 대가야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통설에 의하면 이때의 왕의 이름이 대가야 9대 이.. 더보기
선덕여왕, 정말 월야의 복야운동은 사실일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복야의 수장 월야(주상욱)을 대가야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이뇌왕의 아들인 월광태자(도설지왕)의 적자이자, 장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월야의 아버지인 월광태자는 누구의 자식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을 우선 따라가 보자. 9년(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 삼국사기 신라 법흥왕 9년 522년 이 당시 대가야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비조부의 누이랑 결혼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 비조부의 이름이 심상치가 않다. 비조부는 화랑세기에 문노(비조부/문화)의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정확히 대가야의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통설에 의하면 이때의 왕의 이름이 대가야 9대 이.. 더보기
보과와 법흥 그리고 진흥왕은 천수를 누리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의 결혼동맹(?)은 4번에 걸처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사항은 이전에 포스팅한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와 신라 결혼, 서동과 선화공주 그리고 를 참조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법흥(원종)과 보과공주의 사랑인데, 보과공주는 과연 백제의 어느왕의 자식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전글에서 다음과 같이 동성왕의 왕녀로 알려진(?)으로 기술했었습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동성왕녀은 아닐것이라는 암시를 했었습니다. 첫번째 법흥(원종과 보과공주) 첫 결혼의 첫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법흥(원종)과 동성왕녀 보과공주, 일단 보과공주라고만 하자. (3세)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宝果公主)와 더불어.. 더보기
보과와 법흥 그리고 진흥왕은 천수를 누리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의 결혼동맹(?)은 4번에 걸처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사항은 이전에 포스팅한 [역사이야기] - 선덕여왕에는 나오지 않는 백제와 신라 결혼, 서동과 선화공주 그리고 를 참조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법흥(원종)과 보과공주의 사랑인데, 보과공주는 과연 백제의 어느왕의 자식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전글에서 다음과 같이 동성왕의 왕녀로 알려진(?)으로 기술했었습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동성왕녀은 아닐것이라는 암시를 했었습니다. 첫번째 법흥(원종과 보과공주) 첫 결혼의 첫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법흥(원종)과 동성왕녀 보과공주, 일단 보과공주라고만 하자. (3세)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宝果公主)와 더불어.. 더보기
신라 성골은 없다고 신라인 설계두가 말하다.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다. 글쓴이는 [[역사이야기] - 사극으로 배우는 역사, 성골은 없다.] 에서 성골은 없고, 진골이 곧 성골이며, 왕족이라고 주장했다. 위글에 이어서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일명 , 있었다고 생각 하는 진평왕때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설계두(薛頭)도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 더보기
신라 성골은 없다고 신라인 설계두가 말하다. 성골이 진골이고 진골이 성골이다. 글쓴이는 [[역사이야기] - 사극으로 배우는 역사, 성골은 없다.] 에서 성골은 없고, 진골이 곧 성골이며, 왕족이라고 주장했다. 위글에 이어서 글을 이어 가고자 한다. 일명 , 있었다고 생각 하는 진평왕때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설계두(薛頭)도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 더보기